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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이백의 시를 만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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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이백의 시를 만나다니!

[꽃산행 꽃글] 백두산 가는 길 ⑥

백두산 정상에는 비, 바람, 구름, 우박, 벼락, 얼음은 살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지 못했다. 정상부 아래인 흑풍구 근처에서부터 파릇한 야생화들이 자라고 있었지만 이미 철이 지난 뒤였다. 더구나 중국인이 사납게 모는 지프차는 사진이라도 찍고 싶어 하는 마음을 계속 방해했다. 결국 천지 주변과 백두산 사면에서는 꽃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백두산을 내려와야 했다. 백두산의 허리 부근에 자리한 천연 호수인 소천지로 향했다. 널리 알려진 전설인 <선녀와 나뭇꾼>에 등장하는 바로 그 호수라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이 호수를 <銀環湖>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나무 현판이 붙어 있고 이 호수 주위에 자라는 사스래나무를 잘라 호수 주위에 울타리처럼 빙 둘러 놓았다. 사스래나무의 껍질이 반들반들하게 은빛이 나는데 그렇다고 은환이라고 한 것일까?

그리 넓지 않은 호수를 한 바퀴 돌며 여러 식물들을 관찰했다. 노랑만병초, 담자리꽃나무, 담자리참꽃, 개감채, 두메자운, 좀설앵초, 나도범의귀, 두루미꽃, 각시투구꽃, 깃대아재비, 장백제비꽃, 민둥인가목, 함북종덩굴, 산미나리아재비, 양지꽃, 두메냉이, 발톱꿩의다리, 구실바위취, 다람쥐꼬리.

▲ 노랑만병초. ⓒ이굴기

▲ 개감채. ⓒ이굴기

▲ 좀설앵초. ⓒ이굴기

▲ 함북종덩굴. ⓒ이굴기

소천지를 빠져나와 점심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藍景快餐. 확장공사가 진행 중인 듯 얼기설기한 지지대가 있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널찍한 주차장에 봉고차가 서 있고 건물 벽에 겨울 천지를 배경으로 큰 글씨가 붙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런대로 근사하고 운치 있는 문장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것일까. 헐레벌떡 식당으로 뛰어가고픈 발길을 잠시 멈추고 논어(論語)의 한 구절을 눈으로 박았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 곳의 친구가 찾아오니 이 아니 기쁠쏘냐.

식당은 넓었다. 뷔페식 식당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렇다할 음식이 없었고 그렇다 보니 이렇다할 맛도 없었다. 몇 젓가락 건드리다가 식사를 접었다. 오후 일정에 대비하며 화장실로 갔더니 눈에 번쩍 띄는 것은 의외로 그곳에 있었다. 소변기 위에 바짝 붙은 이백(李白)의 시 한 수였다. 천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登太白峰>이 적혀 있었다. 태백산에 오르다. 태백산은 섬서성 무공현에 있는 산이다. 따라서 분명 백두산은 아닐진대 중국은 위대한 시인의 위력을 빌어 백두산이 저들의 산이라고 찜이라도 해놓자는 뜻일까?

西上太白峰(서상태백봉) 서쪽 태백산에 오르니
夕陽窮登攀(석양궁등반) 석양 무렵에서야 정상에 닿았네
太白與我語(태백여아어) 태백이 나에게 하는 말
爲我開天關(위아개천관) 그대를 위해 하늘의 관문 열었다네
願乘冷風去(원승냉풍거) 원컨대 찬 바람 타고 날아
直出浮雲間(직출부운간) 뜬구름 사이로 바로 나아갔으면!
擧手可近月(거수가근월) 손을 드니 달이 닿을 듯하고
前行若無山(전행약무산) 앞으로 나아가도 더 높은 산은 없네
一別武功去(일별무공거) 이제 무공과 작별하고 떠나가면
何時復更還(하시부갱환) 언제 다시 돌아오리

▲ 식당에서 만난 논어 한 구절. ⓒ이굴기

▲ 화장실에서 만난 이백의 시. ⓒ이굴기

오후엔 지하삼림을 둘러보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꽃들을 많이 만났다. 풍선난초, 다람쥐꼬리, 애기괭이밥, 겨릅나무, 바늘까치밥나무, 배암나무, 가문비나무, 동의나물, 쌍잎난초, 뫼제비꽃, 나도범의귀, 숲개별꽃, 애기무엽란, 가문비나무, 분비나무, 좀비나무, 버드나무, 산겨릅나무, 댕댕이나무.

▲ 풍선난초. ⓒ이굴기

▲ 바늘까치밥나무. ⓒ이굴기

▲ 애기무엽란. ⓒ이굴기

그렇게 눈으로 포식을 하고 하루를 접을 때 백두산의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셔틀버스가 왔다. 버스는 이곳의 관광청이 새롭게 도입했는지 깨끗한 버스였다. 그 버스의 옆구리에는 이런 글씨가 큼지막하게 씌어 있었다. 天下有大美吉林長白山(천하유대미길림장백산).

무슨 뜻인가 짐작이 갔다. 이는 나도 아는 장자(莊子)의 한 구절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天地有大美而不言 四時有明法而不議 萬物有成理而不說 (천지유대미이불언 사시유명법이불의만물유성리이불설). 하늘과 땅은 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말하지 아니 하고, 사계절은 분명한 법을 지니고 있지만 따지지 아니하며, 온갖 것은 정해진 이치를 지니고 있지만 너스레를 늘어놓지 않는다.

백두산 정상에는 중국에서 운영하는 기상관측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있다. 어쩐지 내 소중한 곳의 안마당을 그들에게 빼앗긴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불편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 형편들이 별 마음에 안 든다 해도 천하의 아름다움을 조각해낸 한자(漢字)와 그 글자로 새긴 인간 세상의 마음까지야 어디 내칠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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