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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면목을 찾은 김구 "삼천리 동포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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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면목을 찾은 김구 "삼천리 동포에게 고함"

[해방일기] 1948년 2월 11일

1948년 2월 11일

김구의 글 중 가장 널리 회자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 2월 10일에 발표되었다. 아래 옮겨놓는 것은 <서울신문>에 3회에 걸쳐 실린 내용인데 전문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자유신문> 등 대다수 신문은 발췌한 요지만을 2월 11일자에 실었다.

<동아일보>는 이 글을 보도하지 않았다. 내용 중 "xxxx는 xxx란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고 한 것이 <동아일보>가 김희경이란 이름의 "김구 선생님에게 올리는 글월"을 2월 1일부터 5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비판이 담겼다 해서 이런 중요한 성명을 묵살하는 데서 '동아일보 저널리즘'의 수준을 알아볼 수 있다.

친애하는 삼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2차 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천만의 생령을 희생하여서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3차 전쟁은 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그 아들을 또 다시 전장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운명이 찾아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냐?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하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外力)에 아부하는 자만은 혹왈 남침 혹왈 북벌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숙망(宿望)하고 있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실현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적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 될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새 상전의 투지를 북돋을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여움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子姪)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 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恩典)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 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 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환소(歡笑) 중에 경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되 우리 한인은 공포 중에서 죄인과 같이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배은망덕하는 자라고 질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 신문 기자 리처드의 입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되었다.

유엔은 이러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기를 방지하여서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 없는 내정 간섭 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서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남북 통일의 완전 자주 독립의 정부를 수립할 것과 미소 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의 보이콧으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 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다.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加强)하여서 세계 평화 수립을 순리(順利)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들의 혁혁한 업적을 한국 독립 운동 사상에 남김으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 민족 간에 있어서 영원한 은의(恩誼)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을 삼척동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몰각한 도배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 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造出)하여서 단선 군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 위원단을 미혹케 하기에 전심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난경(難境) 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매족의 일진회 식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병합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합병을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도(賭)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동경까지 가서 합병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영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 위원단이 금일의 군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서 한국의 원정(寃情)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다. 유엔 위원단 제공은 한인과 영원히 불해(不解)의 원(怨)을 맺을 것이요,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나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 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여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 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와 같은 원칙은 우리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순식만변(瞬息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혹은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국 장 주석의 이른 바 '불변으로 응 만변'이라는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 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바와 같이 우리는 통일 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 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 정부를 중앙 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 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 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 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삼천만 자매 형제여!

우리가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오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 민족의 공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미군정의 앞잡이로 인정을 받은 한민당의 영도 하에 있는 소위 임협은 나의 의견에 대하여 대구소괴(大口小怪)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서 원칙도 없고 조리도 없이 후욕(詬辱)만 가하였다.

한민당의 후설이 되어 있는 xxxx는 xxx란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 일찍이 조소앙 엄항섭 양씨가 수도청에 구인되었다고 허언을 조출하던 그 신문은 이번에 또 '애국 단체가 제출한 건의를 김구 씨 동의 표명'이라는 제목으로써 허언을 조출하였다. 이와 같은 비열한 행위는 도리어 애국 동포들의 분노를 야기하여 각 방면에서 시비의 성한(聲恨)이 높았다. 이리하여 내가 바라던 단결은 실현도 되기 전에 혼란만 더 커졌을 뿐이다. 시비가 없는 사회에는 개량이 없고 진보가 없는 법이니 여론이 환기됨을 방지할 바이 아니나 천재일우의 호기를 만나서 원방에서 내감(來監)한 귀빈을 맞아가지고 우리 국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이 순간에 있어서 이것이 우리의 취할 바 행동은 아니다.

일절 내부 투쟁은 정지하자! 소불인(小不忍)이면 난대모(難大謀)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보자.

삼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을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 번 잊어버려 보자.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의심하지 말며 타매(唾罵)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罷工)은 외군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할 것뿐이다. 계속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유 3인 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내며 영예를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군 군정 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주지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전 민족의 단결을 위하여서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 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 언도를 당해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본 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지금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한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하라. (<서울신문> 1948년 2월 11일~13일)

이 글의 제목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흔히 인용되어 온 것은 맨 끝의 두 문단뿐이다. 이것만을 보고 이 글을 우리 역사상 명문의 하나로 많이 인식하는데(나 자신도 그랬다.), 전문을 읽어보면 그렇게 품격 높은 글이 아니다. 영웅의 비장한 모습보다 분노에 찬 투사의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나는 글이다.

'해방 일기' 작업 동안 내 마음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의 하나가 '김구 선생'의 모습이다. 서술에 일체의 경칭을 쓰지 않기로 원칙을 세우고 내 아버지에게까지 그 원칙을 적용시키면서도 김구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름 뒤에 '선생'을 붙이지 않는 것이 마음속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1946년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1947년 들어 반탁 운동을 재개할 무렵부터 그 불편함이 사라졌다. 경칭 안 쓰는 원칙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속의 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이 그 동안 '상대화'의 과정을 겪었다는 데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의 인간적 한계를 바탕에 깔고 그의 고뇌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후세의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김구의 모습은 1948년 1월 하순 이후 분단 건국에 반대한 모습이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전까지 그가 이승만의 분단 건국 노선을 전폭 지지하고 있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앞서 귀국 이래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온 반탁 운동이 미소공위를 좌초시킴으로써 분단 건국 노선을 도와준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구의 반탁 운동이 임정의 법통(法統)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내가 참고한 모든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귀국 당시 그의 나이가 칠순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 집착을 '노욕(老慾)'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임정이 건국의 주체가 됨으로써 자신이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 바랐다는 것이다.

이 관점을 나는 원천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극단적 방법을 서슴없이 쓰는 그의 독단적 성향은 임정을 운영하는 방법에서도 널리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송진우와 장덕수의 암살에 책임이 있다는 혐의도 쉽게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비밀을 좋아하는 그런 독단적 성향이라면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살았다는 의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1948년 1월 이후 분단 건국에 반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진면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귀국 이래 그의 행보가 그 스스로 원치 않는 결과를 향해 움직여 온 것은 상황 인식의 결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상황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이다. 미-소 대결이 심화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좌우 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는데, 그가 좌익 일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좌우 합작 자체를 외면한 것은 좌우 합작 없이도 민족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민족주의 자체를 개인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김구가 보여주는 태도가 과연 그의 진면목이었는지 상황 진행을 보며 확인할 것이다. 그에게는 계속 온갖 유혹과 위협이 제기된다. 그런 유혹과 위협 속에서 그가 지킨 자세를 통해 민족주의자로서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확인 과정에서 우리가 그로부터 얻는 가르침의 내용도 조정될 것이다. 아무리 투철한 민족주의자라도 독단에 빠질 경우 민족 사회에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점. 민족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민족주의가 하나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는 사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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