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근혜 당선인은 우리 사회의 4대악(惡)을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 파괴범, 불량 식품'으로 지적하고, 이어서 "우리 사회의 법질서가 흔들리고 무너져 가정이 불안하고 아이들도 위험에 노출돼 있어 사회 불안이 커지고 있다"며 법질서를 바로 세울 것임을 천명했다. 그렇다면, 법의 지배는 사회 불안을 제거하고 4대악을 척결한 후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상태인가?
'법의 지배'라는 표현은 19세기 후반 옥스퍼드 대학 영국법 교수였던 앨버트 다이시 교수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대륙법계에서는 '법치주의'라는 말이 쓰이는데 근대 시민국가의 정치 원리로서 넓은 의미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법의 지배는 그것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지는 것이어서 오묘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떼법(불법 시위)을 근절해야 한다'는 주장과 '대통령의 무분별한 사면권 행사는 법치주의에 반한다'는 말은 모두 법의 지배를 토대로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보통 행정·수사 기관장이, 후자는 평범한 시민이 발화의 주체라는 점에서 그 용례가 다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법의 지배'는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 <법의 지배>(톰 빙험 지음, 김기창 옮김, 이음 펴냄). ⓒ이음 |
이어서 저자는 퇴직한 최고재판소 수석대법관답게 무수한 판례와 사례를 인용하며 법의 지배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한다. 책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2부의 각 장은 법의 지배의 주요한 원칙이 앞서 설시되고, 저자가 선별한 판례 등을 근거로 법의 지배가 어떻게 법원을 통해 관철되는지 논증된다. : '권리나 책임은 법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며 재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장관과 모든 직급의 공무원은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을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공평하게, 그 권한이 부여된 목적을 위하여, 그 권한의 범위 내에서 합리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법은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적절한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등.
법의 지배에서 하나의 조건 : 공정한 재판
저자는 '국가의 사법 절차는 공평해야 한다'는 법의 지배 원리를 기술한다(제9장). 다만, 독자가 보기에 "법의 지배는 공정한(공평한) 재판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명제는 옳은 만큼 공허하고 별 감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공정한 재판의 요소로 제시되는 피고인의 무기의 평등, 공판중심주의의 강조, 법관의 독립 등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교과서적 원칙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법의 지배가 교과서 밖의 현실에서 갖고 있는 어떤 긴장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법관의 독립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를테면 미국 연방대법관이 베트남 전쟁이나 운송 노동자 파업을 어떻게 막을지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구체적인 자문을 하기도 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한편, 이 책 여러 곳에서 저자가 사법부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며 '영국에서는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가 사라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명토 박는다. 부러운 대목이다. 특정한 형사사건(촛불 시위)에 대해 '보편적인 결론'을 법원장이 직접 주문했던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공정한 재판에 있어서 법관의 독립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우리 헌법 제103조 역시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사법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는 당위는 사실 헌법의 문언에서 달성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법의 지배와 현실 사이의 긴장이 놓여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 긴장은 법률과 어떤 절차의 안에서 아니라 오히려 그 바깥에서, 그것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입법부, 집행부)과 그 해석자들(사법부-법관을 포함한 법률가들)의 영역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의 지배와 민주주주의의 충돌
<법의 지배>는 많은 부분 (우리나라의) 헌법상 기본권과 형사소송법의 적법 절차 원리가 실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거나, 현실의 어떤 부분이 법의 지배와 충돌할 때 법관들은 어떻게 조화로운 해석을 통해 결론을 내는지 등을 기술하는데 할애한다. 저자의 '법률 강의'가 자못 단조롭게 서술되는 2부를 넘어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법의 지배와 현실 사이의 긴장이 논쟁적인 주제와 함께 서술된다. 현실에서 법의 지배가 어떻게 왜곡되는지에 대해서는, 대법관의 입장에서 법의 지배 아래 중심적 국가기관으로 서술되었던 사법부가 집행부(정부) 또는 입법부(의회)와 충돌하는 지점을 서술한 책의 3부를 통해 소개된다.
'테러 그리고 법의 지배'는 9·11 테러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나타난 여러 현상들을 분석한다(제11장). 테러 직후 미국은 '테러 행위를 차단하고 방해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미국을 통합하고 강하게 하기 위한 법률'이라는 우아한 법률을 제정한다(이른바 '애국법(USA Patriot Act)'의 실제 법률명). 영국 역시 비슷한 대 테러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이후 일련의 조치에 따라 영국과 미국 모두 법원의 통제에서 벗어나 집행부(정부)가 수많은 무고한 외국인들을 구금하고 고문할 수 있게 되었다. 검찰의 기소나 재판 없이 테러 용의자들을 무기한 구금하는 조치가 행해지는 국가에서 법의 지배가 관철된다고 할 수 있을까?
'법의 지배와 의회지상주의'는 영국 통치 구조의 핵심으로서 의회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다루고 있다(제12장). 미국 연방대법원이 사법 적극주의의 입장 아래 일정하게 정부의 정책에 대한 최종 판단자 역할을 하고 있는 반면, 역사적으로 영국은 의회지상주의 원칙을 통해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대하여 법원이 그 효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이는 제정법에 의한 권력 분립의 결과가 아니라, 영국 보통법과 역사적 관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의회지상주의가 어떤 흠결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법원에 불복할 권리를 박탈하는 내용의 입법이 행해진다면, 다시 말해 의회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며 법의 지배에 반하는 입법을 하는 경우 이에 대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에서의 법의 지배
저자가 지적하는 법의 지배의 왜곡 내지 민주주의와의 충돌은 사실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조금 한가하게 들리기도 한다. 법원장이 법관에게 직접 판결의 결론을 주문하는 초대형 스캔들이 발생하고도 어떤 이도 책임지지 않았던 현실을 환기해보자. 정부의 검찰권 남용은 이명박 정부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 있다. 한국에서 국민들이 법의 지배에 대해 갖는 냉소주의는 그래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2008년 법의 날에 앞서 법무부가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법은 항상 진실의 편이다"라는 설문에 그렇다고 한 비율은 10퍼센트에 불과했고, 그렇지 않다고 답한 시민의 비율은 그 여섯 배인 68퍼센트나 차지했다)
국가가 법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는 법의 지배 원리는, 국민의 대표인 의회에 의하여 제정된 법률에 따르지 않고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어떠한 명령이나 금지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법의 제정이 의회에 의하여 행해지고, 사법은 독립된 법원에 의하여 행하여지며 행정은 법률에 의하여 행해질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는 국가권력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집행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사법부는 입법부와 더불어 집행부 권력에 종속 내지 의존하는 관계로 유지되었다.(최장집 논문 '한국 민주주의와 사법부의 좌표') 법관들에게 판결을 주문했던 법원장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했을까? 여야 간 법안 심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무리하게 직권상정을 했던 국회의장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헌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래, 박정희 유신 체제와 전두환의 5공 체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한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해 왔지만, 국민의 기본권 조항과 함께 국가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규정한 헌법의 중심 내용들은 침묵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하여
법문과 현실의 괴리는 권위주의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특정한 형태로 변형되어 증폭되고 있다. 법의 지배는 이제 우리 사회의 도덕주의의 요구와 결합하여 정치 과정을 왜곡시키는 현실과 맞닿아있다. 민주주의의 운용에 있어 시민의 대표인 정당이 그 중심 기구가 되어야하고, 정당은 각 사회 부문의 이익을 대표하고 조직하며 경쟁함으로써 시민의 삶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당이 저발전된 한국에서 정당 간 경쟁의 형태는 시민 일상의 문제에 천착하기보다, 내용적으로 공허하고 그 목적이 불분명한 도덕주의적 경쟁을 필사적으로 펼치는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폭로하고 검찰은 범죄 사실을 기소하며 법관이 이를 판결하는, 폭로-조사-기소의 'RIP 과정'(Revelation, Investigation and Prosecution)이 정치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최장집, 같은 논문) 언젠가부터 일정한 패턴을 두고 반복하고 있는 검찰의 정치인들의 수사·기소와 권력 핵심을 겨냥한 특별 검사의 등장, 그리고 정치적 사안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소환 등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된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박근혜 정부의 두 번째 총리 후보자가 지명되었다. 공교롭게도 앞선 후보자에 이어 이번에도 법률가가 후보자로 내정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와 동시에 등장하는 '법률가 정치'는 한국 민주주의의 어떤 상태를 반영하고 있을까? 과거 법률가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정치의 안과 밖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검찰은 그 자체로 정치적 행위인 무리한 기소를 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사과나 반성을 한 사실이 없다. 과거 권위주의 시기 무수한 반인권적 판결을 내렸던 판사들 일부는 아직 고위 법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한편 법률가들은 스스로 동원되거나 어떤 수단이 되면서까지 지속적으로 정치적 지분을 획득해 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발전하는데 법률가들이 어떤 기여했다는 증거는 없는 것 같다.
법률가들에게 강력한 법·질서의 확립이라는 구호를 단순하게 반복하기보다 각자가 선 자리에서 시민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정치사회적 권리의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는 법의 지배만큼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정치의 회복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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