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뉴욕 셀러브리티, 사생활 대 공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뉴욕 셀러브리티, 사생활 대 공개?!

[프레시안 books] 마테오 페리콜리의 <창밖 뉴욕>

1.

회의 시간. 산더미처럼 쌓인 책 중에 <창밖 뉴욕>(마테오 페리콜리 지음, 이용재 옮김, 마음산책 펴냄)을 발견한 한 기획위원 선생님은 책을 주욱 훑어보더니 "이런 책은 누가 살까? 서점 기둥에 기대 30분이면 읽을 수 있잖아"라고 말했다. '글쎄요, 그럴까요'라고 생각한 나는 결국 그 속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딱 일주일 후에 이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증정용 도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라졌다고 모든 책을 재구입하지는 않는데, 이런 책이라면 책꽂이에 끼워 두고 틈나는 대로 꺼내 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다.

'이런 책'은 그 선생님 말대로 서점 기둥에 기대 텍스트나 이미지를 30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런 책'은 하지만 그 텍스트와 이미지를 한 번에 다 읽어낼 필요는 없는 책이며, 내 손이 닿는 곳에 두지 않으면 아쉬운 책이다. 저자인 마테오 페리콜리가 7년 동안 살던 맨해튼 어퍼 웨스트사이드의 아파트에서 떠날 때 "26일, 즉 얼추 640시간 동안" 내려다봤다는 창밖 풍경이 아쉬워 둘둘 말아 새 집에 걸어놓고 싶어졌다는 기분 그대로다. 그가 이런저런 각도에서 경치 사진을 찍은 뒤 끝내 창틀까지 포함된 모습을 그렸을 때 아쉬운 기분을 해소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책을 서재에 꽂고 나서야 어쩐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마테오 페리콜리의 옛 아파트 창. ⓒ마음산책


2.

▲ <창밖 뉴욕>(마테오 페리콜리 지음, 이용재 옮김,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건축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는 떠날 아파트의 창밖 풍경을 꼼꼼히 그리면서 "모든 도시의 창문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착안했고, 그길로 백 군데가 넘는 아파트, 사무실, 스튜디오의 창을 내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이런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삶의 개인적인 부분은 나누고 싶지 않다"며 사진 촬영을 정중하게 거절했다는데, 저자에게는 응낙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거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작은 언급이 <창밖 뉴욕>을 재미있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아마 '당신의 자택(사무실, 스튜디오)에 들어가 창틀을 포함한 창 바깥의 풍경을 찍고 싶습니다'라는 이메일을 보냈을 것이다. 낯선 사람을 생활이나 작업 공간에 들인다는 것은 사생활을 일부를 공개하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창밖 풍경 자체는 그것을 잠시 누리고 있는 이의 사적인 정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적인' 것 아닌가? 서문을 쓴 건축 비평가 폴 골드버거가 "도시 풍경만큼 우리의 손아귀 바깥에 있는 게 또 있을까?"라고 물은 것처럼 거주자가 건드릴 수 없는 '저들의 세계'인 것이 창 바깥의 존재 양식 아닌가?

그러나 폴 골드버거도 마테오 페리콜리도, '창밖 풍경은 당신의 일부'라고 말한다. 우리가 선택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바꿀 수 있는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연히 조성된 단 하나의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얘기다. 랜덤으로 배정됐을지언정 그 스크린이 나와 바깥을 이어주는 이상, 거기에 배치된 '공공' 시설과 '남의' 자동차 따위가 삶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 되어버린다는 역설이다.

사실 저자의 그림 옆에 각각이 텍스트를 덧붙이는 형식 상, 이 프로젝트는 시작과 함께 사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기는 하다. 책 첫 장에 쓰인 대로 "창밖 풍경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창 너머 세상만큼이나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작곡가인 데릭 버멜은 창 너머로 무엇이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들리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새벽에는 흉내지빠귀 소리가 (…) 저녁에는 경찰차 사이렌이 들린다. 그러고는 정적이 찾아온다." 이런 대답을 들려준 순간, 그 창밖은 이 거주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유일한 풍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데릭 버멜의 창. ⓒ마음산책


3.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이 생각난다. 다리를 다쳐 집밖에 나갈 수 없는 사진기자 제프리가 창을 스크린 삼아 바깥 건물 속 타인의 인생을 구경하고, 그러다 어떤 집의 남편이 부인을 살해했다는 의혹을 품게 된다. 본 지 오래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러닝타임 내내 카메라는 주인공의 방 바깥을 벗어나지 않는다. 건너편 집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제프리가 가진 망원 렌즈의 화각으로 표현된다.

아무리 살인 사건을 좇는 눈이라지만 '보는 것' 그 자체는 안전하다. 그러나 제프리는 그를 둘러싼 이중의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그 역시 건너 편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그것은 '보고 있음'을 상대방이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또 하나는 그 역시 관객 눈에 비쳐지는 하나의 피사체라는 사실이다. 사건의 용의자는 관찰 당한다는 사실을 간파해 제프리를 위협하게 되고, 이야기 너머의 관객들은 제프리가 무엇을 보는지 알고 있기에 시종일관 권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관객조차 영화관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니 안락한 소파에 몸을 누이는 순간까지 또 다른 시선의 습격을 당하게 된다.

<이창>에서 서스펜스가 되는 것은 살인 사건이 아니라 도시 생활이다. 사적이라 명명된 순간에도 완벽하게 닫혀 있을 수 없는 본질을 공포로 풀어냈다. 도시는 도시에서 살고자 욕망하는 수많은 사람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교환하는 공간이다. 그 교환은 우연적이며 때때로 힘 관계에 의해 여실히 불평등해지지만, 도시 생활자 모두가 시선 사슬 안에 기꺼이 공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평평하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현기증>이 샌프란시스코의 정경을 십분 드러낸 것과 달리 카메라가 폐쇄된 공간 안에서만 움직이고, 그래서 오히려 이 도시의 인상을 명확하게 만들었다. 시선 사슬이 이 도시만의 특징이겠냐만은, 좁고 갇혀 있고 부대끼기로는 역시 뉴욕이 제일이라는 의도 아니었을까. 그러나 <창밖 뉴욕>에서 몇몇 이들은 더 이상 그 괴물적 속성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런 걸 봐 왔어.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나를 봐 왔겠지'라는 여유로운 태도로 괴물을 받아들인다. 루이스 멈퍼드의 표현처럼 도시는 "사회생활이라는 무대에서 관중과 배우가 서로의 역할을 번갈아가며 연기하는 드라마"이고, 이제는 두 역할 모두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기 때문일까. 안무가 마크 모리스의 심드렁한 코멘트처럼.

"내 방 창밖 풍경은 이렇다. 길 건너로 놀라우리만치 규칙적인 아파트가 보인다. 비었다가도 다시 사람들이 입주해 옷을 갈아입고 텔레비전을 보고 다양한 체위로 섹스를 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는 관광객들이 플래시를 터뜨려가며 우리 아파트와 나를 찍어댄다. 사진이 잘 나오는지 궁금하다."

▲ 마크 모리스의 창. ⓒ마음산책


4.

얼마 전 트위터에서 본 사진. 누군가 '사무실 뒤 창밖에는 조선 시대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고딕도 있다'는 유의 코멘트로 올린 중구 어디쯤으로 추정되는 곳의 풍경이었다. 말 그대로 온갖 시공간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었고, 그것이 서울다워서 좋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뉴욕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가까이 있는 낮은 건물은 12,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높고 뚱뚱한 건물들은 전후의 호황을 반영하며"(E. L. 닥터로) "1760년대 네덜란드 식 교회부터 가장 현대적인 건물까지"(닉 기스) 혼재하면서 "뉴욕의 역사와 미래를 보여준다."(로렌 잘라즈닉) "이 얼마나 감격적인 기억의 극장인지!" (다니엘 리베스킨트)

그런 점에서 유사하다 할 수 하겠으나, 내가 기억하는 서울의 창밖 풍경은 책에 실린 그것들과는 달랐다. 창이 너무 작았다. 고시원에서는 살아본 적 없지만 그것과 유사하다는 모텔의 창은 창이라고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살던 하숙방에는 외부로 열린 공간이라곤 부엌으로 향하는 문밖에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하나, 컴퓨터 모니터 화면 위로는 '윈도우'를 얼마든지 열 수 있었다.

폴 골드거버는 "만일 경치가 창틀이 하나밖에 없는 큰 창에만 담긴다면, 건물과 경치 사이의 흥미진진한 실랑이를 맛볼 기회도 잃는다"고 말한다. 칼럼 매캔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경치가 우리 창에 담기는 건 아니다. 창 너머 광경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니얼 메나커는 각 창을 각각의 주관적인 의식의 울타리라 묘사했다. 모두 세상은 한눈에 파악할 수 없기에 구획이 나뉘어져야 하고, 거기서 이야기가 발생한다는 얘기다. 창이 정해준 풍경이 그러하듯 우리는 어디에선가 맺고 끊음으로써 세계를 파악하고 이야기한다.

하나의 은유에서 끝날지라도, 우리 대부분이 아주 작은 창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애처롭다. 이 책에도 참여한 토킹헤즈의 데이비드 번은 <예술가가 여행하는 법>(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에서 마닐라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다양한 도시를 자전거로 여행한 뒤 자신이 본거지인 뉴욕에 서서 '도시의 하부구조는 시민의 생활과 일, 감수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 내린다. 나 역시 동감이다. 자본의 고차방정식으로 양산된 '쪽창'들이, 그것밖에 구입할 수 없는 많은 젊은이들의 세계마저 그토록 좁게 구획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 "경치가 품고 있는 음울함을 좋아한다. 정신 병동에서 복도 너머의 다른 병동을 보는 기분이다." 리처드 플러드의 창. ⓒ마음산책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