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되었던 우리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을 오른다는 게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더구나 입장료도 만만찮고, 트래킹을 할 때 비용이 거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더욱 그랬다. 중국 땅이라 그런지 중국 사람들이 많았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단체로 오는 청년들도 많았다. 따발총처럼 쏟아붓는 중국말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백두산 가는 길 입구. ⓒ이굴기 |
날씨는 아주 화창하게 맑았다.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보니 천지처럼 파랬다. 그 연못 안으로 각종 활엽수가 쭉쭉 뻗으면서 잠겨 들어갔다. 그리고 낮달이 떠 있었다. 희미한 초승달이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줄을 서 있는데 한참 후 우리 차례가 왔다. 찦차를 타고 백두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구절양장의 길이었다. 멀리 장백폭포가 선명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좌우로 야생화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노랑만병초가 지천에 깔려있지만 이젠 철이 지난 뒤였다. 어느 한 굽이를 돌아들 때였다. 그 말짱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가 싶더니 눈이 펄, 펄, 펄 내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백두산은 그냥 백두산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백두산 정상 부근의 광장에 도착했다. 지프차에서 내리니 눈발은 어느 새 사나운 우박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비옷을 챙겨입고 천문봉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변한 날씨에 손이 시렸다. 이 오뉴월 땡볕에 눈이라니! 우박이라니! 도무지 헤아릴 길 없는 백두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서 몇 발짝 옮길 때였다. 우르르쾅, 벼락이 때렸다. 시퍼런 전기불이 백두산 천문봉에 내려와 내 귀 옆으로 찌릿하게 흘러갔다. 우뚝하게 솟은 피뢰침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이라도 날 태세였다.
▲ 천지 오르는 길. ⓒ이굴기 |
동작이 빨라 먼저 천문봉 정상에 올랐던 일행 몇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내려오고 있었다. 중국의 관리들도 사이렌을 울리며 뭐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다행이 벼락은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조금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벼락이 무섭더라도 이곳까지 와서 천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조심스레 정상으로 올라갔다.
시끄러운 중국말이 사라지고 조금 정화된 백두산 정상에 드디어 섰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다. 내 두 눈으로, 백두산 천지를! 천지는 아직 얼음이 가득했다. 나는 백두산의 키에 내 키를 더한 높이로 서서 오래 오래 천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력이 다하는 아득한 곳으로 마음이 쫓아갔다. 저 너머로 개마고원이 있고, 그 너머로 대동강이 흐르고, 또 그 너머로 장산곶이 있고, 아주 너머 너머로는 서울의 북한산이 우뚝하겠네.
▲ 백두산 천지. ⓒ이굴기 |
귀가 시리고 눈이 침침하고 손이 곱은 가운데 얼음으로 덮힌 천지, 눈이 희끗희끗한 백두산의 경사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문득 발아래를 보았다. 백두산의 흙은 시뻘건 황토였다. 이끼나 고사리 하나 자라지 않고 있었다. 드문드문 큰 화강암의 돌들이 있었다. 큰 비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시멘트로 고정해 두고 있었다. 백두산의 현실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백두산 꽃산행에 신청하고 서울에서 준비를 하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았었다. 천지를 보되 그냥 무턱대고 올라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궁리 끝에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를 한번 읽어보기로 했었다. 하지만 한자어투성이의 그 글은 내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솔직히 잘 읽히지도 않았다. "캄캄한 속에서 빛이 나온다." 구절만 인상적이었는데 불가해한 날씨 속에 끼어있자니 그 말은 퍽 실감이 나는 듯했다.
천문봉을 내려왔다. 오를 때는 미처 보지를 못했는데 천지 이정표와 백두산의 조감도가 서 있었다. 그곳에서 천문봉을 바라보았다. 뻘건 황토흙에 곧 굴러떨어질 것 같은 돌들, 피뢰침, 그리고 급경사의 백두산 꼭대기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여간 그 어디로 걸어가는 사람들. 어떻든 그 어디로 굴러가는 사람들.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차례차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담은 천지가 하늘을 배경으로 그곳에 있었다. 그 매끄러운 광경을 보는데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었다. 제목은 '얼음 나라'.
지상의 모든 이는 태양의 나라로부터 유배당한 자들 / 추위에 웅크리다 날개를 잃어버렸다 / 이 차디찬 대지는 하늘이 딱딱하게 언 얼음 / 나무가 고드름처럼 돋아난다 / 양털구름도 이곳에선 인정 없는 비바람의 아버지 / 빛의 사신이 아침 점호 취하고 나면 눈 비비며 노역하러 집을 나선다 // 미끄럽다
문득 시계를 보니 10시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대략 어림해 보니 내가 백두산 천지에 머문 시간은 50분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눈, 비, 우박, 벼락, 얼음을 한꺼번에 경험한 셈이었다. 과연 백두산은 백두산, 천지는 천지로구나! 새삼 감탄하면서 천문봉의 구름들과 이별하였다.
▲ 천지 아래에서 올려다 본 천문봉.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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