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백두산 천지에서 '얼음 나라'를 떠올리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백두산 천지에서 '얼음 나라'를 떠올리다

[꽃산행 꽃글] 백두산 가는 길 ⑤

이도백하를 떠나 백두산 아래에 도착했다. 드디어, 라는 말은 아직 쓸 때가 아니다. 백두산에 오르자면 아직도 통과해야 할 관문이 많기 때문이다. 버스에 내려 입구에 도착하니 백두산은 없었고 장백산만 있었다. 백두산을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큰 돌에 長白山이라고 새겨놓았는데 白자가 부리부리한 독수리의 눈알처럼 도드라졌다.

어찌되었던 우리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을 오른다는 게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더구나 입장료도 만만찮고, 트래킹을 할 때 비용이 거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더욱 그랬다. 중국 땅이라 그런지 중국 사람들이 많았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단체로 오는 청년들도 많았다. 따발총처럼 쏟아붓는 중국말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백두산 가는 길 입구. ⓒ이굴기

날씨는 아주 화창하게 맑았다.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을 보니 천지처럼 파랬다. 그 연못 안으로 각종 활엽수가 쭉쭉 뻗으면서 잠겨 들어갔다. 그리고 낮달이 떠 있었다. 희미한 초승달이었다.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줄을 서 있는데 한참 후 우리 차례가 왔다. 찦차를 타고 백두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구절양장의 길이었다. 멀리 장백폭포가 선명하게 눈으로 들어왔다.

좌우로 야생화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노랑만병초가 지천에 깔려있지만 이젠 철이 지난 뒤였다. 어느 한 굽이를 돌아들 때였다. 그 말짱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가 싶더니 눈이 펄, 펄, 펄 내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백두산은 그냥 백두산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백두산 정상 부근의 광장에 도착했다. 지프차에서 내리니 눈발은 어느 새 사나운 우박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비옷을 챙겨입고 천문봉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변한 날씨에 손이 시렸다. 이 오뉴월 땡볕에 눈이라니! 우박이라니! 도무지 헤아릴 길 없는 백두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서 몇 발짝 옮길 때였다. 우르르쾅, 벼락이 때렸다. 시퍼런 전기불이 백두산 천문봉에 내려와 내 귀 옆으로 찌릿하게 흘러갔다. 우뚝하게 솟은 피뢰침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이라도 날 태세였다.

▲ 천지 오르는 길. ⓒ이굴기

동작이 빨라 먼저 천문봉 정상에 올랐던 일행 몇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내려오고 있었다. 중국의 관리들도 사이렌을 울리며 뭐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다행이 벼락은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조금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벼락이 무섭더라도 이곳까지 와서 천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조심스레 정상으로 올라갔다.

시끄러운 중국말이 사라지고 조금 정화된 백두산 정상에 드디어 섰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다. 내 두 눈으로, 백두산 천지를! 천지는 아직 얼음이 가득했다. 나는 백두산의 키에 내 키를 더한 높이로 서서 오래 오래 천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력이 다하는 아득한 곳으로 마음이 쫓아갔다. 저 너머로 개마고원이 있고, 그 너머로 대동강이 흐르고, 또 그 너머로 장산곶이 있고, 아주 너머 너머로는 서울의 북한산이 우뚝하겠네.

▲ 백두산 천지. ⓒ이굴기

귀가 시리고 눈이 침침하고 손이 곱은 가운데 얼음으로 덮힌 천지, 눈이 희끗희끗한 백두산의 경사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문득 발아래를 보았다. 백두산의 흙은 시뻘건 황토였다. 이끼나 고사리 하나 자라지 않고 있었다. 드문드문 큰 화강암의 돌들이 있었다. 큰 비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시멘트로 고정해 두고 있었다. 백두산의 현실은 척박함, 그 자체였다.

백두산 꽃산행에 신청하고 서울에서 준비를 하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았었다. 천지를 보되 그냥 무턱대고 올라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궁리 끝에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를 한번 읽어보기로 했었다. 하지만 한자어투성이의 그 글은 내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솔직히 잘 읽히지도 않았다. "캄캄한 속에서 빛이 나온다." 구절만 인상적이었는데 불가해한 날씨 속에 끼어있자니 그 말은 퍽 실감이 나는 듯했다.

천문봉을 내려왔다. 오를 때는 미처 보지를 못했는데 천지 이정표와 백두산의 조감도가 서 있었다. 그곳에서 천문봉을 바라보았다. 뻘건 황토흙에 곧 굴러떨어질 것 같은 돌들, 피뢰침, 그리고 급경사의 백두산 꼭대기에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여간 그 어디로 걸어가는 사람들. 어떻든 그 어디로 굴러가는 사람들.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차례차례 사람들. 그 사람들을 담은 천지가 하늘을 배경으로 그곳에 있었다. 그 매끄러운 광경을 보는데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었다. 제목은 '얼음 나라'.

지상의 모든 이는 태양의 나라로부터 유배당한 자들 / 추위에 웅크리다 날개를 잃어버렸다 / 이 차디찬 대지는 하늘이 딱딱하게 언 얼음 / 나무가 고드름처럼 돋아난다 / 양털구름도 이곳에선 인정 없는 비바람의 아버지 / 빛의 사신이 아침 점호 취하고 나면 눈 비비며 노역하러 집을 나선다 // 미끄럽다

문득 시계를 보니 10시 10분이 지나고 있었다. 대략 어림해 보니 내가 백두산 천지에 머문 시간은 50분 남짓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눈, 비, 우박, 벼락, 얼음을 한꺼번에 경험한 셈이었다. 과연 백두산은 백두산, 천지는 천지로구나! 새삼 감탄하면서 천문봉의 구름들과 이별하였다.

▲ 천지 아래에서 올려다 본 천문봉. ⓒ이굴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