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남북 협상의 길에서 벗어난 남로당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남북 협상의 길에서 벗어난 남로당

[해방일기] 1948년 2월 8일

1948년 2월 8일

1947년 3월 22일의 '24시간 총파업'에 이은 좌익 주도의 기습적 총파업이 근 1년 만에 다시 시도되었다. 1948년 2월 8일자 <경향신문> 3면 머리에 관련성을 가진 몇 개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남조선 통신 일시 두절-전화 전신 회선 절단, 파괴 등으로"

2월 7일 새벽을 기하여 서울 영등포 大田 大邱 群山 등지를 비롯한 남조선 각지의 체신관서에서는 기계 파괴 전화 전신 回線 절단 사건이 일제히 발생하여 남조선의 통신망을 일시 마비시킨 사건이 돌발하였다. 이 사건 발생과 동시 현장에는 월급 5할 인상 소비 조합 적립금 반환 쌀 특배 광목 특배 양군 철퇴 등을 열거하고 총파업을 지지한 다수의 삐라가 살포되어 있다 한다. 현재 이 사건의 전모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체신부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각지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 그런데 체신부의 복구 활동으로 7일 정오 현재 부산, 대구, 대전, 전주, 이리, 인천, 부평, 수색, 목포는 전화가 개통되었다 하며 이 사건에 대하여 체신부 총무국장 황갑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사건 발생에 앞서 전평노조로부터 체신부장에 대우 개선 등의 요구서가 전달되었다. 목하 체신부 내에는 파업은 발생되지 않은 듯하다. 체신부로서는 복구에 활동 중이므로 7일 오후 5시까지 복구될 것이다."

"송전선 수처(數處) 절단-소행범 도주, 배후 조사 중"

서울 남대문 옆에 있는 순화 변전소의 송전선이 수개처가 절단된 괴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변전소는 영등포 공장 지대와 전차에 송전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곳이라 하는데 7일 오전 4시에 근무원이 전차 송전선이 뻰치로 절단된 것을 발견하고 즉시 경전 본사와 경찰에 연락하는 한편 오전 7시부터 복구 작업을 시작하고 있으나 원체 여러 곳이 절단되어 있으므로 오후 2시가 되도록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못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범인은 도주하였으므로 그 의도와 배후 관계 등은 일체로 모르고 있다 하는데 수일 전 유엔 위원회 반대 삐라 사건도 있고 때가 때인 만치 이 사건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자못 주목되고 있다. 한편 서대문경찰서에서는 당일 숙직한 7명을 인치하여 엄중 취조를 하고 있다 한다.

"총파업 미연 방지-철도 관계"

철도국 일부 종업원들이 7일을 기하여 파업을 단행하려던 것이 미연에 방지되었다 한다. 즉 전평 계통의 일부 종업원들은 철도 관내의 각 기관구의 기관차를 파괴하고 남조선의 동맥을 정지시킬 음모를 계획하였으나 철도경찰에 발각되어 미연에 방지되었다는데 7일 오후 3시까지 판명된 소식에 의하면 서울 관내에서만 일부 불순분자들로 말미암아 1대의 기관차가 파괴되었고 그 외 부산 지방을 비롯하여 대전 지방과 안동 지방에서도 기관차 등이 파괴되었다 하는데 철도경찰에서는 계속하여 관계자들을 검거하고 있다 한다.

"삐라 등으로 수도청 긴장"

수도청에서는 7일 아침부터 일반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모종의 삐라 기타 문제를 둘러싸고 취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7일 아침부터 서울 순화동변전소에서 광화문 고압선 발전을 차단하여 수 명이 구금되는 동시에 중앙전화국 국원 4명이 모종의 삐라를 붙이다가 체포되어 취조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시 삼엄한 경계로 보아 순화동변전소와 중앙전화국 비라 문제가 같은 관련성이 있는듯하다고 한다.

2·7 총파업은 1년 전의 3·22 총파업과 거의 같은 목적이었다. 그러나 양상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비교를 위해 1947년 3월 23일자 <경향신문>의 관계 기사를 발췌해 놓는다.

"운수 출로 기관 등서 파업-서울을 위시 남조선 각지에 파급"

경무부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22일 오전 4시를 기하여 남조선 각지에서 운수 교통 기관의 총파업과 학생들의 맹휴 사건이 발생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경전 전차과 종업원들이 파업을 하여 전차 운행이 전면 두절되었고 일부 학생들의 시위 행렬이 있었는데 거리에 살포된 삐라에는 "노동자 지도자인 전평 간부 즉시 석방, 불법 해고 반대, 불법 공장 폐쇄 반대, 10월 봉기 이후 해고당한 직원의 복구 요구, 반공 테러단의 즉시 해체" 등 기타 요구조건과 학생 측에서는 "국대안 반대, 민주 학원 건설, 경찰의 학원 간섭 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각지의 정세는 다음과 같다.

"전평 산하 단체 24시간부 파업"

3·1 기념을 계기로 단행된 제주도 관공리 총파업 선풍이 아직도 종식되지 않은 22일 서울에서는 오전 6시부터 10시를 기하여 돌연 철도, 경전, 출판노조를 비롯한 전평 산하의 각 단체에서는 24시간부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3·22 총파업에 비해 2·7 총파업에서는 참여 범위가 좁고 투쟁 방법이 파괴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튿날 신문에까지 파업의 요구 내용은커녕 총파업 사실조차 완전히 확인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과 미군정이 파업의 전파를 가로막고 싶어 한 것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문사에서 파업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삐라 살포조차 원활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차 파업은 서울 시민들에 대한 파업 선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1년 전에는 경성전기(경전) 운수부 직원들이 파업에 대거 참여했다. 그런데 그 파업 후 전평 계통 직원 수백 명이 경전에서 쫓겨나고 경전 운수부는 대한노총의 아성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전차 운휴를 위해 파괴적 사보타지 방법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7 총파업은 민전과 남로당의 '구국 총력 투쟁'이었으며 남로당 선언문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분쇄하기 위해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유엔 한국 위원단을 국외로 추방하자"는 강경 노선을 천명했다고 한다(<이현상 평전>(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215쪽). 유엔 조선 위원회의 작업 진행에 대한 극좌파의 반응이었음은 그 시점으로 보아 설명이 없어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유엔 조선 위원단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볼 수 있는 것일까? 미국은 소련과 1대 1로 협상하는 미소공위를 포기하고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 조선 위원단 설치를 제안했다. 유엔 조선 위원단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조선 위원단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규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소련과의 협상보다는 유엔에서의 토의가 자기네 뜻을 관철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미국은 판단했다. 유엔 회원국 중에는 미국의 주장이 설령 정당하지 못하더라도 지지할 나라들이 없지 않았고, 조선 위원단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위원단 설치에 찬성한 나라들, 그리고 위원단에 참여한 나라들이 모두 미국의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 뜻에 따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주체적 결정을 내리는 나라들이 많이 있었다.

조선 위원단을 대하는 태도에서 극좌파와 중도파의 입장이 갈라졌다. 조선 위원단을 이용해서 남조선 단독 선거를 치르려는 극우파의 획책에 반대하는 데는 극좌파와 중도파의 입장이 같았다. 그런데 중도파는 조선 위원단을 설득해서 총선거 전에 남북 협상을 진행시키려 했다. 반면, 극좌파는 조선 위원단을 거부했다. 극좌파 노선은 "남은 남, 북은 북" 제 갈 길로 가게 해서 소련에 의지하는 '혁명 기지'를 이북에 확보하는 길이었다.

노동당 간부를 지낸 박병엽의 회고에 따르면 중도파와의 연합을 거부하는 극좌 노선은 북로당보다 남로당 측의 주장이었고 2·7 총파업도 남로당이 고집한 것이었다고 한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이 이북에 체류 중이었는데,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의 두 차례 남북 노동당 연석회의에서 이와 관련된 논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회의 분위기는 예전과 달리 싸늘했습니다. 연합 전선을 싼 노선 갈등이 불씨였지요. 박헌영과 이승엽은 '남로당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유엔 한국 위원회의 활동을 파탄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어요. 이들은 '남한에서의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은 현 단계에서는 필요 없다'고 잘라 말할 정도였습니다.

허가이 등은 당 중앙위원회 10차 전원회의 결정 사항을 들먹이며 연합 전선은 당의 공식노선이라고 퍼부어댔어요. 이들의 논리는 '남로당 지도부가 자체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남한 내의 중간파나 우익 계열 단선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 문제는 북로당이 떠맡는 식으로 결론 났습니다."

이런 가운데 남로당은 남한에서의 유엔 한국 위원회의 단독 선거를 막기 위해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이른바 '2·7 구국 투쟁'이었다. (…) 남로당은 2·7 구국 투쟁을 통해 단선을 막는 동시에 북로당에 세를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북로당은 '2·7 투쟁이 일정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남로당 민전의 투쟁만으로는 미국과 이승만의 단선 단정을 좌절시키기에 역부족'이라는 공식 평가를 했다는 게 서 씨의 증언이다.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 314~315쪽)

남로당 지도부 거의 전원이 이북이나 지하에 피신해 있는 상태에서 남로당 노선이 극단적 모험주의로 기울어 자원과 역량을 낭비하게 된 상황을 심지연은 이렇게 고찰했다.

공개 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지도부로서는 당원과의 접촉이 불가능해 당원이 처해 있는 상태를 파악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당원과 격리되어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당원과의 격리는 자연적으로 대중과의 대화 단절로 이어지며, 이전 정세 판단에 오류를 초래하게 된다. 현장과 떨어져 있고 당원 및 대중과 격리된 상태에서 전략과 전술을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판단을 유도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최종적으로는 당 지도부를 남한의 정치 현실로부터 소외시키게 된다. 정치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입각해서 전략-전술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둔해 있는 지도부로서는 자신의 존재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로 인해 남로당의 노선은 더욱더 급진성과 폭력성을 띠게 마련이었다.

지하 활동을 하는 이주하도 그렇지만, 북한에 있는 박헌영의 경우 급진성과 폭력성에 대한 의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추종하는 집단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고, 그럴수록 남한의 정치 지형을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게 하는 쪽으로 지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시위와 폭력 등 비합법적인 수단이 선택된 것인데, 박헌영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다른 방식보다도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의 활동 근거지를 떠난 상태였기에 박헌영은 남한의 정치 현실에 대해서는 간헐적이고 피상적인 정보에 의존하게 되며, 이로 인해 그는 부정확한 판단을 하기 쉽게 된다. 부정확한 판단을 토대로 박헌영은 남한의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급진적인 지시를 내리게 되고, 이러한 지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은 적지 않게 노출되고 파괴되는 결과를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의 투쟁활동은 보고의 과정에서 과장되어 박헌영이 부정확한 판단을 하는 데 일조를 하며, 이것이 다시 그로 하여금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지시를 내리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주하 연구>(백산서당 펴냄), 93~94쪽)

심지연의 고찰 위에 박병엽의 증언을 얹어서 본다면,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는 경쟁 심리 때문에도 독단적 모험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북로당 지도부에게는 이남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도움 없이 남로당의 힘만으로 단선 단정 분쇄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 측에게는 북로당보다 남로당이 더 선명한 투쟁 노선이라고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소련의 유엔 조선 위원단 무시와 거부는 유엔을 대하는 소련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조선 민족 입장에서는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꼭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로당은 소련의 입장을 북로당보다도 더 철저하게 따랐다.

남북 협상은 중간파의 지론이었는데 김구의 가세로 현실적 힘을 부쩍 키우게 되었다. 유엔 조선 위원단도 남북 협상의 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이제 이북 지도자들, 즉 북로당 지도부에 공이 넘어갈 참인데, 이남의 극좌파, 즉 남로당 지도부가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은 '협상'의 의미에 제한을 주고 있었다.

3일간으로 기획된 이 '총파업'을 하지 중장은 2월 10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폭동'으로 규정했다. <경향신문>에 2월 11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된 긴 성명서는 분노와 경멸로 가득했다. 한 미국 신문의 칼럼을 인용해 "공산주의자의 목소리는 구덩이에 빠진 도야지보다도 더 시끄럽다"는 말까지 했다.

좌익의 파업과 시위를 '폭동'이나 '반란'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미군정과 경찰의 상투수단이기는 하지만, 사보타지에 주력한 2·7 총파업은 그런 규정에 꽤 맞는 것이었다. 2월 11일 경무부가 발표한 피해 내용은 이러했다.

一. 경찰지서 및 출장소 파괴 33건

1. 경찰관 사망 6명 부상 및 납치 14명
2. 관공리 및 우익 간부 사망 5명 부상 및 납치 13명
3. 폭도 사망 28명 부상 10명 피검인원 1489명

一. 방화건수 3건

一. 교통 통신 피해

1. 전선 절단 68개소
2. 기관차 손상 39대
3. 궤도 파괴 3개소
4. 도로 파괴 2개소

一. 기타

1. 파업 15건
2. 맹휴 8건
3. 데모 81건
4. 봉화 67건
5. 기타 파괴 4건 (<경향신문> 1948년 2월 12일)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