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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도 '도가니'? 이 지옥은 왜 무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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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도 '도가니'? 이 지옥은 왜 무사한가!

[프레시안 books] 한종선·전규찬·박래군의 <살아남은 아이>

1987년, 나는 서울 은평구에 사는 초등학생이었다. 대학가나 시내 중심가로부터 외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 매일매일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는 데모의 행렬도 한 번인가밖에 보지 못했고, 부모님은 TV 뉴스에 데모대가 등장하면 "대학 가면 공부나 열심히 해라, 저런 데 끼지 말고"라고 타일렀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1987년이 어떤 해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민주화 항쟁, 박종철 치사 사건, 남영동 고문실, 이런 단어를 알게 된 건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다음이었다. 나는 분명 그 시대를 살았지만 그 시대를 알지 못했다. 내가 살았던 시대는 언제나 한참 전의 과거로서 추체험되는, 누군가가 제공하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문주 펴냄)를 읽었다. 1987년의 민주화항쟁과 같은 시기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거의 기억하는 이 없이, 공적인 기록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 채 잊힌 '괴물의 시간'을 알게 됐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사는 얼마나 많은가. 또 그 사건들이 일부러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끔, 우리 귀에 들리지 않게끔, 조직적이며 공적인 차원에서 제거된 사건이라면, 그 사건들은 우리 앞에 어떻게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알릴 수 있는 건가.

1984년, 한종선은 큰누나, 작은누나, 아버지와 함께 부산에서 살았다. "어머니 모습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구두를 닦으셨다." 가난한 노동자인 아버지는 술 취하면 종선을 때렸다. 어느 날 큰누나는 친척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종선과 작은누나를 데리고 나가 새 신발과 옷을 사주고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를 보여준 다음 근처 파출소로 향했다.

아버지는 우리보고 여기 좀 있으라고 했다. 조금만 있으면 아버지가 찾으러 올게, 하고 파출소를 나가셨다.

▲ <살아남은 아이>(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문주 펴냄). ⓒ문주
조금 뒤 파출소 앞에 낯선 차가 섰고, 거기서 우르르 내린 아저씨들은 한종선과 누나를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1984년 10월 16일, 두 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사회복지시설"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복지원의 신상기록카드에는 '의뢰처'가 '동광파(출소)'로, '연락인'은 아버지가 아니라 '통장'으로 적혀 있었다. 남매는 복지원 내 23소대와 24소대에 각각 입소했다. 한종선은 1984년 10월부터 1987년 1월까지 그곳에서 지옥의 나날을 보냈다.

새벽 4시 반 기상하여 저녁 8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원생들의 하루는 군대식 훈련과 강제 노역, 끊임없는 폭력으로 채워졌다. 기합의 이름은 참 다양하기도 했다. 이불말이(모다구리), 히로시마, 나룻배, 전깃줄, 한강철교, 고춧가루, 귀뚜라미…기합은 너무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맞을 때마다 머리가 깨지거나 장이 파열되거나 팔 다리가 부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자세를 바로잡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복지원 안에서 소문은 아주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몇 소대 누구는 어제 귀가되었대!"
"몇 소대 누구는 그저께 빳다를 잘못 맞아 다리를 못 쓰는 병신이 되었대!"
"누가 죽었대."
이런 소문들은 금세 복지원 전 소대에 퍼져 나갔다. 우리는 귀가한 사람이 진짜 안 보이면 "이야, 진짜 좋겠다!"라며 부러워했다. 빳다를 잘못 맞은 사람이 정말 한쪽 다리를 못 쓰고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일요일 교회 가는 날 산 주변을 훑어 보면 새로운 무덤이 어김없이 생겨나 있었다.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죽어 묻혔다는 것을 말이다.

식사는 매번 "꽁보리밥에 생선 썩은 전어젓과 소금 뿌린 배추김치"로만 구성되었는데, 이나마도 5분 내로 다 먹지 못하면 기합을 받았다. 아이들은 너무 배가 고파 화단에서 지네를 잡아먹거나 솔방울을 씹어 먹었다. 병에 걸리거나 다치더라도 당연히 정식 치료는 받을 수 없었다. 철제 앵글에 찔려 뺨이 반쯤 뚫렸을 때에도, 동상 때문에 발가락 10개 모두 절단되더라도, 옆구리가 터져 곪아 썩어 들어가는데도 항상 똑같은 알약 2개를 주거나 '빨간약'만 바르고 말았다.

우리는 (째진 부위를) 찬물로 깨끗이 씻고 운동장에 있는 아주 얇고 고운 흙을 상처 부위에 뿌렸다. 그러면 그 흙이 딱지를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팔다리가 멀쩡할 수 있었다.

옆 소대로 끌려간 작은누나는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부탁하다가 결국 "옷을 다 벗기고 손을 묶은 후 나무 막대기에 비닐을 씌어 여자 자궁을 사정없이 찌르고 빼는" 체벌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 말을 전해주었다. "니 누나, 정신병이 심해져서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신관으로 갔다." 한종선은 누나가 너무 보고 싶어 위험을 무릅쓰고 금지구역인 정신병동을 훔쳐보았다. 그곳에는 누나를 포함해서 여자들이 손발이 묶인 채 누워있고 남자들이 그녀들을 강간하고 있는 게 훤히 비쳐보였다. 얼마 뒤, 남매를 버렸던 아버지마저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참혹한 나날에 대한 한종선의 글자 기록은 72쪽으로 끝이다. 이건 수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드러나고 건물이 폐쇄된 다음 또 다른 소년의 집으로 이송된 한종선에게 비로소 '자유로운' 세상이 펼쳐졌을까? 그렇지 않다. 10살을 조금 넘긴 소년이 폭력의 구조만을 몸에 체득한 채, 세상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홀로 내팽겨쳐진다면 뭘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여전히 사기와 갈취를 당했고 결국 범죄에 손을 댔으며 감옥을 들락거렸다. 그가 마음을 잡았던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작은누나와 아버지를 찾아낸 다음부터다. 두 사람은 모두 1989년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해있었다.

한종선은 30년 가까이 자신과 가족들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형제복지원을 향해 뭐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2012년 무더운 여름, 국회의사당 앞에서 무작정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그는 타인의 시선을 견뎠다.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이자 문화연구자 전규찬과 마주쳤다.

전규찬 교수는 그에게 지난 삶을 글로 써볼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긴 글을 처음 써본다는, 무식한 내가 감히 이런 글을 써도 되냐며 주춤거렸던 한종선의 덤덤한 단문은 그가 아직도 시원하게 발산해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분노와 탄원을 더 강력하게 웅변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개나 소나 다 글을 쓰는구먼."
그렇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해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10분의 1도 채 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며, 글의 말미에 덧붙인다.

"부탁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수많은 복지원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십시오."

한종선의 글 말미에는 형제복지원 시절을 묘사한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인펜으로 대충 낙서한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지만, 디테일은 정교하고 대사들은 살벌하다. "오줌싸개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원장 마누라"라는 화살표, 어린 원생의 성기 주변을 꽉 누르며 "따라해, 주여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원장 마누라', "으-아 주여 믿습니다"라며 울부짖는 원생의 초상 같은 것. 어쩌면 글을 읽을 때보다, 서툴지만 누군가의 기억을 정교하게 복원하는 그 그림이 더 몸서리쳐지는 고통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한종선의 증언록(전규찬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소설(小說)', 즉 작은 이야기), 인간의 '예외 상태'에 대한 전규찬 교수의 해설, 그리고 인권활동가 박래군이 사회복지시설을 둘러싼 '침묵의 카르텔'을 분석하는 글.

이런 구성은 <나, 피에르 리비에르>(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 앨피 펴냄), 즉 어머니와 누이와 어린 남동생을 죽인 '살인마 괴물'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와 그 기록에 대한 미셸 푸코 및 동료 연구자들의 해설을 붙인 구성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싶은데, <나, 피에르 리비에르>보다 <살아남은 아이>의 해설 쪽이 훨씬 더 명쾌하다는 걸 부인할 순 없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아이>의 해설은 <나, 피에르 리비에르> 같은 '해석'이나 '담론'이라기보다는 독자라는 거대한 배심원들을 향한 기나긴 고발장이자 한국 현대사의 부끄러운 일부를 향해 쏘아붙이는 기나긴 선동문이기 때문이다.

한종선의 수기만큼이나 전규찬과 박래군의 글도 중요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리고 목마른 이들과 함께함은 주께서 내게 명령한 사명"이라던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의 행보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복지원 자체의 자료로만 513명(아마 더 많은 수치가 기재되어야 할 것이다)이 그곳에서 죽어나갔는데, 박인근 원장이 1989년 받은 형량은 벌금형 없이 2년 6개월의 징역이었다. 그는 출소 이후에도 계속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승승장구하는 '복지재벌'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의 3남이 현재 이 법인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아마 이 부분에 이르러, 영화 및 소설 <도가니>가 광주 인화원에 끼친 영향을 떠올리면서 "왜 여긴 무사한가"라는 공분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박래군의 글은, 사회복지시설이 한국 사회 내에서 어떤 식의 관계망을 통해 선한 탈을 쓴 괴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박래군은 형제복지원뿐 아니라 광주 인화원, 에바다복지회, 청암재단, 성람재단, 성실정양원 등의 사회복지시설 내에서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인권침해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런 부조리한 시스템이 가능한 이유를 분석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이상한 사유화의 방식이다. '사재'를 털어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한 이는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아서 운영함에도 불구하고 설립 당시부터 내 재산이라는 인식은 사회복지시설의 공공적 성격을 현저하게 약하게 만든다." 이것이 사회복지시설의 족벌 체제 경영으로 이어진다. 세 번째 이유는 시설장과 '원만하게' 유착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다.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으로 대표되는 '악의 축' 한 명에게 처벌을 가하는 것만으로는 이 만연한 '침묵의 카르텔'이 끊어질 수 없다. (이 말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박 원장도 어찌 보면 불합리한 한국 사회의 한 조각일 뿐이다'라는 식의 핑계로 들리지 않길 바란다) 한국에서(분명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곳도 많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사회복지시설이라는 탐욕과 몰이해의 건축물은 아주 오랫동안 면죄부를 부여받은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이 건축물의 '도면'은 전규찬의 글에서도 자세하게 드러난다.

전규찬은 좀 더 뒤로 물러서 아예 한국현대사를 훑으면서 부랑아와 복지시설이 어떻게 구성되어왔는지 재구성한다. 1920년대에 처음 등장한 '부랑아'라는 단어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를 일컬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하지 않고 놀면서 도시를 떠도는 주거부정, 신원미상의 프롤레타리아트'로 바뀌었다. "가혹한 식민지 수탈과 각종 재해로 대량의 이촌 농민들이 발생하고, 이들이 도시로 유입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도시 부랑자'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일제 시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회복지사업이 시작되고 "식민지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들을 사랑과 헌신으로 돌봐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어"간다는 미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해방과 6·25 전쟁,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부랑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제약은 더 공고해졌다. 한국 사회가 근대화라는 이름하에 변신을 거듭할 때, 거기서 튕겨 나온 수많은 존재들이 '깨끗하고 명랑한'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계운영의 능력을 상실한 가구이며, 사회적으로 위해한 인구, (…) 별도로 관리되고 특별하게 수용될 필요가 있는 대상, 국가 분할 통치의 직접적 상대"로 명명되었다.

전규찬은 "거리의 규율과 사회 질서, 생활 기강을 강조한 박정희 파시즘과 유신독재, 전두환 독재의 시간"을 거치면서 이 같은 통념의 질서가 어떻게 공고한 위계를 갖추게 되었는지 촘촘하게 분석한다. 5·16 쿠데타, 유신 선포, 비상계엄령, 새마을정화운동,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생활올림픽추진단' 등을 거치면서, "국가가 발령한 치안의 '훈령'에 기반하여 도시 인구를 대거 수용한" 형제복지원 같은 지옥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지배했던 한국에서 복지원은 "준-군사적 예외상태, 준-병영적 예외시설"이자 "도시 안에 마련된 근대에의 입영"을 의미한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끌려온 도시 빈민과 노동자, 뿌리 뽑힌 자들은 이유도 물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폭력 아래서 "일점 구령과 전체 복창의 질서", 인간의 소리가 아닌 "야수의 울음이며 짐승의 비명소리"로 존재 자체를 축소당했다. "기합과 폭력은 복지원/수용소를 비명의 공간으로 점철한다." 악악, 윽윽, 아이구.

군사화한 복지원은 군사정권이 차지한 폭력적 국가의 미시축약형에 다름 아니며, 그 마이크로 폭력 스테이트의 야만적 행태는 유사한 수용소 레짐에서 그대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복지원/수용소의 문제는 반드시 보다 거시적인 한국 현대성의 일그러진 특징과 결부시켜 깊이 사유할 필요가 있다.

전규찬은 계속 질문을 던진다. 아우슈비츠 등지의 수용소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도 높은 편인데 왜 국내에 실존했던 수용소에 대해서는 눈길을 돌리냐고, 왜 '과거에서 벗어나 미래를 지향하자'고만 하냐고, 왜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나도 피해자다' 혹은 '당시 법이 그랬으니 누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만 하냐고.

혹은, 이것이 나와 상관없는 과거의 비극일 뿐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모습이 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언젠간 긍정의 힘으로 지금의 답답증을 돌파하리라, 결코 '부랑아'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정일준 옮김, 새물결 펴냄)에서 미켈란젤로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품들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간단합니다. 먼저 대리석판 한 개를 골라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깎아내면 됩니다."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미켈란젤로는 현대의 창조를 이끌게 될 계율을 선포한 셈이다. 쓰레기의 분리와 파괴는 현대적 창조의 비법이 되었다. 여분의, 불필요한, 쓸모없는 것을 잘라내 버림으로써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만족스럽고 좋은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던 이들이 사회의 생산력에 기여하는 가치 있는 노동 자원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가치한 '쓰레기' 취급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지금 사회에 넘쳐나는 '잉여'를 (농담처럼) 자처하는 수많은 이들 역시 그만큼이나 무가치한 존재라는 점을 상기하자. 형제복지원이라는 물리적인 건물에 수용되지 않았을 뿐, '잉여'들은 이미 "일하지 않고 놀면서 도시를 떠도는 (주거부정, 신원미상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사회적 인식에 포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인식이 사회적 합의로 이어지고,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면 그때 나와 당신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은 '하나 되는 대한민국'의 성립을 위해 아주 간단하게 분리될 것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반드시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치를 달성한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형제복지원의 생존자인 한종선은 '부끄러운 익명'으로 남기를 거부했다. 얼굴과 이름을 밝히면서 증언을 시작했고,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렇다면 '조화로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분리될 것이 틀림없는 99퍼센트의 '잉여'들은 어떤 식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형제복지원은 얼마 전 사퇴한 김용준 총리지명자의 과거사에 얽혀 불현듯 많은 뉴스에 그 이름을 올렸다. 김용준 총리지명자가 대법관이던 시절, 그가 재판장으로 맡았던 사건 중 형제복지원 사건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복지원의 취침시간에 자물쇠로 출입문을 잠그고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 것은 사회복지사업법 등 법령에 따른 정당한 직무행위로 감금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원장에게 특정경제가중처벌법위반(횡령)죄만 적용, 2년 4개월 형을 선고했다. (…) 당시 이 재판은 검찰이 살인죄 등의 혐의는 빼고 기소하면서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이런 재판에서 재판부가 감금죄까지 적용시키지 않다보니 피의자의 형량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바로가기☞ "'사회적 약자' 상징이라던 김용준 후보, 알고 보니…")

김용준 총리지명자가 사퇴했다는 것이 어떤 '승리'처럼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많이, <살아남은 아이>를 읽어야 하고, 사회복지시설이 곧잘 봉착하고 마는 악의 유혹에 대한 해명을 줄기차게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한종선의 절실한 마지막 부탁에 응답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으로는,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것만큼이나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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