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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원 지폐가 그토록 감동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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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원 지폐가 그토록 감동적인 이유!

[프레시안 books]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지금쯤 남도의 어느 양지바른 둔덕에는 매화가 피고 있을 것이다. 설중매화(雪中梅花)라, 차가운 눈을 뚫고,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를 보면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검고 거친 나무 몸통과 비틀어진 가지를 보노라면 안타까운 느낌이 더한다. 고통을 온몸으로 짊어진 채 봄을 알리려고 피운 작은 꽃망울에 깃든 몸짓이, 삶에 지친 사람들 눈에 와 닿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화는 젊은이들의 눈에 띄는 꽃은 아니다. 매화는 신산한 고통을 겪고, 삶과 죽음을 함께 지켜볼 만한 중년의 고비에서야 눈에 드는 꽃이다.

1.

퇴계 이황은 유독 매화를 좋아했다 시리고 아픈 사화(士禍)의 시대를 몸소 겪고 살았던 그가 죽음에 이르러 "머리맡의 매화 분에 물을 주어라"는 유언을 남긴 데도, 깊은 뜻이 서린 듯하다.

퇴계를 초상으로 삼은 1000원 권 지폐의 앞면에도 매화가 가지째 드리워져 있다. 그 드리워진 매화가지 아래에는 한옥이 한 채 그려져 있는데, 대문의 현판에는 작은 글자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명륜당'이라고 쓰여 있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핵심 건물이므로,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대학 본관 건물인 셈이다. 그 중에 명륜(明倫)이란 유교이념이자, 유교적 인간이 지향해야할 가치다. 한때 퇴계가 성균관장을 역임했으니, 1000원 권 지폐의 앞면은 퇴계의 사람됨과 취향, 그리고 이력을 한꺼번에 잘 요약한 것이다.

▲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정만조·정순우 외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더욱 흥미로운 것은 뒷면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그려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계곡 위에 조그만 집 한 채가 있고, 거기 한 선비가 조용히 글을 읽고 있다. 곧 도산서당에 퇴계가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그림이다. 문득 퇴계가 조선에 '서원 운동'을 일으킨 정치가라는 생각에 미친다.

유교국가 조선이 건국한 이래, 고위직 관리의 배출은 국립대학인 향교와 성균관에서 맡았다. 그러나 16세기 들어, 과거 급제자는 늘어나는데 벼슬과 직장은 더 늘지 않으니 자리다툼이 생기게 마련. 속되게 말하자면 사화(士禍)란 자리를 둘러싼 피나는 다툼이었던 것이다. 꼭 기술을 배우고 취업을 위주로 삼는 요즘 대학과 닮은꼴이 당시 향교나 성균관의 모습이요, 또 대학을 나와도 직장이 없는 오늘날 졸업자들 신세와 당시 과거 급제자 처지가 닮은꼴인 셈이다. 대학이 대학 구실을 못하고 배운 사람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조선 중기 국가적 위기의 정체였다.

2.

이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려는 정치적 활동이 퇴계의 서원 창설 운동이었다. 향교와 성균관을 통해 가르치고 배웠던, 그러나 끝내 집단 살육을 부른 인포메이션(information) 위주의 공부에서 벗어나, 몸 마음을 수련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공부로 전환하자는, 일종의 '지식 혁명' 운동이었다. 출세 위주의 공부를 벗어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사람다움을 닦는 공부가 아닌 다음에는, 그 어떤 정치경제적 묘수를 시행한다 해도 피나는 경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그리고 사람 목숨을 앗아가는 사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퇴계 서원운동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이런 퇴계의 서원에 대한 생각이 글에도 남아있다.

"저 몇 대에 국학이나 향교가 없었던 것이 아닌데 반드시 다시 서원을 세운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국학과 향교는 과거(科擧)와 법령(法令)의 구속을 받아 서원이 어진 이를 높이고 도를 강구하는 아름다운 뜻에 전념할 수 있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彼數代非無國學鄕校而必更立書院者何也. 國學鄕校有科擧法令之拘, 不若書院可專於尊賢講道之美意. <퇴계문집>, 권32. 31:b).

과거(출세)와 법령(권력)에 구애되지 않는 '인문학교' 서원이야말로 욕망과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을, 그리고 사람다운 문명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임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폐의 앞뒷면은 퇴계의 사람됨과 이력, 그리고 그의 정치적 비전을 잘 묘사하였으니, 1000원 권은 보기 드문 '철학적 화폐'인 셈이다.

살아생전 퇴계는 10여 곳의 서원을 수립하는데 주동이 되었다. 그 200여년 후,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원의 숫자는 천 여 곳에 달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서원들을 철폐하면서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 조치를 막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했던 것은, 조선 후기 서원의 악폐가 얼마나 심했던가를 알려주는 말이면서, 동시에 퇴계의 서원운동이 조선에 뿌리내린 정도를 알려주는 소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황을 중심으로 도산서원의 속살과 이력을 아는 것은 조선 지성사를 파악하기 위한 디딤돌이 된다. 이런 점에서 최근 상재된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정만조·정순우 외 지음, 글항아리 펴냄)은 눈길을 끄는 책이다. 지식은 말로 생산되고, 글로써 굳어지고, 책으로 갈무리된다. 마찬가지로 퇴계가 생산한 말(지식)은 제자에게 이르러 글로 바뀌고 그 글은 책으로 만들어져 전해졌다. 이 책은 도산서원을 소재로 삼고, 거기서 생산된 말과 그 전승을 주제로 삼았다. 따라서 이 책이 다루려는 소재는 세 가지다. 서원, 지식, 그리고 책이다. 그래서 책명이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이다.

3.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은 조선의 지성사가 오늘 현대로 가까이 다가오려는 발걸음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모여든, 도산서원 등에 소장·전래된 숨은 자료들이 이 책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일종의 '지식 박물관'이다. 그 내용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자료 사진들이다. 도산서원을 묘사한 역대의 풍경화들, 퇴계가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글, 책을 발간하고자 지역사회에 돌린 통문 등 많은 자료들이 선명한 사진으로 들어차있다. 도산서원의 도서관(광명실)에 비장되어 일반인으로서는 보지 못했던 자료들이기도 하려니와, 작은 글자들까지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찍힌 사진들이어서 실감을 더한다. 조선시대 숨겨둔 자료들이 디지털 시대를 기다린 듯하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6부로 이뤄져있고, 7명의 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1)'이라는 작은 제목에서 보이듯 책 내용은 일반 교양도서가 아니라, 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자료들(경북지역 서원들과 종가에서 이관된 자료들)에 대한 1차 연구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편집에 크게 신경을 썼다.

원근법을 사용한 듯 처음에는 조감도적 서술로 시작하여 점점 주제를 좁혀가 후반부에는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다. 독자는 꼭 도산서원에 초청된 것 같다. 서원의 대문 앞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서당을 살피고, 중문을 열고 들어가 내밀한 도서관을 살펴보고 마지막에는 사당 문을 열고 들어가 내밀한 방안을 살펴보는 식이다.

그 첫째 장에는 서원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과 도산서원의 의미를 담았다. '도산서원과 영남의 지식문화'라는 부제가 그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일반 독자들을 서원의 세계로 초청하는 대목이다. 둘째 장에서는 생전의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행한 강의를 살핀다. 책제목인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가운데 퇴계 이황이 말(언어)로 생산한 지식의 내용물을 살피는 대목이다.

잠시 퇴계 이황의 생전에는 '도산서원'은 없었고 '서당'만 있었다는 점도 알아둘만한 상식이다. 서원은 서당과 사당, 두 요소로 이뤄진 곳이다. 그 중에 서당은 공부와 토론이 이뤄지는 교실이고, 사당은 사표로 삼을만한 선현을 기리는 성소다. 그러니까 퇴계 생전에는 그가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야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는 사당(상덕사)을 세움으로써 '도산서원'이 된 것이다.

셋째는 스승이 생산한 지식의 내용과 그것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전승되는가를 따져보는 부분이다. 평생 퇴계를 모신 수제자, 월천 조목에게 계승된 지식을 중심으로 살핀다.

넷째 장부터가 이 책의 본론에 해당한다. 요컨대 도산서원에서 생산된 책은 무엇이며, 그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유통되고 보존되었던가를 다룬다. 전문적이지만 이 책의 주제인 '지식의 탄생'의 핵심부분이다. 그 가운데 4장에서는 책을 중심에 놓고 도산서원이 지역사회에 차지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살핀다. 5장에서는 도산서원의 '출판사'로서 역할을 다룬다. 끝으로 6장에서는 도산서원의 '도서관'으로서 기능을 다룬다.

특별히 흥미로운 대목은 이헌창 고려대 교수와 이수환 영남대 교수가 공동 작업한 5장이다. 이 장은 '서원의 책 출판에 관한 미시사'다. 어떤 책을 찍었는지, 몇 부를 찍어냈는지, 책을 만드는데 든 비용은 얼마인지, 그 책은 또 어떻게 유통되었고 소비자는 누구였던지 세밀하게 조사하였다. 그 가운데 금속활자를 먼저 발명한 조선이 왜 목판인쇄에 치중했던지를 밝힌 부분은 지식생산 도구인 출판기술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다. 인용해본다.

우리나라는 오랜 금속활자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지만, 조선후기 민간은 거의 목활자에 의존했다. 그에 반해 유럽에서는 금속활자의 출현이 한발 늦었음에도 동아시아보다 그것을 더욱 활발히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자는 영어와 달리 글자 수가 무척 많아 금속활자를 만드는데 많은 비용이 들었다. 게다가 조선에서 서책의 발행 부수는 많아봤자 수백 권이었기에 목판이 금속활자보다 단위당 평균 생산비가 저렴했을 것으로 보인다. 책을 대량으로 자주 인쇄하는 전문적인 인쇄업자에게는 활자가 유리할 수 있다. 중앙정부는 금속활자를 가졌으므로, 정부에서 활판으로 인쇄한 서책을 보내면 지방에서는 목판으로 판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목판은 판형을 보존해 새로 찍을 수 있는 경제적 장점이 있고 이를 가보로 보존하는 문화적 가치도 있었다.(296~297쪽)

요컨대 영어 알파벳은 수가 적기에 각 글자를 금속활자로 만들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한자는 글자 수가 너무 많아서 금속으로 만들어도 그 사용빈도가 훨씬 떨어지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었다는 것.

둘째, 상업적인 서적시장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조선의 지식유통과 관련하여 감안해야 할 중요한 특징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도 달리 조선에서는 상업적인 도서시장이 부재했다. 책을 생산하는 주체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그리고 서원들이었다. 생산되는 책의 종류도 경서류, 삼강행실도와 같은 윤리서적, 캘린더, 그리고 문집 유들이었고 생산되는 부수도 적었던 것이다.

조선이 '근대화'에 뒤처지고,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추락하게된 것은 지식생산력의 한계와 서적시장의 부재에서도 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서적의 발행부수를 검토한 대목에서 지적되는데 서적생산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게 만든다. 이헌창과 이수환이 서술한 장에서 인용해본다.

<퇴계선생문집 중간시일기(重刊時日記)>에 따르면 1843년 <퇴계문집>은 11질을 중간했는데 1질당 32책이었다. 정부는 서책을 대개 100~500부 인쇄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책의 발행부수가 적었던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를 발명한 1450년대 이래, 유럽에서는 경제성장과 결부되어 서적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 금속활자를 먼저 발명한 동아시아를 크게 앞질렀다. 서적의 종수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부수도 훨씬 많았다. 15세기 중엽에는 1종당 평균 150부였는데, 16세기에는 수천 부 발행의 책이 많아졌다. 조선의 하루 인출량(印出量)은 대략 100여장 정도였는데 유럽은 1500년경 300장이던 것이 18세기 3000장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서적 생산의 동서양 간 차이는 지식의 생산과 보급의 격차를 반영해 유럽이 동아시아에 앞서 근대화를 달성한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301~304쪽)

그러면 조선의 출판이 상업유통을 감안하지 않았다면, 그 출판의 의미는 어디에 있었을까? 특별히 지방의 서원들에서 생산한 문집들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문화 권력으로 구실했다. 조선후기 홍한주의 <지수염필>(智水拈筆)에 서술된 내용을 인용해본다.

영남의 인사들이 문집을 간행하는데 그 대상은 조정에서나 선비들도 모르는 고을의 선배일 뿐이다. 문집을 간행한 이유는 가세가 한미하고 조정의 벼슬을 얻지 못하면 문족을 지켜나가더라도 편호와 구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대부의 이름을 잃지 않기 위하여 조상 가운데 평소 지었던 시와 편지를 모아서 '누구(謀) 선생 유고'라고 칭한다.

즉 "당시의 지식인들은 영남, 특히 안동 지역의 문집 간행을 저자의 학문적 업적의 결과라기보다는 문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더 컸다. 실제로 조선 후기 문집의 간행은 조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송숙경, 257쪽)

4.

이 책은 학술적인 연구물을 대중화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그 노력에 크게 힘이 된 것은 숨어있던 자료들의 생생한 사진들이다.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독자들은 마치 박물관에서 전시된 지식 관련 유물들을 전람하듯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은 크게 치하되어도 좋을 듯하다.

다만 조선의 서원에서 생산된 서책이 문집 유 일변도였다는 사실(史實)은 훌륭한 기획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적 한계로 작용한다. 특히 도산서원에서 생산된 서책은 퇴계와 그 제자들에 대한 문집 유가 대부분이었다. 이 점이 '지식의 탄생'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좀 초라하게 만든다. 이것은 조선에 상업적인 서적 시장이 부재했다는 점과도 밀접히 관련되는 '구조적 한계점'다.

그러나 지식생산의 다양화=근대화, 출판의 양적 증가=문명화라는 등식을 거부하고 지성사를 바라보면 조선의 지식문화는 다른 조명이 가능하다. 즉 각 나라는 나름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다양한 근대화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의 지식문화는 또 그 특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 책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서원-지식-책이라는 삼각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서 지식의 생산과 전승이라는 점을 주목하였다. 거시적 시야와 미시적 관점이 잘 아우러져, 서원이라는 공간, 퇴계라는 지식생산자, 그리고 책을 통한 지식의 갈무리와 생산, 저장의 측면이 여러 학자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흐름으로 잘 조명되었다. 전통문화를 현재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다양한 성과물이 계속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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