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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청년들, 무차별 살해·전쟁 꿈꾸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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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청년들, 무차별 살해·전쟁 꿈꾸는 이유?

도쿄대 강상중 "한·일 사회 병리 닮은 꼴…행복 방정식 바꿔야"

올해 초 일본의 자살 사망자가 15년 만에 처음으로 2만 명 대로 떨어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일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숫자는 1998년 이래 줄곧 연간 3만 명 이상이었던 셈이다. 이를 인구 10만 명 당 숫자로 나타내면 21.2명 수준이다. 한국의 경우 자살 사망자 숫자가 연간 1만 5000여 명 정도이지만 10만 명 당 31.2명으로 일본보다 앞선다. (2010년 통계청 기준) 8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걸쳐 있는 정체성으로 살아 온 강상중 도쿄대학교 정보학환 교수는 오랜만의 내한 강연에서 이 '살벌한' 숫자와 관련한 어두운 이야기부터 꺼냈다. 지난 25일 저녁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대성당에서 열린 강연에서 그는 "사회 바깥에 내몰린 약자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 한국과 일본은 여전히 '자기 책임론'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국가와 사회의 기능이 붕괴되어가는 상황에서 진정한 연대의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강상중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는 영토 문제로 반대 입장에서 싸우는 두 나라가, 사회 병리 현상에 있어선 매우 닮은 구석이 있다고 말했다. 바깥으로 내몰려 스스로 죽는 수많은 사람들뿐 아니라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렇다. TV 프로그램에서 접한 한국의 고학력 '취업 재수생'의 모습 위로, 그는 새벽 2시까지 맥도날드에서 버티다가 동틀 때쯤 일용직을 찾아 나서는 일본의 '맥도날드 난민'을 겹쳐 본다. 전자가 훨씬 나아 보이지만, 이미 앞자리를 차지한 수많은 사람 뒤에서 한 뼘 '스펙'으로 발버둥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난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지도 모른다.

전쟁 같은 이런 상황이, 때로는 젊은이들에게 진짜 전쟁에 희망을 품도록 만들기도 한다. 강상중 교수는 "이대로 낙오된 채 버려질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전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비정규직 논자도 있었다"며 이들의 욕구 불만이 인터넷 상에서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의 언어로 분출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지는 상황이다.

대안을 논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비관으로 돌아가 고민하고 작은 단위의 연대부터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강상중 교수의 제언이다.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은 대단한 연대가 아니다. 지역 밀착적인 작은 경제, 배움 공동체가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롤 모델 사회를 묻는 질문에 "지역 분권화를 지향하며 중소기업이 경제를 튼튼히 받쳐주고, 일요일에는 백화점 문을 닫고 실업자들을 사회 안전망 속에 보호해 주며, 무엇보다 탈핵을 국가 과제로 내건" 독일을 꼽기도 했다. 과거 서독이 여야 대연립을 통해,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일관된 대 동독 외교정책을 폈던 일을 들어,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도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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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야 하는 이유>(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그는 문제와 대안을 잇는 고리로 지금까지의 '행복 방정식'의 전환을 든다.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경제적 수준이 맞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에게 똑같은 삶을 물려주는" 행복 방정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그의 진단은 2012년 번역 출간된 <살아야 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 펴냄)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고민하는 힘>(이경덕 옮김, 사계절 펴냄, 2009)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킨 이 책에서 그는 막스 베버, 나쓰메 소세키 등 거인의 어깨를 빌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과 시간의식을 비관주의 속에서 철저하게 재고할 것을 제언한 바 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2010년 아들의 죽음,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를 겪은 뒤 그가 돌아가야 했던 절망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는 이 절망을 대하는 관점을 '안일한 낙관론'에 대비해 '정직한' 비관론이라 말한다.

<살아야 하는 이유>의 문제의식에 연장선을 긋는 이번 강연에는 200명의 청중이 참여해 호응했다. 사계절출판사, 교보문고와 함께 강연을 주최한 <프레시안>은 이날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청중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하여 정리해 싣는다. 강연의 동시통역은 전북대학교 일어일문과의 임경택 교수가 맡았다.

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한국에서 최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급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헤아릴 길 없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통 '자살자(自殺者)'라고 부르지만, 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자사자(自死者)'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일본의 경우, 한국과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가 온 1998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3만 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15년간 약 60만 명 이상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셈입니다.

제 제자 중 한 명은 자사를 생각한 사람이나 자사자들의 가족을 돕는 라이프링크(LIFE LINK)라는 NPO를 만들어 10년 이상 활동해 오고 있습니다. 그는 요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의 지도를 그려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경시청은 도도부현(都道府県) 단위로 자사자의 숫자를 헤아려 발표하고 있는데, 이 NPO에서는 그것보다 작은 시, 정(町), 촌(村) 단위로 헤아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그 현황을 헤아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은 이제 G20에도 들어가는 나라가 되었지만, 자사자의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도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로 인한 사회적 격차가 극심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자사자 숫자는 한국이나 일본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매우 농후하고 끈끈하며, 그것을 중요시 하는 사회라고 배워 왔는데도 말이지요.

ⓒ프레시안(최형락)

자살자에 대한 '자기 책임론'

제가 영국을 처음 갔던 것은 1979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마가렛 대처가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사회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정부나 사회에 의존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책임 하에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명확히 한 것이지요. 지금 한국의 현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데, 저는 그가 대처의 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일본이나 중국에도 '대처의 아들'들은 많이 존재하지요.

그러나 '지금'의 영국과 미국을 보십시오. 예를 들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제2기 취임사를 한 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약자, 빈곤자, 실업자, 혜택 받지 못한 자들을 돌보지 못하면 미국은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최소한 취임사에서는, 의료.사회 복지를 확대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고, 불행한 자들에게 손을 뻗칠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국도 블레어 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처의 실정을 시정해나가는 지난한 세월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명확히 이와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은 어떻습니까. 세계적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내고 있지만 내수는 신장되지 않고, 국민 생활 역시 풍요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끊임없이 한국을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요즘 이것을 '한국화하는 일본(Koreanazation of Japan)'이라고 부릅니다.

최근 일본에서 '맥도날드 난민'이라는 것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20~30대의 젊은이들이 잠 잘 곳이 없어 맥도날드에서 심야 2시까지 100엔짜리 커피 하나로 버티고, 그곳이 영업을 끝내면 중고 서점 체인인 '북 오프'에서 4-5시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동이 틀 때쯤 다시 일용직 노동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그린 르포르타주였습니다. 아마 서울에도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일본 TV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만, 그 영상에는 취업과 관련된 학원이 모인 곳에서 이삼년씩 공부하는 '취직 재수생'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영토 문제, 역사 문제로 다투고 있지만, 여기에서 극명히 대립되는 입장과는 달리 사회 병리 현상에서는 놀랄 만큼 닮아 있습니다.

최근 높아지는 자살률과 관련해, 몇 년 전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인 사건을 떠올려 봅시다. 어떤 청년이 트럭을 타고 거리에 난입해 몇 명의 사람을 죽이고 체포되었습니다. 청년은 도요타 자동차 하청 공장에서 이른바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남성입니다. 그는 아키하바라에서 행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는 생각으로 그런 참극을 벌였다고 합니다. 일본에선 그러한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가 때때로 일어납니다. 이런 사건에는 자살을 하더라도 홀로 죽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끌고 들어가서 같이 죽겠다는 '무리신쥬(無理心中)'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된 걸까요.

또 하나 다른 풍경을 봅시다. 제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죽음을 선택한 많은 이들이 대부분 '죄송하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사자의 주변인들은 그들이 죽기 전까지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 사회의 패배자이고, 능력도 없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는 세상에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이들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다'든가 '인생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 전 문제시 하고 싶은 일본의 신문 기사가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죽고 싶어 한다면 나는 그걸 말릴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죽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는 말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도 개인의 자유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기 책임론'입니다. "사회나 정부에 기대지 마! 오로지 스스로 책임 져!"라는 분위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해 있습니다. 사회 내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순전히 개인이 못나서, 혹은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평가하는 사회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에 대해, 전 결코 '마음이 약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나 이상, 희망,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끈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대학 시절만 해도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면, 냉전이 붕괴되면 훌륭한 사회가 될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를 맞은 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이상이나 희망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쓰면서, 냉전 종결 이후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미국처럼 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때로는 따분할 때도 있겠지만 대체로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올 거라고 결론지었지요. 돌아보면 그의 예언은 완전히 틀린 셈입니다. 오히려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금융 위기와 불안 등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요소들로 인해 각자의 삶이 언제 뿌리채 뽑힐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이 시대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진귀한 존재일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불행을 느끼는 타인에게 손을 뻗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한국에서는 민주화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 민주 세력이 집권하면 이상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치 그 자체에 절망을 느끼는 시대인 것이 현실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총선거로 자민당이 재집권에 성공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유권자의 4분의 1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40퍼센트 이상이 투표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에 꿈은커녕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직업을 가질 수 없고, 직업이 있더라도 파트타임이거나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하고, 장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댈 수 있는 존재도 점점 사라지고 있고요.

일본의 젊은이들이 전쟁을 꿈꾸는 이유

2011년 일본에서는 3.11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아들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 불행한 사고를 목격해야 했습니다. 2만 명 이상의 행방이 불명해지고, 후쿠시마 일대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인간도 동물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사실에 온몸이 떨렸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떠나야 했고, 그 땅은 아마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후쿠시마의 한 농민이 "지금은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다"고 호소한 것이 가슴 깊은 곳에 박혔습니다. 또한 가설 주택에 몸을 맡겨야 하는 이들 중에서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대응은 혼란의 연속이었고,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을 살려주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런 것들을 다 보았으면서도 다시 핵발전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국가가 더 이상 시민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들은 방치된 난민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살벌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일말의 희망도 있었습니다. 사고 직후 '기즈나(絆, 연대.유대)'라는 말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서로를 구해보겠다고 나서는 열정이 불타올랐었으니까요. 하지만 1년 반이 지나자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지금의 일본을 보면, 젊은이들이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리 위에 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서는 몇 년 전, 어떤 젊은 프리터가 쓴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은 아마 "미래는 홈리스, 희망은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필자는 불안정한 프리터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자기는 장래에 분명 홈리스가 되어 있을 것이지만,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사회가 변할 것이고, 변한 사회에서라면 자신도 찬스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부모가 가난하고 자신의 학력도 낮은 사람은, 그대로 사회에 내몰렸을 때 잡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더라는 겁니다.

일본에는 가정의 연 수입이 1000만 엔 이상일 경우와 300만 엔 이하일 경우에 자녀의 학교 성적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특정 학력, 특정 수준 이상의 연 수입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부모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걸어가 비슷한 학력을 갖추고 연 수입이 비슷한 가정의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는 루트가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서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클 바깥에 존재하는 비참한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없을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사회 상황은 20세기 역사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와 견주어볼 수 있습니다. 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기승을 부렸을까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젊은이들이 전쟁 준비에 열광했던 겁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재일 한국인의 특권을 없애는 모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 조직을 만드는 젊은이들은 왜 저 같은 재일 2세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한국인들이 일본에 와서 기생충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간주합니다. 그런 가운데 일부는 '넷 우익(인터넷을 기반으로 우익적인 발언, 혐한·혐중 발언을 일삼는 네티즌을 이름)'이 되어 반동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에서 '이민자 배척'이란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구 동독 지역에서도 '네오 나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혜택 받지 못한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상황을 비관한 나머지, 욕구 해결을 위한 속죄양을 찾아나서는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파탄 난 사회를 구제해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과격한 내셔널리즘이 공백 상태에 빠진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지금까지의 '행복 방정식'은 잊어라

200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1개월간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곳은 통화 문제로 경제 파탄에 이른 상태였고, 상황은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보다 비참했습니다. 아사자도 속출할 정도였으니까요. 돌아보면 지금의 아일랜드나 그리스에서 일어난 위기를 예견하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만났던,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완연한 제노사이드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곳에서 아주 큰 교훈을 얻기도 했습니다. 국가 경제가 파탄 난 상황에서 지역통화로 물물 교환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그때 물물 교환에 참여하고 있던 한 사람은 "세계화는 세탁기와 비슷하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세탁기의 한가운데는 늘 무풍지대이고, 바깥으로 갈수록 엄청난 압력과 속도로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안쪽에 있는 이들은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느끼겠지만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일수록 비참함을 느낄 것입니다.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은 세탁기를 멈출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하지만 동시에 매우 어렵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연대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들은 동구권의 붕괴를 촉발시킨 폴란드 노동자들의 자유노조 운동의 기억을 갖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 그물망 안에 얽혀 있던 사람들은 거대한 사회 변동 속에서도 결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이 연대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일본에선 매년 삼만 명 이상이 '고독사'로 죽습니다. 7-80대 노인들이 '혼자서' 죽어가는 현상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한국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라고 배웠지만, 아마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가정은 TV 드라마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제 혈연 관계 이외의,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그게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에 대해 제가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지진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네트워크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모습을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또는, 여기 오신 분들과 저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바로 이 자리에서도 일시적인 연대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 연대를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인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이어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세계화와 함께 경제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큰 것이 강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명확한 차이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저는 이러한 경제 구조가 한국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금후의 글로벌화가 두 가지 트랙으로 진행될 거라고 봅니다. 그것은 일부 대기업처럼 정력적인 수출을 통해 돈을 모으는 경제 형태와 함께, 지역 내에서 생산과 소비가 완결되는 소규모 지역 경제 형태입니다. 이는 국경과 관계없이 작은 결사체들이 중심이 되어 생활과 학습을 공유하는 형태일 것입니다. 이런 실험들이 한국과 일본에서도 가시화되고 있으며, 앞으로 지구상에 점점 더 늘어갈 거라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지역통화 같은 것도 이런 지역 밀착형 공동체, 경제를 만드는 툴이 될 수 있겠지요. 이런 것들이 단계적으로 연대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살아야 하는 이유>에 썼듯, 제가 어릴 때부터 바라고 바란 것은 '행복'이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 경제적 수준이 맞는 사람과 결혼해 가족을 구성하는 일.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평범하게 생각하는 행복일 겁니다. 그들이 그런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잊어버린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가'란 문제입니다.

그 물음에 대해 제가 제대로 된 답을 드리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방금 전 말씀드린 '좋은 대학'부터 시작되는 행복 방정식은 이제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그 방정식에 계속 집착한다면, 애초에 그 식을 세울 수 없는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마는 패턴이 무한 반복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방정식을 바꿔야 합니다. '1000만 엔의 소득을 가진 사람이 500만 엔의 소득을 가진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부등호를 지우고, 사람들과의 연대로부터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매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행복 방정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진정한 가치 전환을 이루지 못하면 이 고통스런 질문은 계속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곳 한반도는 20세기 내내 식민 피지배, 내전, 분단, 독재, 쿠데타, 민주화, 개발, 발전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이 과정 중에 많은 걸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말 많은 걸 잃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이 되며 행복도 증대되었다는 의식에 도취된 지금, 멈춰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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