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의 우익 쪽 청년 운동 중에 이례적으로 교육과 훈련에 노력을 치중한 단체가 있었다. 광복군 지도자 출신의 이범석이 이끈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었다. 이 단체는 불과 2년 남짓 존재했지만 대한민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족청 해산 후 30여 년이 지난 때까지도 어느 정치인의 위상이 부각될 때 나이든 분들이 "그 사람 족청계야" 하는 말을 들었다. 해방 공간의 우익 청년 단체로서 예외적으로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후지이 다케시의 이 책은 족청에 관한 사실과 의견을 잘 정리한 것이다. 이제 책 내용에 대한 서평으로 들어가는데, 반쪽 리뷰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1953년 족청계의 몰락까지 '해방 8년'을 고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데, 그 기간은 해방에서 건국까지의 3년, 건국에서 전쟁 발발까지의 2년, 그리고 전쟁기 3년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내 '해방 일기' 작업은 제1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제2기의 윤곽도 대충 파악하고 있지만 제3기에 대해서는 아직 확고한 시각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5개 부 중 제3기를 다룬 제4~5부 내용에 관해서는 지금 별로 할 말이 없고, 혹 나중에 다시 한 차례 리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승만과 함께 파시즘으로 간 족청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후지이 다케시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
족청은 출범 후 2년 동안 100만 명이 넘는 단원을 확보했는데, 이것은 당시 이남의 조직 운동 가운데 비교할 데가 없는 큰 성공이었다. 비교할 만한 것이라면 이북의 북로당뿐인데, 그에 비해서도 양적·질적으로 더 큰 성공이었다. 질적인 성공이라 함은 단원 가입이 단순한 의사 표시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최소한의 훈련 과정을 거침으로써 확보되는 강한 조직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성공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미군정의 방대한 물적 지원은 하나의 필요조건이었을 뿐이다. 그 정도 물적 기반은 북로당은 물론이고 이남의 다른 우익 단체들도 누릴 수 있던 것이었다. 족청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반대하는 중간 노선에 있었다.
해방 조선은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게 분할 점령되어 있었고 두 나라는 조선에 자기네 체제를 따르는 국가가 세워지기 바랐다. 그리고 조선인 중에는 두 나라의 의도에 각각 호응하고자 하는 자본가 집단과 공산주의자 집단이 있었다.
일반 조선인에 비해 민족주의 성향이 약한 이 두 집단이 극우와 극좌 노선으로 조선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앞세우며 어느 쪽 계급 지배도 반대하는 족청 노선은 '제3의 길'로 대중과 지식층의 큰 환영을 받았다. 장준하가 김구 비서직을 그만두고 족청 간부직을 맡은 일, 민족주의자 정인보가 족청을 지지한 일 등에서 알아볼 수 있다.
족청의 중간 노선은 미군정의 지원을 끌어들이는 조건이기도 했다. 미군정은 조선 진주 이래 자본가 집단을 대표하여 친미·반공을 표방하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승만 세력과 결탁해서 그 힘을 키워줬다. 그런데 1946년 여름이 될 무렵에는 조선의 일반 민의와 유리된 존재인 이 '극우' 세력이 미군정의 성공적 임무 수행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도 우파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좌우 합작 지원에 나서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의 족청 지원 시작도 '진정한 보수' 세력을 키워 기존의 극우 세력을 견제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미군정이 족청의 과잉 민족주의와 이범석의 파시스트 성향에 다소의 의구심을 가졌던 사실을 후지이 다케시는 밝혔는데, 그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족청을 계속 지원한 이유는 족청이 기존 극우 세력과 다른 독자 노선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보다 반탁 운동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저자의 시각이 불만스럽게 보이는 대목이 있다. 이범석의 1947년 3월 발언을 157~158쪽에 인용해 놓은 데 대한 해석이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양군 사령관의 왕복 서한이 발표된 이래 조국의 현실은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소위 신탁 통치는 경술합방의 운명을 되풀이하는 것이니 죽어도 받을 수 없다고 5호 성명에 서명한 것까지 취소하는 일파, 나는 이들 우리의 존경하는 선배와 동지를 가르쳐서 지사파(志士派)라고 부르려 합니다. 지사파가 있는가 하면, 막부 삼상 결정은 우리의 독립을 전취하는 유일한 노선이니 절대로 지지하여야 된다는 일파, 나는 이들 우리의 존경하는 선배와 동지를 가르쳐서 추수파(追隨派)라고 부르려 합니다."
이 발언의 의미를 저자는 이렇게 해석했다(158~159쪽).
똑같이 "우리의 존경하는 선배와 동지"라고 표현하고는 있지만 '지사파'와 '추수파'라고 명명한 것만 봐도 이 시기에 이범석이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움직임에 반대했음은 분명하다. (…) 이것은 김구를 중심으로 우익 진영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었는데, 이범석 역시 이런 움직임을 지지했던 셈이다. 미소공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같은 글에 나오는 연합국에 대한 불신의 표명으로 이어진다.
"조선을 해방시키고 독립시키는 것이 조선인에게 유리한 것보다도 연합국 자체에 유리한 까닭에 이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나의 말이 국제 예의에 벗어날는지 모르나, 연합국 자체에 유리하다는 것보다 유해한 점이 있다고 하면 절대로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수수께끼로 생각하는 소위 '얄타 협정'이라는 것이 어떠한 내용을 가졌는지, 우리의 조국의 허리를 두 동강이를 낸 삼팔선이라는 것이 저들 연합국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조선인의 이해는 무시하여도 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사파'라는 표현이 호의와 공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후지이 다케시는 해석했다. 나는 이와 다르게 해석한다. '지사파'와 '추수파'에 대한 서술을 똑같은 틀에 맞춰서 한 것은 양쪽에 똑같이 거리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추수파'가 현실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경향의 표현이라면 '지사파'는 현실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경향의 표현이다. 뒤쪽 인용 내용도 연합국의 태도를 현실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지, 연합국 적대나 미소공위 반대의 뜻이 아니다.
실제로 족청은 미소공위에 반대하는 반탁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1947년 6월 23일 반탁 시위에 반탁 세력은 최대한 동원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도 족청은 호응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와 미군정 당국은 1947년 6월까지는 미소공위 성공을 바라고 있었다. 겉으로만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미소공위 미국 대표단이 진짜 열심히 일했다. 특히 6월 11일 로드맵을 내놓을 때까지 강행군은 대단했다. 미국 측이 바란 '성공'이 자기네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내용이어서 결과적으로 미소공위의 좌초를 가져온 것일 수는 있지만, 그 유리한 결과를 다른 경로 아닌 미소공위를 통해 얻고자 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군정이 초기에 밀착 관계를 맺었던 기존 극우 세력의 견제 필요를 이 무렵에 느끼기 시작한 직접적 이유가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반탁 운동에 있었다. 반탁 운동에 동원되는 우익 단체들의 치안에 대한 위협도 큰 골칫거리였다. 그런 판국에 대중에게 인기 있으면서도 반탁 운동에 동조하지 않고 치안에도 위협을 주지 않는 민족주의 단체의 발전은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반가운 것이었다.
족청 성공의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중국 국민당에서 고도로 발전시킨 교육·훈련·조직 방법의 도입이었다. 장개석은 소련 공산당의 청년 조직 방법을 모델로 이 방법을 개발한 것이었는데, 이범석이 족청에 도입한 조직 방법은 조선의 공산당-북로당-남로당에서 시행하고 있던 것보다도 완성도가 높았다. 많은 좌익 출신 청년들을 족청이 끌어들인 것도 이 조직 방법의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간파 정치 노선을 대표한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신민주주의도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 좌우익의 화해와 협력을 제창했다는 점에서 이념에 있어서는 족청의 중간 노선과 같은 틀이었다. 정인보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좌우 합작과 족청을 모두 지지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간파와 족청 사이에 큰 접점이 만들어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념의 차이 이전에 행태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 같다. 이범석은 족청에 '과잉 민족주의'와 '군사화'라는 파시즘 요소를 도입했다. 그리고 족청의 민족주의는 배타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반대 방향이었다. '힘'을 숭상하는 이런 성향 때문에 족청은 폐쇄적 단결력을 갖고, 이념을 공유하는 상대와의 연대보다는 이념을 달리하는 상대와의 제휴를 추구하는 성질을 가졌다. 건국 전후 이승만과의 제휴가 그 결과였다.
1946~1948년의 2년간 남조선의 유동적 상황 속에서 이것에도 반대하고 저것에도 반대하면서 우리 '힘'을 키우고 보자는 족청의 파시스트적 호소가 큰 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분단 건국으로 체제가 굳어지는 단계에서는 그런 기회주의적 태도가 용납되는 공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단계에서 족청과 이범석이 힘을 지키고 키울 수 있는 길은 이승만이 주도하는 국가 체제에 영합하는 것뿐이었다. 일민주의가 그 결과였다.
일민주의는 족청에 단편적으로 도입된 파시즘 요소들이 합쳐져 파시즘 체제를 완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파시즘의 기본 요소로 '과잉 민족주의', '군사화', '지도자 숭배'의 세 가지가 꼽힌다. 이승만 숭배가 족청 파시즘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된 것이다.
이범석이 추구한 이승만과의 관계가 한국판 파시즘의 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범석은 자신과 이승만의 관계를 장개석과 손문의 관계와 닮은꼴로 만들고 싶어 했다. 장개석은 손문과 삼민주의를 숭배의 대상으로 떠받들면서 자신은 그 실천을 위해 조직과 군대를 장악하는 역할로 내세웠다. 안호상, 양우정 등 족청계 이데올로그들이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만들어줌으로써 장개석이 손문과 삼민주의를 팔아먹은 것처럼 이범석이 이승만과 일민주의를 팔아먹는 길을 만든 것이었다(이승만이 그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겠지). 이승만 정부의 초대 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된 이범석은 총리직보다 국방부 장관직에 더 정성을 쏟았다.
일본인이 쓴 한국 현대사의 비밀
후지이 다케시가 1945~1953년의 기간을 '해방 8년'이라 하여 종래의 일반적 시각보다 큰 유동성을 가진 상황으로 보는 것은 훌륭한 제안이다. 그런 시각으로 볼 때 이 기간의 사건들로부터 더 많은 의미를 도출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족청의 존재와 활동 양상은 이 유동성을 제일 분명히 보여주는 측면이 틀림없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이런 신선한 제안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의 적어도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사회에서 자라는 동안 저자는 같은 또래 한국인들에 비해 파시즘의 의미를 생각할 기회를 많이 가졌을 것이다. 나 자신 '해방 일기' 작업 중 파시스트 요소로 보이는 것에 마주치면 마음속으로 가새표(×) 치고 그냥 지나쳐버리기 쉽다. 이 책을 본 덕분에 더 깊이 따지고 들 대목이 많아졌다.
이웃의 참여가 반갑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양반>(노영구 옮김, 강 펴냄) 등 업적을 낸 미야지마 히로시도 생각난다(마침 최근에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너머북스 펴냄)도 나왔다). 그런데 과연 한국 학자들 중에 이들과 비교할 만한 수준으로 일본 학계에 공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강상중, 서경식 등 재일 동포 학자들은 있지만, 한국 학계에 속해 있으면서 일본 학계에 뚜렷한 공헌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딱한 일이다. 한국 사회가 일본을 이해할 필요가 반대편 필요보다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사회 입장에서 일본을 이해하려는 투철한 노력이 있다면 그 성과는 일본 사회 자체의 일본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학계에 대한 한국 학계의 공헌이 적다는 것은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한국 사회의 노력이 부족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깊이 반성할 일이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브루스 커밍스의 공헌도 비슷한 맥락에서 음미할 점이 있다. <한국 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펴냄)에서 그는 파시즘을 크게 중요시하지는 않았지만 해방 공간과 초기 대한민국의 파시즘 요소들에 대한 그의 설명에는 한국에서 성장하고 공부한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것이 많다. 공부만이 아니라 성장까지 다른 환경에서 한 사람들의 시각이 인문학에서 큰 도움이 된다. 단일 민족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인에게 히틀러가 활용한 것과 같은 과잉 민족주의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 하는 지적은 이웃사람이라야 쉽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파시즘의 유혹에 빠지다
이승만 정권에 접속된 파시즘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에 기대어 명맥을 유지해 왔다. '힘의 욕망'을 바탕으로 하는 이광수의 '친일 내셔널리즘'과(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책세상 펴냄))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는 신채호의 '민족사관'은 거리가 먼 것이 아니었다. '아'를 민족으로 보느냐 국가로 보느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이승만 이후에도 파시즘 요소는 정치 상황이 필요로 할 때마다 불려나왔다. '한국적 민주주의'도 '주체사상'도 파시즘 측면을 빼놓고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다.
2013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상황인가. 민생을 내세우며 정치를 불신하는 풍조는 파시즘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런 분위기 속에 "백퍼센트 대한민국"을 외치는 '대통합' 구호가 떠돌고 있다. 다섯 명 가족도 아니고 오십 명 직장도 아닌 오천만 대한민국의 백퍼센트 통합이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 파시즘이라면.
'통합'의 퍼센티지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분자를 키울 생각을 흔히 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분모를 줄이는 것이다. 군국주의 시대 일본에서 '히고쿠민(非國民)'을 만든 것이 바로 그 목적이다. '비국민'을 제외한 '국민'이라면 백퍼센트 통합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에는 '빨갱이' 등속을 '비국민'으로 보는 은근한 전통이 있어 왔다. 이 은근한 전통에 약간의 정치적 노력이 가미되면 상당한 범위의 사람들을 확실한 '비국민'으로 제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천안함'이다. 그 사태에 대한 정부 발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능동적으로 '확신'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헌법재판관 취임의 결격 사유가 되는 그런 나라에 '국민' 자격 부족한 사람이 넘쳐나지 않을 수 없다. 집권 세력이 약간의 노력만 기울이면 48퍼센트 중 절반을 '비국민' 만들고 나머지 절반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비리 백화점'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를 "별 문제 없다"고 감싸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비국민'으로 배제해 나가면 '백퍼센트 대한민국'은 멀지 않았다. 공약 이행을 위한 증세 정책도 그 길로 나간다면 저항을 물리칠 수 있다.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들이 그 길을 여는 데 앞장서 줄 것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을 가려면 어떤 함정이 그 길에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파시즘의 역사를 보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결국 더 큰 구조적 문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 파시즘이었다.
한국 현대사 속의 파시스트 운동을 부각시킨 후지이 다케시의 책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적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만이 아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 진영을 파시스트 세력으로 규정한 이래 파시즘이라면 "그저 나쁜 것"으로만 여기고 더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 전 세계적 풍조가 있어 왔다. 조지 오웰은 1944년에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파시즘'이란 말은 거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 영국인 대다수는 '파시스트'를 '깡패'의 동의어쯤으로 여기고 있다."
파시스트 세력의 패배 덕분에 해방을 맞은 한국인에게도 파시즘은 "그저 나쁜 것"일 뿐이다. 미치광이나 하는 짓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파시즘이란 게 그렇게 우스운 것이 아니다. 매우 강한 힘과 매력을 가진 정치 운동이다. 물론 파시즘이 나쁜 것이라는 통념이 있으니까 이름을 내걸지 않고 은밀하게 운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중 이례적으로 본모습을 거의 그대로 드러낸 사례가 이 책에서 다룬 족청 운동과 소위 '족청계'가 주도한 일민주의였다.
정치 노선의 '좌우'를 구분하는 이념 기준으로는 파시즘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다. 흔히 파시즘을 극우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행태를 기준으로 한 인식이다. 파시즘은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자본가의 지배를 주장하는 자본주의에도 노동자의 지배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에도 반대하는 '제3의 길'을 자처한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 초기에 무솔리니는 "우익의 반동성과 좌익의 파괴성"을 모두 배척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의 팔랑헤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비슷한 뜻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우익은 경제 체제의 유지를 주장하는데 그 체제는 정의롭지 못한 것이고, 좌익은 경제 체제의 전복을 획책하는데, 전복의 결과로 가치 있는 많은 것들이 파괴된다."
이념적 중간 노선은 양쪽 극단에 비해 합리적인 길이 되기 쉽다. 그런데 합리적인 길은 현실정치에서 강한 힘을 얻기 힘들다. 설령 지지자의 머리수가 많다 하더라도 극단 노선 지지자의 열성에 비해 지지 방법이 합리적인(즉 미온적인) 수준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중간 노선의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극단적 행태를 개발한 것이다. 그래서 파시즘의 실체는 이념보다 행태를 통해 규정된다. 이념은 혁명적인 것이 아닌데(즉 합리적인 것인데) 행태는 혁명적인(즉 비합리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파시즘의 혁명적 행태에 동원되는 소재는 여러 가지다. 과잉 민족주의(ultra-nationalism)가 가장 보편적 소재다. 여기에 테러 정치와 전쟁 등 폭력적 요소 그리고 지도자 숭배라는 유사 종교적 요소가 첨가된다. 모든 요소의 공통 분모는 '폭력성'이다. 대중을 이보다 더 쉽게 열광시키는 요소가 무엇이겠는가. 파시스트를 깡패의 동의어로 보는 오웰이 지적한 풍조도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다.
파시즘이 태동하던 제국주의 시대에 인류의 갈등은(사실에 있어서는 열강들의 갈등)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에 집약되어 있었다. 1920~30년대 파시즘은 계급 모순을 덮어버리기 위해 민족 모순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같은 민족(또는 국가) 내의 계급 간 투쟁을 민족의 번영을 위한 공동 노력이라는 명분으로 봉쇄한 것이다.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정치사상이라기보다 정치 현상이다. 그 중심 명제가 거의 언제나 반(反) 자유주의, 반 공산주의, 반 보수주의 등 안티테제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서 알 수 있듯 주어진 상황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기되는 것이지, 내적 정합성(integrity)을 갖춘 체계적 사상이 못 된다. 파시즘이 공산 혁명의 파괴성을 비판하지만, 내적 정합성과 그에 입각한 지속가능성을 갖지 못한 파시스트 혁명은 그보다도 더 파괴적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 세력이 영도한 추축국 진영의 패배는 연합국의 승리 이전에 파시즘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파시즘의 이론적 정합성에 대한 커밍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2013년의 한국 상황은 과거 파시즘의 발흥을 보았던 여러 사회와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국정 담당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파시즘의 유혹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운용과 언론-표현의 자유 억압은 어느 파시즘 국가에도 손색없는 수준에 이미 도달해 있다. '박정희 숭배'만 얹어놓으면 파시즘 체제는 완성된다. 파시즘 체제가 세워지면 지금 눈에 보이는 많은 문제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파시즘을 끌어안으려면 퇴로를 먼저 살펴야 한다. 물러설 길이 없다는 것이 파시즘의 궁극적 문제다. 무솔리니도 히틀러도 이승만도 퇴로가 없기 때문에 참혹한 결과를 맞았다. 박정희도 민정 이양의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호랑이 등에서 1979년까지 내려오지 못했다. 파시즘의 유혹이 유혹으로 끝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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