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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도중 난도질! 죽은 여인의 비밀 53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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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도중 난도질! 죽은 여인의 비밀 53년 만에…

[김용언의 '잠 도둑'] 스티븐 레벨로의 <히치콕과 사이코>

어쩌면 이 글은 매우 불친절한 부록 정도가 될 것이다. 스티븐 레벨로의 논픽션 <히치콕과 사이코>(이영아 옮김, 북폴리오 펴냄)를 읽기 위해서는 로버트 블록의 소설 <사이코>

(정태원 옮김, 다시 펴냄)와 앨프리트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를 모두 접한 뒤가 가장 좋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지/보지 않고서도 이 책을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어요!"라고 떠들어댈 생각은 전혀 없다. 블록의 소설이 어떻게 히치콕의 영화 언어로 옮겨졌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영화 기술적 언어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히치콕과 사이코>의 절반 정도는 매우 지루한 영화 전공 교과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물며 그 책에 대해 압축적으로 소개해야 하는 이 원고는 더 가혹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조건만으로 줄여본다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대표작들을 어느 정도 챙겨 보았고, 그가 얼마나 위대한 감독인지에 대한 어렴풋하게나마 상이 있고, <사이코>의 모든 쇼트들이 단 하나도 빼거나 더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에게라면 <히치콕과 사이코>는 분명 사랑스러운 선물이다.

감독이자 평론가이자 무엇보다 엄청난 영화광이었던 프랑수아 트뤼포가 히치콕과 나눈 기나긴 인터뷰집 <히치콕과의 대화>(곽한주‧이채훈 옮김, 한나래 펴냄)를 인상적으로 읽었던 이라면, <사이코>라는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세부적인 디테일들을 한층 더 클로즈업한 <히치콕과 사이코>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이를테면 <히치콕과 사이코>는 마이클 코넬리,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등의 베스트셀러 범죄소설 작가들이 자신들의 주요 캐릭터를 어떻게 창조했는지 토로하는 글을 오토 펜즐러가 엮은 <라인업>(박산호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는 셈이다.


▲ <히치콕과 사이코>(스티븐 레벨로 지음, 이영아 옮김, 북폴리오 펴냄). ⓒ북폴리오

1957년 11월 말, 미국 위스콘신 주의 궁핍한 시골 마을은 느닷없이 전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 구역으로 조명된다. 그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던 좀 이상한 남자 에드 긴이 "미국 역사상 가장 소름 끼치는 연쇄 살인마"로서 체포된 것이다. 그의 집에는 "한 줄에 꿰어져 있는 인간의 입술 두 쌍, 식탁 위 컵에 한가득 들어 있는 인간의 코들, 인간의 피부로 만든 지갑과 팔찌, 피부를 씌운 의자 네 개, (…) 안구를 파낸 뒤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을 해서 벽의 눈높이에 압핀으로 박아놓은 네 여인의 얼굴 가죽, (…) 다리 피부로 만들어 둘둘 말아 놓은 레깅스 한 벌" 등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부분들을 분해'해서 '작동 원리'를 보고 싶었다"는 게 에드 긴의 해명이었다.

괜찮은 범죄소설 작가로 조금씩 이름을 알려나가던 로버트 블록은 지역 신문에서 에드 긴에 대한 짤막한 기사를 읽었다. "1950년대는 미스터리 소설은 고사하고 신문에서도 그런 일을 언급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기사들은 에드 긴의 상상을 초월하는 행각들에 대해 많은 부분 생략하고 에둘러 피해갔다. 블록이 알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한 남자가 철물점 여주인을 죽인 뒤 사슴처럼 가죽을 벗겨 농장에 걸어 뒀다가 체포됐다는 사실"이었고 "범인이 그 전에도 범행을 저지르고 무덤까지 도굴했을 거라는 의혹을 품게 하는 '어떤 증거'가 발견됐다는" 정도뿐이었다. 이 짤막한 정보에 매혹된 블록은 이 사건과 범인의 심리적 동기를 직접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6주 만에 <사이코>의 초고가 완성됐고, 1959년에 이르기까지 블록의 소설은 상당한 호평과 함께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에 맞춰 <사이코>의 잊을 수 없는 주인공 노먼 베이츠의 정신 세계를 만들어낸 블록은, 뒤늦게 실제 에드 긴의 범죄 행각이 노먼 베이츠와 아주 비슷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블록은 아침에 면도를 하기 위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몸서리쳤다. "소설 속 인물을 만들면서 에드 긴의 실제 인격에 아주 가깝게 가 버린 거죠. 내가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는지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후로 2년간은 눈을 감은 채 면도를 했어요.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에드 긴은 블록의 <사이코>뿐 아니라 슬래셔 영화의 대표작 <텍사스 전기톱 학살>과 토머스 해리스의 소설 <양들의 침묵>, 그리고 그것을 영화화한 조너선 드미 감독의 동명 영화 등에도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1959년 4월, 앨프리드 히치콕이 <사이코>의 판권을 구입했다. <이창>, <현기증>, <오명>,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레베카> 등으로 그 누구에게든지 터치받지 않을 수 있는(적어도 그렇게 보였던) 반열에 오른 서스펜스의 거장이 <사이코>에 눈독을 들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미 '히치콕 스타일'이라고 명명된 어떤 서스펜스의 리듬이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다소 유감스러운 듯 이렇게 표현했다. "만약 내가 <신데렐라>를 만든다면, 관객들은 소파에서 시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자신에 대한 관객과 평론가들의 기대치를 단숨에 뛰어넘거나 배반할 수 있는 아주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사이코>가, 즉 "전형적으로 비히치콕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소재가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히치콕은 다소 오만한 코멘트를 덧붙였다.

"여주인공이 샤워하다가 느닷없이 살해당하는 대목을 읽고는 영화로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요."

이에 더해 히치콕이 암암리에 경쟁심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 영화감독 앙리 클루조의 영화 <디아볼릭>도 은근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히치콕은 <디아볼릭>의 원작 소설 <악마 같은 여자>(토마 나르스작‧피에르 부알로 지음, 양원달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을 무척 탐냈지만, 간발의 차로 클루조에게 빼앗겼다. 클루조의 <디아볼릭>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히치콕이 부알로와 나르스작의 다른 소설을 각색했던 <현기증>은 대부분 혹평을 받았다(지금에 와서 <현기증>이 얼마만한 찬사의 대상으로 숭배받는지를 돌이켜보면 글쎄, 당시 평론가들의 눈은 대체 어디 달려 있었는지 정말 궁금해진다).

아마 이 점 역시, <디아볼릭>처럼 등장인물 수가 적고 빈곤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배경과 인간의 이상심리를 주된 플롯으로 삼은 채 흑백영화의 차가운 톤으로 진행되는 영화 <사이코>를 만들게 된 또 다른 동력이었을 것이다.

히치콕은 당시 영화사 패러마운트와 전속 계약 5편을 찍는 계약을 맺은 상태였고, 이제 그 마지막 편으로 <사이코>를 찍겠다고 선언했다. 경영진들은 뒷목을 잡았다. 이런 추잡한 내용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감히 우리 돈을 이런 영화에 투자하라는 건가? 로버트 블록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패러마운트는 그 소설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제목도 줄거리도 전부 다 마음에 안 든다고 말입니다. (…) 영화사 측에서는 '그런 영화를 찍겠다면 지금까지와 같은 제작비를 줄 수 없다'고 했어요."

감독으로서뿐만 아니라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대단했던 히치콕은 제작사의 난리법석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자비로 영화를 찍을 테니 대신 배급만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고 결국 계약은 성사되었다. 그는 유능한 텔레비전 스탭들을 주로 기용한 소규모 제작 팀을 꾸렸고, 극도로 정밀한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에 맞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촬영을 마치는 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 <싸이코>의 팬들이라면 가장 궁금해할 그 유명한 '샤워 살해 신'이 이 책의 핵심이다. 여성의 누드를 보여주는 것 자체, 그리고 칼이 직접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장면의 클로즈업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에 샤워 도중 살해당하는 장면을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 이것을 어떻게 촬영할 것인가? 이 장면의 스토리보드를 처음 그렸던 그래픽 디자이너 솔 바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그 시퀀스는 몸짓은 많지만 활동은 거의 없는 연속적인 이미지들의 반복입니다. 그 시퀀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한 여자가 샤워를 하다가 칼에 찔리고, 천천히 욕조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밖에 없어요. '그녀가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한다, 샤워를 한다. 칼에 찔리고, 찔리고, 찔리고, 찔리고, 찔린다. 그녀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미끄러진다. 찔린다, 찔린다, 찔린다. 미끄러진다. 미끄러진다. 미끄러진다.'"


▲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 ⓒUniversal Pictures


3분이 채 안 되는 그 살해 장면에서 무려 77번의 다른 앵글이 담긴다.(이 영화의 촬영 기간은 82일이었고, 이 샤워 신을 찍는 데에만 11일이 걸렸다). 지금과 같은 촬영 도구들이 존재하지 않은 시대에, 그리고 여주인공의 몸을 보여줄 수 있는 '위치'가 극도로 제한된 시대에, 놀랍게도 칼이 몸에 한 번도 닿지 않으면서도 그 장면의 쇼크를 전달하기까지의 히치콕의 머릿속 계산은 다수의 증언에 의해 생생하게 부활한다. 물론 그 장면들을 영원불멸의 이미지로 만든 것은 히치콕의 연출만큼이나 음악가 버나드 허먼의 "사람들의 신경 말단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흑백의 음악, 첼로와 바이올린의 걸작"도 한 몫 했음도 당연히 지적해야 한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디테일들이 <사이코>의 팬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 잘 놀라고 잘 속아 넘어가고 잘 웃는 배우 재닛 리(영화 시작 47분 만에 샤워하다 살해당하는 메리언 역)를 골탕먹이려고 히치콕이 촬영장에서 부렸던 귀여운 술수들, 히치콕이 배우들에게 엄한 감독이라는 악명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물쭈물 소심하게 캐릭터 분석을 피력했던 진지한 배우 앤소니 퍼킨스(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 중 한 명인 노먼 베이츠 역)가 '사탕을 불안하게 우물거리는' 장면을 스스로 만들어냈는지 등은 여타의 영화사 책에서 보지 못한 증언들이다. 또 이런 팩트는 어떤가? 메리언이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칼에 푹푹 찔리는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소품 담당자가 수박, 머스크멜론, 칸탈루프멜론, 감로멜론 등을 구해왔고 히치콕은 눈을 감고 앉아 그 소리를 듣다가 "눈을 뜨고 나지막이 한 마디 했다. '머스크멜론.'"

1960년, "미국의 경기가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던" 그해 여름에 개봉한 <사이코>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탁월한 사업가의 감각을 가지고 있던 히치콕조차도 당혹스러워할 만큼 관객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렇게 관객의 감정을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감독이 이전에는 없었다. 히치콕이 어떤 괴물을 만들어 냈는지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들은 미국의 대중이었다. '<사이코>를 에워싼 공기에는 불안감이 짙게 배어있다."

영화 <사이코>는 지금까지 (히치콕 자신이 큰 몫을 담당했던) 범죄영화의 방향을 크게 바꿔놓았고, 미국 대중문화의 흐름의 물길도 틀어놓았으며, 무엇보다 히치콕 자신의 말년 영화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작은 소규모 영화가, 처음에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프로젝트로 시작한 이 영화가 이토록 불길하고 끔찍하며 동시에 웃기기까지 한 걸작으로 영원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스티븐 레벨로의 <히치콕과 사이코>가 불만스러워지는 대목은 여기부터다. '<사이코> 그 이후'를 설명하는데 있어, 레벨로의 설명은 상당히 편파적이다. 겉으로는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러나 몇 년 뒤에 닥쳐올 '혁명'의 시기를 분명 배태하고 있었을 그 시기에 <사이코>가 어떤 면에서 그 불안함을 꿰뚫었던 것인지, 혹은 대중들도 미처 모르고 있던 불안감을 <사이코>를 통해 어떻게 해소한 건지에 대한 해설은 부재한다.

레벨로는 <사이코>의 어마어마한 성공에 히치콕 자신도 짓눌렸다고 강조하지만 그 이후 <새>, <마니>, <프렌지> 등의 말기작들이 모두 별 볼일 없다는 식으로 평가절하하는 데에는 정확히 어떤 근거가 있는 건지도 모호하다. 다만 몇몇 평론가들의 혹평을 빌어 '히치콕이 오락영화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예술가로 인정받으려 애썼다'는 뉘앙스의 비판을 가할 뿐이다. 히치콕의 말기작들이 <사이코> 이전 영화들에 비해 훨씬 '불친절'하다면, 그것이 '못 만들었다'의 기준이 되기보다는 <사이코> 이전의 히치콕과 <사이코> 이후의 히치콕이 영화 만들기의 비중을 어디에 더 두었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스티븐 레벨로가 영화학자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으나, 기왕지사 그가 <사이코> 전후로 얽힌 히치콕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정도의 공은 더 들일 수 있었을까 싶은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히치콕에 대한 '흥미로운 책'의 목록 중 한 권은 될 수 있을지언정, 책 제목대로 '히치콕과 <사이코>'에 대한 '단 한 권의 책'으로 꼽기에는 주저하게 되는 이유다.

참고로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 <히치콕>은 작년 12월 미국에서 개봉했다. 앤소니 홉킨스가 앨프리드 히치콕을, 헬렌 미렌이 남편의 영원한 조력자였던 앨마 히치콕을, 스칼렛 요한슨이 재닛 리/메리언을, 제임스 다시가 앤소니 퍼킨스/노먼 베이츠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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