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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개불알꽃이 일깨운 교훈,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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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개불알꽃이 일깨운 교훈, 존중!

[꽃산행 꽃글] 백두산 가는 길 ②

이튿날. 버스는 어느 고개에 섰다. 오늘은 하루 종일 아예 개불알꽃을 위주로 관찰하는 날이다. 도로에서 그리 높은 곳이 아니었지만 이곳 자체가 우리나라에 비하면 해발 고도가 아주 높다. 땀 흘리며 그리 높은 곳에 오르지 않아도 개불알꽃 무더기가 곳곳에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나는 아직 그 경지를 잘 모른다. 뒤늦게 꽃의 세계로 입장한 터라 아직은 그저 전문가들의 뒤를 쫓기에 급급한 형편이다. 동행한 식물 애호가들은 어찌 내 평생에 이런 꽃을 이렇게 보겠느냐며 감격해했다. 그런 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행 중에는 스웨덴에서 오신 분이 있었다. 백두산 꽃을 탐방하기 위하여 그 먼길을 달려 온 것이다. 이민 간 지 30여 년. 환갑을 훌쩍 넘긴 그분의 한 마디.

"시댁이 경주 근처였지요. 어느 해 명절인가. 산소에 가던 길이었던가. 변산바람꽃을 보았지요. 그 작은 꽃안에서 수술을 보았는데, 난 그만 황홀해졌어요. 시쳇말로 뻑 가고 말았지요. 그 이후 내 인생도 꽃속으로 푹 빠져버렸네요!"

개불알꽃은 꽃 모양이 독특하다. 정말 개의 불알 같은 꽃잎을 달고 있다. 색깔도 여러 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두 송이 보기도 어려운데 이곳에서는 예사로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변이가 심해 꽃의 색깔은 저마다 서로 달랐다. 개불알꽃은 곱고 고운 방석처럼 무리지어 앉아 있었다.

▲ 개불알꽃. ⓒ이굴기

▲ 털개불알꽃. ⓒ이굴기

▲ 노랑개불알꽃. ⓒ이굴기

간간이 홀로 피어 있는 진홍의 꽃들도 있었다. 그건 개불알꽃과는 조금 다른 털개불알꽃이었다. 이름대로 과연 꽃대와 잎에 잔잔한 털이 밀생하고 있었다. 드물게 무리지어 있는 것도 있었다. 노란 꽃잎의 노랑개불알꽃도 여기저기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참 보기 힘든 개불알꽃. 여기에도 개불알꽃, 저기에도 개불알꽃, 그리고 또 저기에는 털개불알꽃, 노랑개불알꽃. 그 꽃들의 사이를 메우면서 꽃고비, 털쥐손이, 큰솔나리, 애기원추리, 층층둥굴레가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어서 모두 귀한 대접을 받는 꽃들이다.

▲ 꽃고비. ⓒ이굴기

▲ 털쥐손이. ⓒ이굴기

▲ 큰솔나리. ⓒ이굴기

▲ 층츠둥굴레. ⓒ이굴기

조용한 산중에서 가만히 있던 꽃들. 그 꽃들한테 놀란 낯선 외국인들에게 꽃들도 놀란 것일까. 그리 바람이 부는 것 같지 않은데 자주 흔들리고 자태를 바꾸는 것 같았다. 카메라 셔터 터지는 소리가 연신 들리는 가운데 꽃무더기 앞 풀들의 동네가 반질반질해졌다. 많은 이들의 등산화, 팔꿈치, 허벅지, 무릎, 삼각대에 눌리고 밟히고 짓눌렀기 때문이다. 좋은 사진 건질 욕심에 쪼그리고, 엎드리고, 눈알을 긴장시키고, 숨을 멈추고, 숨이 꼴깍 넘어가기가 여러 차례. 허기가 일찍 찾아왔다.

모두들 점심 먹으러 근처 조그만 도시를 찾아들었다. 식당은 휑뎅그렁했다. 분명 점심 시간인데도 넓은 홀이 텅 비어 있었다. 수족관이 있었지만 고기는커녕 물 한 방울 없이 메말라 있었다. 대체 이곳에서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었나 싶었는데, 웬걸, 언제 주문을 하고 언제 조리를 했는지 연이어 접시들이 들이닥쳤다. 먹음직한 요리 여섯 가지가 숨 돌릴 새도 없이 목구멍 너머로 들어갔다. 빙천맥주를 들이키고 독한 백주도 몇 잔 걸쳤다.

나는 자리에서 조금 일찍 일어났다. 음식을 빨리 먹기도 했지만 한 가지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식당으로 찾아들기 전 버스에서 본 풍경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소학교 운동장과 건물이었다. 특히 스쳐 지나간 그 소학교의 교훈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옆자리 사람에게 행선지를 일러두고 거리를 혼자 나섰다. 땡볕은 아니었고 따끈한 햇살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조잡한 간판 아래로 웃통을 벗어젖힌 남자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쓰레기통을 뛰쳐나온 휴지조각도 마구 돌아다니고 검은 개들이 지저분한 골목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왕청현(汪淸縣) 천교령진(天橋嶺鎭) 소학교(小學校). 그 학교 가까이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운동장이 넓었다. 버드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가 호위하던 내 어릴 적 고향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체육 수업이 없는지 운동장에는 아이들은 없고 조용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렸으면 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좀 전에 내가 궁금히 여겼던 교훈을 찍었다. 그것은 학교 건물 벽면에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 왕청현 천교령진 소학교 전경. ⓒ이굴기

우리나라의 학교들도 저마다 지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저렇게 글씨에 담아 달아 놓는다. 그동안 여러 학교를 거쳐 왔지만 지금 내 가슴에 남아있는 단어는 없다. 너무 거창하고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길림성 왕청현에서 만난 소학교의 교훈은 다섯 개였다. 평등(平等), 존중(尊重), 민주(民主), 화해(和解), 발전(發展). 그 중에서도 특히 존중이라는 단어가 신선하고 놀라웠다.

이제 오후에도 장소를 달리 하여 개불알꽃 군락을 찾으러 간다. 맥주와 백주가 뒤섞여 더욱 나른한 몸. 그래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찌되었던 그곳에 도착하려면 좀 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곳까지는 먼 길. 이 개불알꽃들이 안내하는 길을 즐겁게 통과해 내야 한다. 그 길의 끝에 그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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