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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과연 장덕수 암살의 배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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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과연 장덕수 암살의 배후였나?

[해방일기] 1948년 1월 16일

1948년 1월 16일

장덕수 암살 관계로 수배 중이던 김석황이 사건 달포 만인 1월 16일 체포되었다.

수도청장 장 총장은 고 장덕수 살해 사건에 관하여 16일 중간 특별 발표를 하였는데 그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16일 새벽 4시 10분에 고 장덕수 살해 관련범인 김석황(54, 한독당 중앙위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 대한보국의용단장)은 광주군 중대면 오금리 민병만(47) 방에서 수도청 형사 최난수 경위에게 체포되어 방금 수도청에 인치되어 있다. 우자는 금번 장 씨 살해 사건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고 또 추측컨대 해방 전후 좌우익 요인 살해 사건에 관해서도 우자의 취조에 따라 그 암운이 일소되고 그 배후의 흑수(黑手)도 법망에 걸려 조선 정계를 명랑케 할 것같이 보인다. 경찰로서 가장 취미 있게 생각함은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일건인데 이 서한의 내용은 마치 차천자(車天子) 식이다. 이 자들의 안중에는 조국도 없고 민족도 없고 다못 일개인의 권리욕에 눈이 뒤집힌 모양으로 대개 범죄는 이와 같은 과대망상증 환자에서 많이 나는 것 같다. 이 자들을 소탕치 않으면 좌우를 막론하고 금후 유위한 조선 요인들이 많이 살해될 것이므로 경찰은 이들의 소탕을 목표로 전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자료 대한민국사>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48년 1월 17일"로 표시된 기사인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로 확인되는 <동아일보>, <경향신문> 동일자 기사는 이와 대략 같은 내용이지만 똑같지는 않다.)

장택상의 담화문은 비서나 직원을 시키지 않고 손수 작성한 것이 많은 것 같다. 치졸한 속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이 발표도 그렇다. 김석황 "배후의 흑수"라는 것이 김구를 겨냥한 말 같은데, 이제 김석황을 체포해 김구를 걸고 들어갈 빌미를 잡게 되었다고 신이 난 것이다. 장택상이 김구와 김석황 등 임정 인사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딸들이 쓴 그의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 장택상 기념 사업회 펴냄) 120~122쪽 "임정 인사의 고자세"에 드러나 있다. 임정 환국 직후 한민당 인사들이 죽첨장으로 김구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의 일이다.

국내 정치인의 대표로 고 송진우-김성수 씨를 위시하여 고 조병옥-백관수-김준연-허정 씨 등과 나까지 6인이 이분들을 만나려고 최창학 씨 집으로 찾아갔다. 그 날 날씨는 영하 15~16도나 되는 몹시 추운 날씨였다. (…) 우리는 추운 날씨에 장구한 시간을 섰기도 어렵고 하여 할 수 없이 문 밖 맨땅 위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 약 1시간 반 후에 이 자가 나타나더니 "주석이 바쁘시니 더 기다리라"고 명령하다시피 말하고는 그대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3시간을 추운 날씨에 맨땅 위에 그대로 앉아서 기다렸다. 6시가 좀 지나자 자칭 주석 비서격이라는 김석황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 김이 들어간 지 약 30분이 지나서야 웬 중국 옷 입은 자가 하나 나타나더니 우리들을 옥내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자를 따라서 일본식으로 된 최창학 씨 집 2층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석 김구 씨는 좌석에 앉은 채로 요지부동, 우리 여섯 사람의 큰절을 차례로 받았다.

(…) 이것이 국내에서 정치에 마음을 두었던 우리들의 임정 인사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나는 인상이 나빴다. 그리고 나의 임정 인사에 대한 그 나쁜 인상은 미군정 3년간을 통하여 일관하였다.

조금만 유의해 읽으면 화자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11월 하순에 기온이 무슨 영하 15도씩이나 내려갔겠는가. 그리고 김구가 아무리 거만하다 해서 세 시간 넘게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했겠는가. 기다릴 만한 장소가 안에도 충분히 있는 큰집인데.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했을 것이고 부득부득 우기고 버티니까 할 수 없이 만나준 것 아니겠는가. 빤한 사실을 뒤틀어서 상대방을 욕하려는 비뚤어진 심사가 눈에 훤하다.

속은 뒤틀려 있어도 장택상이 김구에게 정면으로 대들 엄두는 감히 내지 못했을 것이다. 김규식에게도 값비싼 담뱃대를 자기 집 가보라고 갖다 바치며 자기 진심을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눈물까지 글썽였다는 장택상 아닌가(<송남헌 회고록 : 김규식과 함께한 길>(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88쪽) 속으로 벼르고만 있다가 이제 미군정의 힘을 빌려 김구와 김석황을 괴롭힐 길을 찾아 환희작약하고 있는 것이다.

발표문 중에 '차천자'는 왜 나오나. 차천자는 1920년대에 성세를 떨친 보천교 교주 차경석(1880~1936년)의 별칭이다. 김석황 주머니에서 나왔다고 하는 편지가 김석황이 김구 앞으로 쓴 것이었다. 이것이 김구의 사건 연루 증거가 된다고 생각해서 득의양양한 장택상이 김구의 위세를 차천자에 비유한 것이다. 미군정 고위층은 이 편지를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었는데, 장택상은 김구의 연루 사실을 흘리기 위해 차천자를 갖다 댄 것이다. 원조 빨대다.

1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대권을 잡으시오' 모 정계 요인에게 주는 괴이한 서한도 압수"란 제목으로 이 편지 내용을 소개한 기사도 실렸는데, 편지 내용은 삭제되어 있다. 기사의 남아있는 앞부분은 이런 내용이다.

김석황은 암살 사건이 돌발하자 곧 그 종적을 감추었던바 서울 시내는 물론 남조선 전역에 걸쳐 경찰에서는 물샐 틈 없는 수사망을 펴고 있던 중 작 16일 사건 발생 45일 만에 체포된 것인데 체포 당시 지니고 있던 모 정계 요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을 보더라도 이번 사건은 그 이면에 기괴한 사실이 숨어있다는 것이 추측된다. 즉 서한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 1948년 1월 17일자 <동아일보> 2면. 가운데 위쪽으로 내용을 들어낸 부분이 보인다. ⓒdb.history.go.kr

이렇게 먹칠을 당하고도 <동아일보>는 부득부득 편지 일부를 지면에 올리고야 말았다. 1월 20일자 제2면의 40퍼센트를 점하는 큰 기사로 김석황 체포 경위를 밝히는 중에 살짝 끼워 넣은 것이다. 김구를 욕보이려는 장택상과 한민당의 의지가 합쳐진 성과다. 이 기사에는 사건 자체와 별도로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서 길지만 모두 옮겨놓는다.

▲ <동아일보> 1948년 1월 20일자. 왼족에 김석황 체포 경위에 관한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이 실려 있다. ⓒdb.history.go.kr

"고 장씨 사건 연루자 김석황 체포 경로-서제(庶弟)와의 불화가 단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 씨 암살 사건에 관련되어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 보국의용단장인 김석황이 지난 16일 새벽 광주서 체포된 사실은 이미 보도된 바이어니와 그 체포의 경로를 들으면 엽기적 흥미를 일으키는 점도 없지 아니하여 이 사건의 중대성을 더한층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김석황에게는 서제 김모가 있는데 그 불화야말로 금번 김석황 체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김석황은 황해도 출신으로 전에 광산을 경영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 운이 좋아서 30만 원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서제는 형이 졸부 된 것을 보고 물론 그저 있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 김석황은 단돈 1000원밖에 주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30만 원에서 1000원을 떼어내 주었으니 그도 물론 적지 아니한 돈이지마는 서제의 마음에는 이것이 철천의 한으로 맺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분풀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때는 왔다. 장덕수 씨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김석황은 도피하여 버렸다. 서제는 그 형 김석황을 잡기 위하여 수십 일간 경찰에 협력한 것이다. 그리하여 백방으로 그 형의 종적을 살피는 것이었다.

경찰에서는 김석황의 애첩 이숙자(가명)에게 두 명의 형사를 미행시켰는데 금월 2일에 이숙자는 경북여관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있다가 나왔다. 그래서 형사 한 사람은 종로서에 와서 다수 경관의 응원을 얻어가지고 경북여관을 포위하고 엄밀한 가택 수색을 해보았으나 하등의 수확도 없었고 객실이 7, 8이나 되는데 다만 한 사람의 장님을 발견하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형사들은 이 장님을 붙들어서 "지금 왔던 여자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더니, 장님이 말하기를 "자기 남편이 관려(官戾)가 있어서 어느 곳에 있는데 그대로 거기 있어야 좋은가, 혹 그 자리를 옮겨야 좋은가?" 하고 물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경찰에서는 이 사실을 김석황의 서제에게 보고하였더니 서제는 김석황이 서울 시내에는 있지 않다는 것을 단정하고 여러 가지로 연구한 결과 뚝섬 국방예비대 연대 내에 그 둘째 아들과 같이 있겠다고 말하였다. 김석황의 서제의 이 단정에 의하여 15일에 경찰에서는 뚝섬 국방경비대로 갔었다.

그랬으나 국방경비대에서는 경찰의 수색을 거절하고 들이지 아니하였다. 경찰에서는 수도청장 장택상 씨가 직접 나서서 미인 장교 6명과 통위부 미인 고문 프라이스 씨에게 교섭하여 통위부 소속 미인 장교 두 명과 함께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장 외 수십 명의 경관을 인솔하고 뚝섬 국방경비대 연대로 가서 무난히 가택수색을 하였으나, 김석황 부자는 흔적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다수의 미인 장교까지 출동시켜 가지고 자신 있게 나갔던 경찰의 면목은 전혀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미인 장교들은 "이런 일도 있어야 재미있지 않으냐?"고 말하여서 수도청장을 위로하는 듯 빈정대는 듯 말하였다. 수사대 일행은 허탕 짚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최난수 경위 한 사람은 남아있겠다고 고집하였었다. 그래서 형사 두 명을 남겨주고 전부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더군다나 미인 장교들까지 대동원하여 가지고 김석황을 체포하러 나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장 수도청장은 마음의 둘 곳을 아지 못하여서 전전반측하여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15일은 지나고 16일이 되었다. 새벽 세 시 반이 되었다. 전화소리가 땔~ 하고 들렸다. 수화기를 손에 잡아 드니 최난수 경위의 목소리였다. "김석황 잡았습니다!" 하였다. "어디 있느냐?" 하였더니 "광주 있습니다!" 하였다. "어찌된 일이냐?" 물었더니 "네~" 하고 대답하고 그 경로를 말하였다. 그 경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최난수 경위는 수사대 일행을 보낸 후에 국방경비대 중대장을 만났다. 그래서 말하였다. "당신도 애국자이고 나도 애국자가 아니오? 그래서 우리가 건국에 협력하기 위하여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오늘은 장덕수 씨 살해범인 김석황이가 꼭 여기 있는 줄 알고 수도청장 이하 다수 경관이 외국인 장교 여러 사람과 같이 오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런데 허탕을 잡고 가니 우리 꼴이 무엇 되었습니까. 나는 당신의 애국심에 호소합니다. 당신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어서 범인을 내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애원하였다.

그래서 중대장은 최난수 경위의 성의에 움직였다. 그래서 흥분된 어조로 대답하였다. "네, 나는 소의(少義)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살리겠소. 이리 오시오." 하고 최 경위의 손을 잡고 한 곳으로 인도하였다. 거기는 김석황의 둘째 아들이 국방경비대의 군복을 입고 불을 쪼이고 있었다. 최 경위도 본래 잘 아는 얼굴이라 감별하는 데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김석황의 이 아들에게 수갑을 질러서 동행을 요구하였다.

김석황의 큰 아들은 이 병영에 소위로 있는 터이라 그래서 연락이 되었던 모양이다. 수갑을 질려서 동행의 최촉을 받은 김석황의 아들은 말하였다. "나를 잡아갈 것이 무엇 있소. 내 아버지 있는 곳을 대리다!" 하였다. 그래서 짚차는 광주군을 향하여 밤 장막을 뚫고 질주하였다. 광주군 중대면 오금리 민병만의 집이었다. 거기서 김병만은 소대성(蘇大成)이처럼 코를 골고 꿈나라에 잠겼던 것이었다. 밤 두 시가 지난 때이었다. 그래서 김석황은 무난히 경관들에게 취박되었다.

김석황을 체포한 후에 물론 그 신체 수색이 있었다. 그 주머니 속에서 미발송의 편지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김석황은 그 편지를 장택상 경무총감에게 보내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 대권을 잡으실 때까지 소생은 유리개걸(遊離丐乞)하기로 하였습니다. 복원(伏願) 선생님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대권은 반드시 선생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명을 받으셨으니 소생은 잡힐 리가 만무합니다. 이 박사와 한민당 찬역배가 음모를 하오니 선생님은 특별히 신변을 조심하십시오. 대권이 이 박사에게 가면 인민이 도탄에 빠지고 애국자의 살상이 많이 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대권을 추호도 사양치 마시고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운운"

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면 아무리 생각하여보아도 장택상 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천자적 백백교도적 광신자들로부터 조선 민중이 해방되어야 민주주의국가의 성립이 용이하게 될 것이다.

김석황의 동생이 수십 일간 경찰에 협조하는 동안 어디에서 묵고 있었을까? 경찰서 유치장이 아니었을까? 뚝섬에서 피의자의 아들에게 수갑을 채웠다는 얘기를 보니 피의자의 동생이라 해서 더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 같지 않다.

최난수 경위의 성심어린 호소가 중대장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협조에 나서게 했다는 이야기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최난수는 노덕술과 함께 앞서 정판사 사건에서도 대활약을 했고 장차 반민특위 파괴 공작에도 앞장설 인물인데, 그가 왜 <친일 인명 사전>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지 이상하다.

1937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에 그가 군산경찰서 순사부장으로 나오는 기사가 하나 있다. 노덕술은 순사부장 진급 10년 만에 경부로 승진했는데, 1937년에 순사부장이었던 최난수가 1945년까지 경부 승진을 못하고 있었던가? <친일 인명 사전>의 경찰 출신자 수록 범위는 경부 이상이다.

체포된 김석황(1894~1950년)은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고 상해 임정에 참여했는데 무장 항쟁에 힘을 쏟고 군자금 조달 활동을 많이 벌였다. 1920년 말 일경에 체포되어 5년간 복역했다(선고는 10년). 해방 후 한독당 중앙위원과 국민의회 동원부장으로 활동했고 1946년 6월 23일의 반탁 시위를 배후 교사한 혐의로 엄항섭과 함께 체포당한 일이 있었다. 김구 세력의 행동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석황 등의 재판 과정에서 김구는 증인으로 출정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고 검찰과 재판부는 그가 장덕수 암살의 진정한 배후라는 심증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김석황은 1948년 3월 2일에서 4월 21일까지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특별군정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한국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복역하다가 개전 직후 인민군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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