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패배, 왜 차별화에 실패했는가?
그런데 대선은 단지 후보와 후보의 대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치-세력-정책-담론-인프라 전부가 맞붙는 총력전의 성격을 갖는다. 한마디로 진영 대 진영의 대결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선 패배에 대한 올바른 원인 분석은 '진영 전체'의 문제점을 되돌아보는 것에서 모색될 필요가 있다.
12월 19일 대선이 끝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왜 복지 국가에서 차별화되지 못했는가?" 혹은 "경제 민주화에서 차별화되지 못했는가?"라는 지점이다. 이번 대선은 그 어떤 역대 대선에 비해서도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선거였다. 그러나 결국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 분야에서도 야권은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왜? 정말 왜 그랬을까?
이병천 교수의 <한국 경제론의 충돌>(후마니타스 펴냄)은 2012년 5월경부터 수개월에 걸쳐서 <프레시안>에서 진행된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의 내용이 책으로 나온 것이다. 물론 책은 그 중에서도 이병천 교수의 입장을 엮은 것이다.
'경제 민주화 논쟁'이 책으로 나오다.
▲ <한국 경제론의 충돌>(이병천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책의 구성이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분량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내용이 장하준 교수(를 비롯한 정승일 박사, 이종태 기자)에 대한 비평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보인다.
이병천 교수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경제 민주화 담론을 사회-정치적 핵심 의제로 부상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상호 공방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논점이 근접해진 측면도 있다. 한 축은 '재벌 개혁'의 필요성을 조금 더 강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장하준 교수를 비롯한 다른 한 축은 '주주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금융 주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조금 더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경제 민주화 논쟁의 실패와 대선 패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균형 있는 접근을 추구했던 제3자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은 그다지 '좋은 논쟁'이었다고 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좋은 논점'을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빙빙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서로 상대방을 비아냥(?)거렸다.
재벌 개혁을 강조하며 장하준 그룹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분들은 상대방을 '재벌 옹호론자'라고 은근히 매도했고, 장하준 그룹 역시 상대방을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라고 은근히 매도했다. 그 이외에 '더 진전된' 논의는 대체 무엇이 있던가?
장하준 그룹이 되었건, 장하준에 비판적인 그룹이 되었건 서로 상대방을 '신자유주의자'라고 비난하거나, '재벌 옹호론자'라고 비난하는 등의 상대방을 비판하는 내용을 글 분량에서 전부 다 삭제해버린다면, '건설적 대안'에 해당하는 내용은 도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비난의 분량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민주당을 포함한 기존의 야당이 '반대만 하는 정당'이었기 때문에 건설적인 대안을 주도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경제 민주화 논쟁에 참여했던 적지 않은 분들 역시도 상대방을 '반대만 하는 논쟁'을 했던 것은 아닐까?
'반대만 하는 야당'과 '반대만 하는 논쟁'
우리가 한국 경제의 현실에 대한 균형 있는 접근을 한다면, 재벌의 문제에 대해서는 '계열사 체제'의 장점은 살리되, '총수 전횡'의 측면에 대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이견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장하준 그룹의 역시도 일관되게 같은 입장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장하준 그룹에 비판적인 분들도 일관되게 갖고 있던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논점'은 계열사 체제의 장점은 살리되, 총수 전횡은 억제할 수 있는 '보다 정밀한' 대안-방안을 둘러싸고 형성되었어야 한다.
마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선언적인 레토릭의 수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장하준 그룹이 되었건, 장하준에 비판적인 그룹이 되었건 계열사 체제의 장점은 살리되, 총수 전횡은 억제할 수 있는 '디테일한' 방안을 건설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논쟁이 진행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또한, 주주 자본주의와 금융 자유화 측면을 본다면, 재벌 개혁을 강조하는 그 어떤 논자도 주주 자본주의와 금융 자유화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상장회사를 중심으로 외국인의 주식 지분이 40퍼센트에 달하고, 그렇기 때문에 '단기적 실적주의'의 압박을 받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노동유연화, 정리해고, 하도급 단가 인하가 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소위) '재벌 개혁론자'는 거의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장하준 그룹에 비판적인 이병천 교수도 '제도주의 경제학'의 입장을 갖고 있고, 장하준 그룹에 해당하는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역시도 '제도주의 경제학'의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하준 그룹이 비판했던 정태인-김상조 교수 역시도 사실은 '제도주의 경제학'의 입장에 가까운 분들이다.
제도주의 경제학은 '시장'과 '가격기구'를 경제학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주류경제학)의 입장과 달리, 시장과 가격기구도 '하나의' 제도로 볼 뿐이다. 시장을 포함하되, 기업-법-노사관계-국가-계약 등의 '제도적' 배치와 배열을 가장 중시여기는 입장을 갖고 있다.
제도주의 경제학의 '진짜 문제의식'과 건설적 논쟁을 위하여
그래서 제도주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볼 때, 시장과 국가를 '대비'시키는 입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좋은 국가'와 '좋은 시장'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에게 전제조건으로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사회적 갈등이 다원화되고, 경제적 행위 주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디테일한' 제도적 배치가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즉, 단지 국가가 더 중요하거나 시장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시장-법-노사관계-기업 등의 '정교한' 제도적 배치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제도주의 경제학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한국 경제 성격 논쟁'의 실패(?)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막연하게 재벌 개혁이 더 중요하거나 주주 자본주의 타파가 더 중요하다는 '선언적' 거대 담론이 아니라, '디테일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논쟁에 참여했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벌 개혁도 중요하고, 주주 자본주의 타파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사실은 논쟁의 시작 전부터 이미 '합의점'이 존재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컵에 물이 반이 있는데, 누구는 적다고 주장하고, 누구는 많다고 주장하는 꼴이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12월 19일은 대선은 패배했다. 민주당만 패배한 것이 아니고, 문재인 후보만 패배한 것이 아니다. 야권의 '담론 수준'도 패배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반대만 하는' 야당이 아니라, '대안'을 주도하는 야당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반대만 하는' 논쟁이 아니라 '대안'을 주도하는 논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 원리로, 박근혜 당선인과 새누리당까지도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론을 '원칙적으로는' 수용하고 있는 새로운 현실을 감안할 때, 학계의 담론 수준 역시도 총론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담아내되, 한발 더 나아가서 '디테일한' 각론에서 전선을 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 경제론의 충돌'은 장하준 그룹과 그 밖의 그룹 간에 그어질 것이 아니라, '선언적' 총론에 맞서는 '디테일한' 각론, '비판 중심' 담론에 맞서는 '대안 중심' 담론의 주도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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