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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할머니, 고아 되는 준비를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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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할머니, 고아 되는 준비를 시작하다

[프레시안 books] 한설희의 <엄마, 사라지지 마>

아무런 정보 없이 접한다면 <엄마, 사라지지 마>(한설희 지음, 북노마드 펴냄)의 제목은 어린이 그림책이나 동화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엄마, 사라지지 마. 영락없는 아이의 목소리다. 그러나 책의 정체가 일흔이 다 된 사진작가 딸이 아흔이 넘은 노모를 찍은 사진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장성한 청년이지만 그다지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던 노모를 '엄마(maman)'라고 지칭한다. 뒤이은 문장에서 인용되는 전보의 '모친, 사망.'이라는 표현과 사뭇 대조적이다. 이방인의 첫 문장에서 '엄마(maman)'를 '어머니(mère)'로 잘못 번역하는 경우 소설의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지는가 하는 점은 불문학도들 수다에 심심찮게 오르곤 하던 얘깃거리다. 이 사진집 역시, '엄마, 사라지지 마'라는 문장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뫼르소의 이야기는 엄마의 부고를 듣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 사진집 <엄마, 사라지지 마>를 출발시킨 것은 아버지의 부고다. 도시의 풍경을 찍어오던 저자는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의 시간 역시 그리 오래 남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과 불현듯 마주하게 된다. 그 뒤로 저자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는 구십 노모를 사진에 담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 2년 동안의 사진과 담담한 소회를 엮은 기록이다.

▲ <엄마, 사라지지 마>(한설희 지음, 북노마드 펴냄). ⓒ북노마드
한 사람의 삶을 꾸준히 기록하기에 2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게다가 아흔 살,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를 예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에 <인생 극장> 한 회분의 드라마는 없다. 20대에 북녘땅을 떠나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엄마. 신여성과 바람이 나 떠나버린 남편을 평생 기다렸으나 아흔이 넘어 쓸쓸한 부고만 돌려받은 엄마. 자식 넷을 다 키워 내보낸 뒤 외출도 없이 작은 방에 스스로를 가둔 듯 살아가는 엄마.

이상한 일이다. 이야기로만 따지면 파란이 적었던 삶도 아닌데, 그 내용은 저자의 짧은 설명으로 그칠 뿐. 사진집에 노모의 인생이 회고적으로 갈무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노모와, 노모가 오랫동안 살아 온 섬 같은 방 안 풍경과, 다가올 사건이라곤 죽음밖에 없는 듯 무겁고도 가벼운 공기가, 마치 아주 느린 수십 장의 연속사진처럼 비슷한 표정으로 찍혀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모두 흑백이며, 어두침침한 방에 창틈을 비집고 들어 온 볕 한 줄기가 흐릿한 초상의 일부분을 비추고 있다. 노모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그냥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사진집 말미에 이르면 저자는 엄마의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는 것이 사진에 선연히 드러나 마음이 아프다고 고백한다. 사실 나로서는 그 변화까지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진을 계속 찍어 온 딸의 눈에는 미세한 변화도 커다랗고 분명하게 보였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이 사진집을 펼쳐 든 우리의 눈앞에 가장 많이 비치는 것은, 사진에 찍혀 있지도 않은, 카메라 뷰파인더 쪽에 앉아 있는 일흔의 딸인지도 모른다. 딸은 셔터를 한 번 누를 때마다 '엄마, 사라지지 마'라는 문장을 매번 되풀이해 말하고 있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가 되풀이해 보는 것 역시 그 문장인 것이다.

따라서 저자의 우려처럼, 이 사진 모음은 다소간 동어반복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편집상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진은 실제로 세 번 이상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모든 사진이 점점 더 비슷해 보이는 그 익숙한 느낌이, 사진과 죽음 사이의 오랜 비밀, 즉 사진이라는 매체가 근본적으로 죽음의 속성을 담지한다는 진실까지 은폐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시간과의 공모로 찰나들을 매번 과거로 돌려놓으면서 삶을 정지시키고, 그럼으로써 존재와 부재 사이의 심연을 무한히 가늠하는 작업이 아닌가.

이전에 주로 풍경 사진을 찍어왔던 저자는 개발의 광풍에 휩쓸린 판교 신도시의 현장을 가장 오래 촬영했었다고 한다.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사라져버리는 대상에 대한 관심이 나이 든 엄마에게로 자연스레 연결되었음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풍경 사진작가라는 이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노모의 손등과 입가의 깊은 주름을 노골적으로 클로즈업한 사진들보다는 사물과 공간을 담은 사진들에 더 관심이 갔다. 저자는 엄마의 사진을 찍는 일이 뷰파인더에 잡히는 엄마의 물건들까지 마음에 담게 되는 일이었다고 표현했다.

물건이 그것을 쓰는 사람과 닮아가고, 사람이 하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들려줄 때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건져 올리게 되는 소박한 진실 중 하나일 것이다. 노모와 노모의 집이 하나가 되어가는 느낌과 흡사하게, 사물들 역시 노모와 일체화된 풍경을 이룬다.

낡아빠진 스테인리스 물그릇, 구식 전화기, 소반, 이불청, 거울.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노모의 사진에서 밥상 한쪽 끄트머리에 놓여 있는 틀니는 평범한 것인데도 한참 동안 시선을 붙들었다. 그리고 배경에 펼쳐진 꽃무늬 벽지. 낡고 희미해서 패턴이라기보다 일종의 얼룩처럼 보이는 꽃무늬는, 박해천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 모음 펴냄)에서 꽃무늬의 입을 빌려 풀어낸 바 있는 취향의 역사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정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한설희, 사진 제공 북노마드

신기하게도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곧 오픈할 전시를 위해 '어머니'에 관련된 작업을 준비 중이었는데, 옛 사진들을 뒤적이던 중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희미한 꽃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거울 속에 붙박인 엄마를 찍은 사진이 내게도 여러 장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거울 안에 아주 오래 전부터 들어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냥 누워서 잠을 자고 있을 뿐인데,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이가 든 딸의 눈에 엄마들은 원래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우스운 고백이지만, 언젠가 엄마의 보자기천 하나를 꽁꽁 숨겨둔 적이 있다. 고향집에서 택배로 보내 온 옷가지가 싸여 있던 보자기였다. 낡은 보자기에는 엄마 냄새가 스며 있었다. 나는 나중에 세월이 흘러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 냄새가 세상에 조금쯤 남아 있도록 보자기를 비닐 지퍼 백에 넣어 여러 겹으로 싸고, 이따금 포장을 풀어 냄새가 얼마큼 희미해졌는지 맡아보곤 했다.

냄새는 생각보다 빨리 옅어졌고, 나중에는 내가 맡고 있는 것이 보자기천 냄새인지 엄마 냄새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어졌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엄마가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데 대한 두려움과 공포도 함께 희미해졌다. 그 두려움과 공포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나에게 조금 더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있었다.

이 책이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 한설희 사진작가의 엄마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 그리고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두려움과 조바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는 죽음 쪽으로 자연스럽게 향해가는 한 육신을, 그 느린 시간을 고집스레 쫓고 있는 것이다. '엄마, 사라지지 마'를 말하는 것은 저자지만, 독자는 그 발음의 여운을 각자의 혀끝에 빌려와 저마다 다른 엄마의 풍경을, 죽음에 대한 자세를 상상한다. 아마도 그것이 이 사진집을 통과하는 일반적인 여정일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늦든 빠르든 모든 사람은 언젠가 고아가 된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이별과 상실의 경험 또한 우리를 고아로 만든다. 그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자각하고, 스스로 면역력을 기르거나 혹은 자각을 유예하며 사는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런 질문의 답은 궁금하지 않다. 다만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세상의 모든 죽음이 가능한 한 납득 가능한 죽음이기를, 슬프되 원통하지 않기를, 죽음 앞에서 우리 자신이 자연스러울 수 있기를,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 또한 자연스러울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럴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죽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사라지는 것'이 되고, "사라지지 마"라는 말을 삼키는 일이, 떠나보내는 일이 조금은 더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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