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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서 개불알꽃을 처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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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서 개불알꽃을 처음 보다

[꽃산행 꽃글] 백두산 가는 길 ①

아무리 그곳에 간절히 가고 싶어도 바로 그곳으로 가서는 아니 된다. 그곳에 가려면 소정의 절차와 은근한 형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곳은 백두산. 그 중에서도 천지. 말로만 듣고 마음으로만 그려온 그곳을 가기로 한 것이다. 2012년 6월 중순. 중국 옌벤(연변) 지구 및 백두산 식물 탐사대의 일원이 되었다.

아침을 열고 나와 다섯 개의 문을 차례차례 통과했다. 아파트 현관, 엘리베이터, 공항버스, 인천공항 청사 그리고 또 육중한 게이트. 그리고 가슴을 진정시키며 앉고 보니 길쭉한 캡슐같은 비행기 안이었다.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신문을 뒤적이며, 김수영 시집을 읽으며, 기내식을 먹으며,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때웠다.

이 작은 비행기 안도 하나의 완벽한 세상이다. 비행기 승객을 대강 어림해 보면 200여 명은 될 것 같다. 문득 이곳은 그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의 비율도 적당한 것 같았다. 그곳에서도 벌어질 일은 다 벌어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는 대형(大兄) 기장에게 운명을 맡긴 채.

식사가 끝나자 면세품 판매를 한다고 했다. 배부른 승객들의 불룩한 욕망은 이제 담배, 술, 화장품, 향수, 시계로 향하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이 수레를 끌고 복도를 점령했다. 부피에 비해 단가가 만만찮은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승객들은 끊임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렇게 부산하고 소란한 광경을 구경하면서 좁은 의자에서 꼼짝없이 갇힌 채 두 시간을 체공(滯空)했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국경을 넘었는가 보다. 비행기 문을 나섰더니 느낌부터가 달랐다. 여기서부터는 남의 나라이다. 광고판, 안내문에 박힌 글씨도 영 낯설었다. 날씨에 말씨가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만 공기부터가 달랐다. 후줄근한 복장의 중국제 세관원, 공안 들이 삐딱한 시선으로 훑어보는 가운데 검색대를 통과했다.

연길공항을 나서니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延吉. 집채만한 한문 글씨가 크게 쓰인 공항 청사를 빠져나와 또 작은 문을 통과해 관광버스를 탔다. 이번 탐사 기간 우리를 실어 나를 버스였다. 연길은 그리 깨끗한 도시는 아닌 듯했다. 아직 기내식을 다 소화시키지 못했는데 점심을 또 먹었다. 때가 조금 지났지만 먹어두어야 한다고 했다. '연흥랭면' 간판 아래로 들어가 세숫대야만한 '물랭면'을 먹었다. 빙천 맥주도 곁들였다. 물맛이 썩 좋았다. 하지만 절반을 남겼다. 본격적으로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이번 탐사의 주제는 연변 지구에 자생하는 개불알꽃(난초과)과 북방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6월의 꽃을 중점으로 하면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지하산림, 천지를 조망하는 것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나는 꽃도 꽃이었지만 그 중에서 천지를 보는 것을 이번 여행의 백미로 내심 꼽아두고 있었다. 천지를 어서 바삐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가지를 아니 했다. 몇 군데 야생화를 보고 천천히 백두산으로 접근하는 길을 택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삼도진(三道鎭)의 어느 야산이었다. 이곳도 사람들이 사는 동네이다. 호젓한 오솔길은 내 고향의 그것과 너무 비슷했다. 노란꽃들이 지천에 피어 있었다. 미나리아재비였다. 은방울꽃이 소리없이 있었다. 아무 알아주는 이 없어도 야생화는 피고 진다지만 모처럼 사람들의 따뜻한 눈길을 받는 꽃들. 시무룩하던 꽃밭에 아연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 은방울꽃. ⓒ이굴기

식물학자 박만규(朴萬奎, 1906~1977년)의 글에 따르면 이런 대목도 나온다.

"꽃은 처음 본 사람이 그 느낌으로 무어라 불러주면 그것이 곧 그 꽃의 이름이 된다. 제비처럼 날렵하니 제비꽃, 씹어보아 쓰다고 씀바귀, 물가에서 자란다고 물쑥. 이 모두가 우리네 조상들이 지어서 불러내려온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처럼 꾸밈없고 멋진 이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듣기만 해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엉큼한 이름도 많다. 난초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로서 붉은 꽃이 한 개씩 늘어져 피는 꽃을 <향명집>에서는 개불알꽃이라고 이름 지어놓았다. 꽃의 모양에서 딴 이름인 듯하나 부르기가 몹시 난처한 이름이라 나는 요강꽃이라고 바꾸어놓았다."(☞관련 기사 : 가수는 노래하고 나는 꽃을 본다)

어느 양지바른 곳에 그 개불알꽃이 무더기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이다. 그래서 내 육안으로는 처음 본 꽃. 말로만 듣던 개불알꽃 아래에서 오래 머물렀다. 개불알꽃은 말 그대로 개의 불알 같은 꽃잎을 달고 있는 난초과의 식물이다. 꽃말이 좀 거시기하다고 복주머니란이라고도 하지만 난 본래의 이름이 좋다.

요강 같은 혹은 주머니 같은 큰 꽃잎. 개불알꽃은 세상의 할 말을 가득 담고 있는 듯 줄기에 비해 큰 단지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가슴에 담아 내려오는데 분홍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왕청(汪淸)의 한 호텔에서 잤다. 그곳으로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 분홍할미꽃. ⓒ이굴기

▲ 개불알꽃. ⓒ이굴기

▲ 개불알꽃.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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