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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 빠진 진보 세력, 이 '급진좌파' 말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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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 빠진 진보 세력, 이 '급진좌파' 말 들어봐!

[프레시안 books] 로베르토 웅거의 <주체의 각성>

<주체의 각성>(앨피 펴냄)을 옮긴 이재승 교수는 전 서울시 교육감이었던 곽노현 교수로부터 로베르토 웅거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평자도 곽 교수로부터 웅거를 처음 소개받았었다.

하버드 대학 로스쿨 법학 교수, 웅거의 공식 직함이다. 브라질 출신으로 하버드로 유학을 왔다가 서른도 되기 전 약관의 나이로 1976년 그 대학의 최연소 종신교수가 되었던 인물이다. 거의 사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기록은 깨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만 해도 웅거는 거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을 만하다.

여기까지는 약과다. 그는 하버드에서 "비판법학연구"(CLS)라는 새로운 학파를 창설한 인물이다. 이 학파는 법학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역할을 한 흐름이다. 기존의 법학이 국가 내에서 법의 중립적이고 초연한 입장을 당연시했다면, 비판법학연구에서는 법의 프레임이 경제·사회적 불평등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사회를 개혁하려면 법체계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몇 해 전 평자가 그 학교의 인권연구소에 있었을 때 들은 이야기다. 웅거가 중심이 되어 주도한 비판법학파와 기존의 전통법학파 사이에 얼마나 논쟁이 치열했던지 1980년대의 로스쿨은 "양 진영 사이의 끝없는 전투로 포연이 그칠 새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웅거는 새로운 학파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단순히 법철학자가 아니라 철학, 정치학, 사회이론, 역사 등 거의 르네상스적 호흡으로 엄청난 분량의 저술을 쏟아낸 백과전서적 학자다. 이런 이야기는 옮긴이 서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쓴 <정치학(Politics)> 3부작의 서평을 쓴 존 던(John Dunn)은 이 저작이 고대와 현대의 중요한 모든 정치철학적 질문에 답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저술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웅거의 관심사는 그 포괄범위가 넓기로 유명하다.

이런 점에서 <주체의 각성>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주체의 각성>은 수십 권에 달하는 웅거의 모든 저술을 안내하는 개론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라는 평을 듣고 있으므로, 웅거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압축적인 가이드북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주체의 각성>(로베르토 웅거 지음, 이재승 옮김, 앨피 펴냄). ⓒ앨피

웅거의 활약은 광범위한 저술활동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위의 모든 활동에 더해 그는 현실 정치인이다! 모국인 브라질의 개혁 정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는 전업 정치인이다. 오래 전부터 방학 때면 브라질로 돌아가 아마존의 구석구석까지 민중을 만나러 가고, 현장에서 즉석 연설을 하며 다닐 정도로 정치 참여의 열정이 대단했다. 브라질은 학자-정치가라는 철인정치의 전통이 있는 모양이다.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으로 세계적 명성을 날렸던 페르난도 카르두수도 대통령을 했을 정도니 말이다.

아무튼 웅거는 단순히 학자로서 자문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 깊이 간여해서 대통령 출마까지 시도했었고 룰라 대통령 당시 장기계획부 장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현재는 학계로 돌아온 상태이지만 아직 예순 중반의 나이여서 앞으로 현실 정치에 다시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주체의 각성>을 읽으면 이렇게 다채롭고 학자로서 전례가 없을 정도의 광폭 횡보를 보이는 웅거의 전인적 면모가 잘 드러난다. "사회개혁의 철학적 문법"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답게 정치의 근본적 판짜기를 희구하는 학자-정치인의 비전이 모든 페이지를 관통하고 있다. 웅거는 넓은 의미에서 좌파에 속하는 지식인이지만 마르크스적 결정론을 단연코 거부하면서 인간의 부단한 전진을 믿는 낭만적 예언자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맥락을 초월하는 정신'이 있으므로 '영구혁신'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연, 문화, 사회조직의 주어진 틀 안에서 운명적으로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끊임없는 개혁정신과 자유의지로써 주어진 조건의 영향을 적게 받도록 스스로를 형성한다. 즉, 제약조건 자체를 혁신하면서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갈 수 있게 예정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을 영구혁신을 도모하는 자유존재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측면은 정치적 영역이다. 정치의 핵심적 존립근거는 대규모의 혁신과 재조직화로 인간 사회가 '영구적'으로 실험과 자기수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단순히 인간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의 제공, 그리고 유한한 자원의 분배에 관한 권위 있는 결정을 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정치는 인간이 '신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즉 더욱 완전해질 수 있도록 인간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치의 본령은 보편적 재혁신의 집단적 조직화라 할 수 있다. 역사에는 어떤 오메가점도 없고, 인간 진화의 최종지점에 해당하는 그 어떤 종착역도 부재한다. 부단한 집단적 자기혁신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웅거는 이런 식의 영구혁신을 하기 위한 실험정신을 '급진화된 실용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이때의 실용주의는 원칙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통상적 실용주의가 아니다. 역사적 결정론이나 구조화된 제도의 틀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실험하고 혁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실용주의이다. 원저의 원래 부제가 "풀려난 실용주의"(Pragmatism Unbound)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이 모든 주장이 의도하는 구체적 목표가 급진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진정한 갱신이라는 사실이다. 통상 진보사상의 재구성을 말할 때 프로그램의 적실성을 따지기 쉬운데, 웅거는 그것을 넘어 사회이론적인 차원의 해결책으로 돌파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웅거는 아주 유니크한 비마르크스주의적 급진좌파라고 할 만하다. 그가 생각하는 좌파 사상이 특정한 이념적 내용이라기보다, 인간 자유를 확대할 수 있는 전면적 실험의 여지를 보장해줄 제도(그 자체도 혁신의 대상이지만)의 구축을 타깃으로 삼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웅거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대의제에다 혁신의 메커니즘인 직접민주주의를 결합시켜야 '끊임없이 자기혁신하는 민주제도'를 운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굳이 우리 상황과 연관지어 독해한다면, 대선 패배 이후 의기소침해 있는 모든 민주·개혁·진보 진영에 웅거의 메시지가 주는 대안적 목소리도 하나의 소중한 화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개혁의 계기: 사회민주주의의 재창조'라는 장에서 웅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정치란 고양의 과정이다. 이 고양은 정치가 제공하는 권력과 정치가 만드는 실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방향에서 정치는 운명거부론에 기초한다.(…) 이 운명의 형식들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관철시키면 약화될 것이고, 우리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회질서의 인위적인 부정의에 흔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운명의 형태를 더 명료하게 볼 수 있으며 운명의 효과를 더 예리하게 느낄 수 있다."

사회의 보수화가 마치 운명처럼 자리 잡았다고 체념하지 말고 민주주의를 철저히 관철시킴으로써 스스로 더욱 강해질 수만 있다면 대선 패배는 어쩌면 진보파에게 단련의 시간을 허용한 축복일 수도 있겠다.

옮긴이 이재승 교수는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중추적 학자로서 <국가 범죄>(앨피 펴냄)라는 노작을 통해 한국판 비판법학의 큰 기둥을 세운 바 있다. 그러한 공부길의 여세를 몰아 법철학적으로 중요한 저서를 우리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자임한 것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요즘 독서계에서 학자가 직접 번역한 전문 학술서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아시다시피 논문 편수만 강조하는 학계의 풍조에서 번역에 드는 시간과 공력을 감안하면, 그리고 번역을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잘 인정하지 않는 풍토를 생각하면, 번역을 하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계산'으로는 하기 힘든 노고에 속한다. 이왕 내친 김에 <정치학> 3부작의 번역이라는 위업에 도전할 의사는 없는지, 기대 겸 덕담 겸 적어놓고 싶다.

마치기 전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웅거의 철학적 비전의 한 축이 가톨릭 사회교리, 특히 노동사상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기록해 두어야 하겠다. 그랬을 때 <주체의 각성> 맨 마지막 문장이 왜 그렇게 쓰여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보편적 척도에 대한 탐구에서 어떤 결론을 획득할 수 있는가? 우리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더욱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 두 가지다."(What is the conclusion to draw from this inquiry into the universal grid of philosophy? It is that we cannot become God and that we can become more god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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