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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보' 세력은 냉전의 산물?! 이제 새로워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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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진보' 세력은 냉전의 산물?! 이제 새로워지자!

[5년, 역사]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

2013년 첫 '프레시안 books'는, 향후 5년을 건너가는 데 함께 하면 좋을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5년'인 이유는 새로운 대통령과 정권이 들어서는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희망과 절망을 교차시키는 변화입니다. 여덟 명의 필자가 이 '5년'을 마주하며 책 한두 권씩을 꺼내 들었습니다. <편집자>

먼저 이 기획에 대한 주의를 하나 짚고 넘어가자. "5년을 버티는데 도움이 될 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게 떠오른 말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이었다. 원한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서로 몇 년씩이나 복수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옆구리 배기는 장작더미 위를 잠자리로 삼고 돼지 쓸개를 매달아놓고 매일 핥았다는 고사이다. 이번 선거 결과에 '한'이 남은 이들은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우선 대한민국은 앙심을 먹은 정치 집단들이 복수를 주고받으라고 펼쳐진 난장판이 아니다. 나는 노무현 정권 당시 권력을 잡은 이들 일부가 "개혁이란 개혁 세력이 권력을 잡는 것"이라고 뻔뻔스럽게 떠들고 다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보수가 되었던 진보가 되었던 이 땅이 얼마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가의 관점에서 정말로 집권할만한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아야 하며, 선거로 나타난 바의 결과를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평가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새롭게 바꾸는 채찍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는 현명한 국가 지도자는 이미 까마득한 태곳적부터 알고 있었던 진리이다. 지금부터 거의 4000년 전 그러니까 웅녀 할머니가 단군왕검을 낳으신 조금 후에 중국을 통치했던 은나라의 시조 탕왕은 세숫대야에다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질지어다 (日日新, 又日新)"이라고 새겨놓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를 마음에도 새겼다고 한다. 어쭙잖은 비장한 표정이나 자세 따위는 치워버리기를. 5년간 필요한 일은 와신상담이 아니라 일신우일신이다.

그런데 범진보 개혁 세력의 경우 막상 일신우일신을 실행하려면 그것을 딱 막고 나서는 장애물이 하나 있다. 이 장애물은 사상, 신념, 세계관이라고 불린다. 이는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으며 그것을 매일 매순간 의식하며 사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다가 막상 변화하는 세상에 따라 변화해야 할 순간이 되면 수면 위로 떠올라 "안 돼!"라고 길을 가로막는다.

물론 사상, 신념, 세계관은 사람이 스스로의 의식을 구성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이다. 이것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 생활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해석할 수가 있고 그래서 의미를 찾아낼 수가 있고 그 의미에 기초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나갈 수가 있다. 문제는 이 사상, 신념, 세계관이 이렇게 세상을 밝혀주는 역할만큼 또 세상의 진실을 가리는 역할도 하면서 사람의 생각을 항상 똑같은 쳇바퀴 안에서 빙빙 돌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상, 신념, 세계관 때문에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탄력적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질식당하는 때도 많다.

특히 지금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라"는 느끼한 중년 남성의 혁신 구호도 이제는 낡고 진부한 것이 되었지만, 세상은 옛날과 거의 바뀐 것이 없다. 왜 그럴까. 막상 "바꾸겠다"고 생각하고 성찰을 시작해봐야 지금까지 자기가 했던 생각과 했던 행동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사상, 신념, 세계관과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자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상, 신념, 세계관도 일부 혹은 대폭 심지어 송두리째 바꾸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때 두뇌에는 비상 경보가 울리고, 이를 막기 위한 온갖 장치들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는 호된 비판과 성찰의 메커니즘과 여기로부터 자신의 사상, 신념, 세계관을 지켜내기 위한 메커니즘이 모두 바쁘게 돌아가며 충돌하면서 골룸/스미골의 1인극이 펼쳐진다. 그렇게 한참 하고 나서 결국 결론은 "내가 잘못한 게 뭐야? 내가 뭘 어쨌다고?"로 끝나기 일쑤이다.

개인의 심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특히 공동의 역사와 공동의 경험을 공유하는 한 사회 내의 집단 심리에서는 이렇게 한번 사상, 신념, 세계관이 형성되고 나면 도무지 깨어질 줄을 모른다. 한국 전쟁을 경험한 남북한의 보수 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소위 민주화 세력이라고 혹은 좌파 세력이라고 불리는 집단들 모두가 이러한 고정 관념의 보호 기제를 강하게, 아주아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잠깐만 엑서사이즈(exercise: 어원상 안온하게 우리 안에 늘어져 있던 양떼를 밖으로 몰아내어 운동시킨다는 뜻)를 해보는 셈 치고, 이들의 고정 관념이 얼마나 강한지를 느낄 수 있도록 다음의 명제 몇 개를 음미해보자. 사람에 따라 뭔가 강한 반감이 치밀어 오르는 명제가 한 두 개씩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추상적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만들어서 체제 전체를 수호하는 최고의 안전판이다.

2. 분단 조국의 한쪽 편에다가 세습 왕조를 세워놓은 북한 정권은 분단을 영구화시킨 단군 이래 최악의 반민족 반통일 세력이다.

3. 노무현 집단은 애초부터 집권의 준비와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좌파 세력의 권력 확장에만 치중하는 "패밀리"의 성격이 강한 집단으로서, 김대중 사후 민주당을, 나아가 민주 개혁 세력을 장기적으로 황폐화시킨 주역이다.

4. 정규직 노동자를 안정된 밥그릇에 눈이 먼 "귀족 노동자"라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정규직 전환에 목을 매는 비정규직 노동 운동이야말로 전형적인 '님비' 현상이다.

5. 해고는 살인이 아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노동 인구의 최소한 5분의 1은 좀비, 그것도 몇 번씩 총칼에 뚫린 좀비란 말인가. 해고되기 전에는 사회 운동이고 노동 운동이고 관심도 없다가 일자리 찾아달라고 외쳐대는 "연대"가 도덕적 설득력이 얼마나 되는가. 등등.

오해 없기를. 이 명제들이 옳다고 주장하려고 적어놓은 것이 아니다. 읽다가 어떤 명제에서는 통쾌함을 느끼기도 할 것이며 어떤 명제에서는 울컥하는 반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이를 한번 느껴보자는 것뿐이다.

토니 주트(Tony Judt)는 지식인으로서도 역사학자로서도 대단히 독특한 사람이다. 지적인 계보를 보자. 영국으로 이민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동유럽계 유태인 집안에 태어났고, 프랑스어에 능통하여 1960년대 말 프랑스의 좌파 운동을 눈앞에서 목도했고, 이후 미국의 유럽학계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내 사회적 쟁점에 활발하게 개입한 유명한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이다.

어김없는 전형적인 미국 내 좌파 지식인의 이력을 가진 그는 하지만 공산주의는 물론 유럽식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그가 지적·정치적 입장에서 친밀성을 피력하는 지식인들을 보자면 레체크 콜라코프스키, 조지 리히트하임, 조지 오웰, 레이몽 아롱, 알베르 카뮈 등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유의 지적 운동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이며 루이 알튀세르 같은 이는 아예 지식인으로 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맞서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강경하게 옹호하기도 하며, 특히 아들 부시 대통령 이후의 미국 사회 보수화에 정면으로 맞서 진보적 관점을 견지하기도 한다.

그냥 괴팍스런 괴짜라고 볼 수도 있는 그의 지적인 위치가 갈수록 세계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탈냉전이 최근 몇 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은 한마디로 억지로 가득 찬 진영 논리에 거의 모든 담론이 좌파 우파로 찢어져서 각자의 부조리와 각자의 엉터리없는 잡설들을 프로퍼갠더로 쏟아놓는 경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기장 동지는 우리가 모르는 고급 정보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라면서 스탈린의 온갖 범죄를 감싸고 돌았던 사르트르, 혁명적 저항 운동을 무책임한 청년들의 호르몬 분출로 망쳐놓고서 이를 68년 혁명의 영광이라고 포장하기 급급했던 70년대 이후의 프랑스 좌파들, 인류 역사의 가장 끔찍한 기억이라 할 모택동의 문화혁명이나 폴 포트의 대량학살을 놓고 "제 3세계 만세!"를 외쳤던 좌파들, 공산당 지배에 저항하다 끝내 추방당한 철학자 콜라코프스키에게 역사의 진보와 마르크스주의 정신에 대해 훈수를 늘어놓다가 되려 망신만 된통 뒤집어썼던 역사가 E. P. 톰슨 등 모두 그의 날카롭고 신랄한 펜을 피해가지 못한다.

내러티브 전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쉴 새 없이 역사 현실에 개입하여 스스로의 판단을 표출하는 주트는 모노그래프를 산처럼 쌓아놓고 게으른 소처럼 되새김질하여 무미건조하고 끝도 없이 지루한 글을 풀어놓는 요즘 대학의 역사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종자이다.

▲ <포스트워 1945~2005>(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포스트워 1945~2005>(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플래닛 펴냄)는 역사학계에서 그저 시끄러운 논쟁꾼 정도로 폄하되던 그를 거장의 반열에 확고하게 올려놓은 대작이다. 20세기 후반의 유럽사를 다룬 책들은 부지기수이며 그 분량들도 대부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대단히 흥미로운 관점은, 20세기 역사를 "잊힌 역사"로 정의하고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굉장한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이후 최소한 18세기 프랑스에서의 계몽주의 발생 이후 20세기 초까지의 역사에 관해 실로 일기장에 가까울 정도로 거의 모든 사실을 정밀하게 기록하였으며 그 세부 사항 하나하나의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을 거쳐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이다. 프랑스 혁명이건, 크림 전쟁이건, 자연주의 문학의 등장이건, 사건의 전개와 의미와 현재적 함의까지 아주 명쾌한 설명이 준비된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20세기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사건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야 차치한다고 해도, 수없이 많은 역사적 세부 사항들, 나아가 아예 본말까지 전도되어 기억되고 있는 일들이 허다하다. 이에 대해서 사실을 바로잡으려고 들었다가는 냉담한 침묵이 돌아오거나 심하면 돌팔매가 날아들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그러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김구가 조국 분단을 막으려던 순정 민족주의자라고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미 남한 단독정부 노선을 분명히 했던 이승만과 1947년 말까지도 계속 정치적 운명을 함께 했던 김구의 노선에 대해서는 누가 이야기하는가? 북한의 남침은 그렇다 치고,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한 군사 행동은 어떻게 정당화되는 것인가? 등등.

어째서 가장 가까운 시대, 현대라고 말할 수 있는 20세기의 역사가 "잊힌 역사"가 된 것일까. 글 서두에 말했듯 우리의 사상, 신념, 세계관 때문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것들에 따라 모두 각자가 원하는 사실들을 조합하여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그 결과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숱하게 많은 사실들과 이야기들과 의미들은 여지없이 잊힌다. 주트의 길고 긴 <포스트워 1945~2005>는 이렇게 망각의 역사가 되어버린 20세기 후반기 유럽을 다시 시시콜콜 뒤져내고 들쑤시는 여정이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몇 십 페이지에 한 번씩은 두뇌를 두껍게 싸고 있었던 딱딱하게 굳은 촛농 같은 것이 깨어 벗겨지는 느낌을 계속 받게 된다.

글 서두에서 말했지만, 5년간 필요한 것은 저 썰렁한 와신상담이 아니라 아침저녁의 일신우일신이다. 그 과정에서 정말 새로운 시대 새로운 과제에 부응할 수 있는 세력이자 존재로 스스로가 다시 태어난다면, 5년 후에는 시대의 선택을 받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가로막는 최악의 적은 거의 항상 자기 내부에 있다. 그것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은인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의 변화와 성장을 가로막는 기존의 사상, 신념, 세계관인 경우가 많다.

이를 깨기 위한 "엑서사이즈"로는 역사 공부만한 것이 흔치 않다. 하지만 판에 박은 내러티브로 고정 관념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그런 역사가 아니어야 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91년에 무너졌지만 냉전의 다른 축인 미국 자본주의는 2008년에야 큰 위기를 맞았다. 한국의 개혁 진보 세력이 공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상, 신념, 세계관은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진정한 탈냉전의 시기로 들어서려는 21세기 초입에서 일신우일신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 냉전 시대의 좌파 우파 진영 논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일생을 버텼던 역사가 토니 주트의 기념비적 저작 <포스트워 1945~2005>가 좋은 도움이 된다.

그가 쓴 다른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도 권하고 싶다. 특히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를 놓고 절망을 느끼는 젊은 세대가 있다면, 20세기 역사를 반추해 볼 때 무엇이 소중히 해야 할 유산이고 어떤 비전을 조심스레 만들어볼 수 있을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토니 주트가 루게릭 병으로 죽기 직전 솔직 담백하게 말로 풀어내듯 쓴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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