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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눈이 왔다. 도시의 눈은 내리자마자 이리저리 발길과 바퀴에 채이기 바쁘다. 하지만 산에 내리는 눈은 나무들이 떠받들고 있다. 하늘에서 오는 소식을 대접하는 방식부터 다르다. 흰 눈과 찬 공기로 가득 설레는 지리산 계곡.
칠선교 지나 비선담 오르는 길. 하동바위 근처에 이르렀다. 야생화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큰 나무들만이 쓸쓸히 서 있다. 들메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금 지리산 계곡에는 꽃은 없다. 잎도 없다. 지금 지리산을 오르면서 그 없는 것만을 보는 이는 한쪽만을 보는 자다. 지나가는 이는 모두 지나가고 떠나는 이도 모두 떠나고.
그 없는 것을 보려다가 결국 보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있는 것들을 보는 건 더욱 좋은 방법. 까마득한 바위 끝에 큰 벌집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 발아래 꽃이 아름다웠다면 보지 못할 풍경이다. 들메나무의 겨울피부에도 볼거리가 많다. 잎사귀 무성했다면 눈으로 들지 못할 광경이다. 우리의 팔꿈치마냥 여러 무늬를 이루기도 한다. 어떤 것은 원숭이가 찡그린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어느 퇴화한 가지는 관음반가사유상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꽃은 지고 잎은 다 떨어졌으나 겨울 산을 오르면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나무의 눈과 엽흔. 그것을 보는 것으로도 한 세계를 충분히 엿보는 것이 된다. 엽흔은 잎사귀가 떨어진 자리의 상처를 꿰매는 자리. 우리의 몸에 상처가 아물면서 딱지가 앉듯.
엽흔은 종류도 다양하고 모양도 많다. 흔한 것은 하트 모양이다. 그리고 비선담 조금 못미처 만난 호두나무의 그것은 원숭인 듯, 작은 말의 얼굴인 듯.
▲ 호두나무의 엽흔. ⓒ이온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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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지리산 백무동에서 서울로 올 때 지루함을 견디려 최대한 천천히 아라비아 숫자를 세기도 한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50 51 52 53……108…1 2 3 4 5………. 그러다가 문득 창밖을 보면 멀리 희끗희끗한 겨울 산의 나무들.
엽흔을 보고 오는 날이면 나무들도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나무들도 그냥 서 있기만 하는 게 아니다. 겨울을 견디며, 봄을 준비하며, 저들의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겨울눈으로는 모자라 엽흔으로도 세상을 말똥말똥 관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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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오면서 사무실 한 켠의 달력을 무심코 보았더니 아직도 9월. 세 장을 한꺼번에 찢어내니 마지막 한 장만 달랑 남았다. 좁은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아 자리로 오면서 주문처럼 외워 보았다. 나를 담궜던 나이테 같은 간지(干支)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2010년 2011년 2012년 그리고 이제 2013년. 앞으로 5년 후면 어느 새 나도 환갑!
▲ 이른 봄날의 호두나무. ⓒ이온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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