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가을이 다녀간 길에는 단풍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고 겨울의 돌들은 흰 성에를 잔뜩 껴입고 있었다. 추성리에서 출발해 얕은 재를 넘었다. 급하게 꼬부라지는 고개의 끝에서 일행 한 분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 불 냄새가 나질 않습니까. 이럴 수가, 고개를 돌자, 아연 인간의 마을이 나타나질 않겠는가. 벌써 그이는 성큼성큼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다.
굴참나무 껍질로 벽을 바른 인가 두어 채와 을씨년스러운 담배막. 멀리 민박집에서는 곶감이 아래로 주렁주렁 달려 있고 가는 연기는 하늘로 오르고 있다. 한 귀퉁이에는 붙어있는 이런 헝겊 안내문. 두지동(斗池洞).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이 신라군에 쫓겨 국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군량미를 쌓아두는 창고로 쓰였던 곳으로 쌀을 담아두는 기구인 <두지>에서 유래된 지명"
오호라. 계속 시간표에 휘둘린 자, 이곳으로 이탈할 수 있겠구나. 이제 시대를 외면하고픈 자, 이곳에 자신을 유폐시킬 수도 있겠구나. 지금 마음이 허한 자들, 이곳으로 망명할 수도 있겠구나. 신라군에 쫓기는 가락국 인사들처럼!
두지동이 끝나자 대나무 숲이 대나무 숲이 진을 치고 있다. 지리산의 위로 오르려는 자, 몸을 깨끗이 씻으라는 듯. 그 신성한 숲을 통과하자 아연 붉은색 다리가 나타났다. 칠선교였다. 출렁대는 무쇠판은 단풍을 흉내낸 듯 붉은색을 입고 있다.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건너가는 이것을 왜 다리라고 하는가. 그 다리를 건너가는 우리 몸의 하부에 나무줄기처럼 두 갈래로 뻗어있는 것도 왜 하필이면 다리인가. 우리는 이 다리라는 것을 이용해서 걸어간다. 그리고 저런 다리를 건너고 건너 그 어디로 간다.
천왕봉에서 시작한 물은 투명할 대로 투명해져서 추성동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두 다리로 다리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는데 재미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득히 천왕봉 너머로 지나가던 태양이 칠선교를 비추자 칠선교를 건너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다리와 함께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지금 그 어디로 건너가는 다섯 명의 행인 그리고 그 그림자들.
▲ 칠선교 위의 그림자 칠선교. ⓒ이굴기 |
빛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에서 사진사가 사진에 나오는 법은 없다. 신기해라, 그 사진을 찍는 사진사의 모습도 카메라에 그림자로 잡혔네. 좌우측 어디에서부터라도 괜찮다. 행인1, 행인2, 행인3, 행인4. 아쉬워라, 행인5는 이미 다리를 건너 다리 바깥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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