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송년호(121호)는 '2012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2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시대의 죽음
2012년 대선의 결과에, 이 땅의 유권자 가운데 1500만 명이 충격 속에서 밤을 뒤척였다. 이토록 투표율이 높은데 결코 질 수 없다는 확신이 단숨에 무너지면서 앞이 캄캄해진 것이다. "멘붕"이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미래가 붕괴되는 것만 같은 절망감이 엄습해오면서 "시대의 죽음"을 체험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온 바가 단 한 번도 없는 인물이 국가 권력의 담당자가 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이미 죽은 망령의 귀환을 보는 것만 같은 공포감 또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노무현의 자살과 김대중의 서거는 민주주의 시대의 사망으로 이어져, 더는 버틸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좌절을 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이 현실 앞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던 이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막막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다만 우리만이 겪었던 일일까? 또는 이보다 더한 충격과 정치적 재앙을 치러낸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아 다시 일어났던 것일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의 카타르시스는 없는 것인가?
제2차 세계 대전 유대인 학살은 600만 명에 이른다. 당시 유럽에 거주했던 900만 명의 유대인 가운데 3분의 2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2000년 동안 유랑자로 살아왔던 이들이 "멸종"을 당하다시피 했던 이 역사는 이들이 믿었던 "신의 실종"이라는 비극을 겪게 한다. 치유되지 못하는 역사의 비극 그리고 이에 대한 기억이 가하는 폭력의 와중에 현실은 과연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카타르시스로 향해갈 수 있을까?
▲ <죽음>(임철규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 카이사르의 최대 정적 카토가 협의를 중심으로 체제를 이끌어가던 공화정의 가치에 충실하기 위해 택한 자살로부터 피를 보는 광적 스포츠의 희생물이었던 검투사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해서 그리스 문학 속에 표현된 죽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임철규가 다룬 죽음의 장면은 다양하고 그 성찰은 매우 깊다.
임철규는 또한,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것을 있는 대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것이 존재의 의무라고 역설했던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죽음에 대한 용기를 갖는 것이 삶에 기본이라고 일깨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다. 이에 더하여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 이에 바탕을 둔 자기희생적 헌신에 눈을 뚠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등을 해설하면서, 그는 감당하기 너무도 벅찬 죽음의 경계선에서 생기기 마련인 비관주의와의 싸움을 치열하게 치러낸다.
임철규의 그 깊고 깊은 상처
임철규가 <죽음>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의 자살이었다. 그리고 쓴 글이 '카토 그리고 노무현'이었다. 그런데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가 이 주제에 온통 매달려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한국 전쟁 바로 직후의 현실이었다. 토벌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빨치산의 최후였다.
"나는 그때, 목이 잘린 채 얼굴은 피로 물들고 머리카락은 눈썹 아래로 흩어져 내리고, 혀는 입술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그 빨치산의 모습, 그리고 잘린 목을 창끝에 꽂은 채 흔들어 대며 트럭 위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며 지나가던 토벌대의 모습을 무서움에 떨며 지켜보았다. (…) 이 책을 내놓게 된 보다 근원적인 동기는 어린 나이로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벅찬 그 아픈 경험과 기억의 상처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숱한 역사의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들이 거듭 쌓이고 있을 뿐"이라며 이런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가치를 새롭게 깨우칠 수 있는 길이라고 인식한다. 오랜 고통 끝에 만나게 되는 구원에 대한 성찰은 이렇게 해서 얻어질 수 있다.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면…
임철규의 <죽음>은 희망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무겁다. 하지만 그 무거움 속에 담긴 진지함과 우리도 모르게 경험하게 되는 카타르시스는 죽음을 마주하는 용기와 함께 삶에 대한 용기를 아울러 기르게 한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죽음을 딛고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2012년 12월의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로 "희망의 멸종"과 "역사의 실종"을 예감하면서 흔들리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죽음을 통과한 뒤에 비로소 부활이 있다. 부활의 본래 의미는 봉기다. 사람들마다의 가슴에 생명의 횃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질 날을 위해, 지금 우리는 이 "시대의 죽음"을 꿋꿋하게 감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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