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송년호(121호)는 '2012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2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한 가지 고백. 재작년에 처음 출판사 폴라북스에서 '필립 K. 딕 걸작선'을 펴내는 기획을 들었을 때, 나는 응원하면서도 '반만 나와도 성공이지' 하는 심정이었다. 필립 K. 딕은 훌륭하지만, 쉽게 널리 읽힐 것 같은 작가는 아니었다. 시리즈물이 꾸준히 나오려면 만드는 이와 읽는 이 모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쓰고, 내고, 읽어야 한다.
많은 블록버스터의 원작이니 찾는 독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 매력에 빠져 완간될 때까지 걸작선을 꾸준히 찾아 줄 이가 몇이나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의 우려도 있었다. 딕은 번역하기 쉬운 작가가 아니다. 번역자와 편집자의 시간과 노력 뿐 아니라, 조금 과하게 말하자면 생기를 소진하는 작업이 될 터였다.
그리고 작년, <화성의 타임슬립>(김상훈 옮김), <죽음의 미로>(김상훈 옮김), <닥터 블러드머니>(고호관 옮김) 첫 세 권을 시작으로 '필립 K. 딕 걸작선'이 나오기 시작했다. 훌륭한 번역, 매력적인 표지, 구석구석까지 품을 들인 티가 나는 아름다운 책이었다. 너무나 기쁘면서도 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계속 나올 수 있는 거야? 이 정도의 질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갈 수 있는 거야? 자그마치 열두 권인데?
이런 나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2012년 한 해 동안 폴라북스의 '필립 K. 걸작선' 선집은 한 권 한 권, 우아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꾸준히 세상에 나왔다. 열두 권 중 열한 권이 무사히 출간되어, 마지막권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내년에 나오면 대망의 완간이다. 무척 바랐지만 차마 마음껏 기대하지 못했던 거대한 기획이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과거에 황금가지에서 번역 출간한 적이 있으니, 선집 중 처음 한국에 소개되는 작품은 올해 다 나온 셈이다.
1월에 나왔던 <발리스>(박중서 옮김)는 필립 K. 딕의 작품 가운데에도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대표작 중 하나로, 진실과 거짓에 대한 깊은 고민과 혼란 그리고 각성이라는 딕 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작이었다. 3월에 나온 <성스러운 침입>(박중서 옮김)은 분명히 '딕 표'이되, <발리스>에 압도당한 독자들에게 조금(아주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 법한 이야기였고, 4월에 나온 <티모시 아처의 환생>(이은선 옮김)은 딕이 어떻게 '컬트적인' 존재일 수 있는지, 어째서 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과학 소설 독자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를 포함한 다른 분야의 각종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 <작년을 기다리며>(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펴냄). ⓒ폴라북스 |
'필립 K. 딕 걸작선' 덕분에, 2012년 한 해 동안 한국의 독자들은 딕의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한 권씩 더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13년을 앞둔 지금, 우리는 이제 독서 환경에 딕의 빗돌들이 존재하는 세계로 진입했다. 2012년 올해의 책을 꼽자면,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말하자면, 그러니까, 역시 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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