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상기해보겠습니다. 어느 날 왕에게 두 명의 재봉사가 찾아와 훌륭한 옷을 지어주겠다고 하였으나 이들이 지어준 옷은 이른바 '나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착한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옷'이었지요. 임금은 이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행차를 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들은 입이 마르게 그 '아름다운 옷'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쳤지요.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습니다.
교과서에서 이 글을 본 뒤, 내내 두 가지가 궁금했습니다. 하나는 그 임금님이 속옷을 입었을까? 아무래도 재봉사가 훌륭한 옷을 지어준다고 했으니, 아마 곤룡포처럼 겉에 걸치는 옷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속옷은 입었을 것이고. 제가 기억하는 교과서에는 삽화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도 혹시 속옷을 입고 있었던 듯합니다. 속옷조차 입지 않았다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궁금했던 점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외친 소년과, 그 소년의 말에 맞장구치며 웃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사했을까? 아니면 잡혀가서 죽도록 맞았을까? 심한 경우, 음,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겠지요. 바람직한 경우는 그 소년의 말을 계기로 다들 정신 차리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었을까? 임금은 자신의 허위의식을 반성하고 속은 것을 인정했을까? 사람들은 덩달아 맞장구친 자신들을 부끄러워했을까? 재봉사들은 처벌을 받았을까?
▲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
광해군에 대한 인식이 벌거숭이 임금님의 그것과 비유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자의 힘은 형식 논리로 보면 비유되기 어려운 사태를 뚫고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동화 이후가 궁금합니다. 우리의 논의는 어디쯤 와 있을까?
김덕련 기자의 글에 대한 답변치고는 많이 늦었습니다. 10월 5일에 기사가 올라왔으니까요. 그 사이에 난 20년 동안 끙끙거리던 숙명적인 책 하나를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관련 기사 : 이병헌의 <광해>는 새빨간 거짓말? 진실은 이렇다!)
김 기자의 고마운 기사에 대해서, 그리고 대학원 다니는 제자가 동료 연구자들과 의견을 나눈 뒤 정리하여 보내준 질문 몇 가지, 프레시안 12월 7일에 실린 이권우-이현우(로쟈)-김용언 세 분의 대화 '3인 1책 전격수다'의 논의도 염두에 두고 코멘트를 하겠습니다. (☞관련 기사 : 2012 광해의 맨얼굴, 박정희인가 노무현인가?)
이야기를 위하여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나를 소개하면 사람들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그게 싫었습니다. 원래 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무슨 역사학자가 옛날 얘기나 하는 사람인 줄 아느냐, 이렇게 생각했지요. 귀여운 자부심?! 지금 보니 재미있는 얘기 해달라는 분들이 맞았습니다. 역사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딴에는 이번에 처음 그걸 시도한 겁니다.
"역사는 첫째, 진실의 축적이고, 둘째, 줄거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폴 벤느)
흔히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보기 나름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부분적으로. 그러나 진정한 역사 공부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史實)은 늘 구멍이 뚫려 있고, 사람의 눈은 다르다는 그 지점에서 말입니다.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상황을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을 찾아나가는 지루하고 재미있고 때로는 숭고한 여정, 그것이 역사 공부입니다. 그래서 역사 공부는 연대의 삶, 공감의 삶, 배려의 삶을 확장시키는 토대라고 굳게 믿습니다.
염두에 둘 점
김덕련 기자의 글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먼저 세 가지 점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첫째, 제 책에서도 강조했지만 광해군 대의 내정과 외교는, '내정은 좀 문제지만 외교는 잘했다'는 식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둘은 연동되어 있습니다. 대동법, 경연, 궁궐 공사, 계축옥사, 파병은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 점을 좀 더 드러내지 못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쓰긴 썼는데….^^.)
둘째, 시스템은 중요합니다. 의회, 법원이 없이 근대 국가를 논의할 수 없듯이, 경연, 언론을 빼고 조선을 말할 수 없습니다. 언론 부분은 아직 자료를 준비 중이라서 이번에 다루지 못했지만, 경연을 그 정도면 이해가 될 듯합니다.
셋째, 비-역사(anachronism)의 경계입니다. 광해군 시대가 인조 시대의 원인일 수는 있어도 그 역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 조선은 지금과 다른 생활양식과 원리를 가진 나라입니다. 뻔한 말이지만,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지나간 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속고 왜곡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광해군 대를 제대로, 심각하게 공부하면서 가졌던 격한 소회였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전 민족적으로 씌워지지 않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백주대낮에 이 땅에서 버젓이, 교과서, 텔레비전, 논문, 저서, 칼럼, 수필을 가리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우리를 홀리고 있었습니다. 혹세무민! 이 말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3년 전 연구 노트인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을 쓸 때의 일입니다.
"내가 이렇게 광해군의 외교를 혹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광해군 재평가의 선두 주자였던 이나바는 광해군을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린(澤民)'의 군주라고 불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나바는 광해군 대 국내 정치를 거의 도외시했다. 제대로 <광해군 일기>에 나온 국정의 난맥상을 읽었다면, '택민'이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비하여 최근의 연구자인 한명기는, "이나바 이래 광해군의 이른바 '중립 외교'가 지니는 긍정적 측면만을 지적하는 데 매몰되어 궁극적으로 그의 한계라고 할 수 있는 측면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커다란 문제점"이라고 아주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2000년의 저서인 <광해군 :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문제의식은 희석되고 다시 이나바의 문제 틀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8976965353#}
▲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
첫째로, 당초 사대주의 등 대외 정책에 대한 인식 틀에서 보면 한명기가 이나바의 프레임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압도당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이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 정책'을 강조하려다보니 균형 감각을 상실했고, 그 균형 감각의 상실이 내치와 외교의 연관성에 대한 관찰을 놓쳤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저서에 동원한 자료나 저자의 문장에 비추어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 사라진 '내치와 외교'의 연관을 다시 살펴보고, 단순히 이것은 잘했고 이것은 못했다는 식으로 늘어놓는 재평가 말고, 제대로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평가해 보자."
그래서 북인(北人)의 학풍에 대한 몰개념적 인식, 대동법 시행 과정과 주체에 대한 왜곡, 궁궐 공사 규모와 영향의 축소, 대외관계 인식의 결과론과 패배주의, 식민주의 프레임,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왜곡의 전면적인 내면화(內面化)를 지적했습니다. 그 내용은 <조선의 힘> 6장 '부활하는 광해군'에 실려 있습니다.
인식론적 반성의 의미
김덕련 기자의 서평에서는 유예했지만, 광해군 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반성, 즉 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가를 묻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근대 역사학의 깊은 콤플렉스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른바 '과학적 역사학'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그 콤플렉스는 사회경제사학의 학문적 기여와 민주주의적 지향에 의해 은폐되어 왔습니다. 동시에 스탈린주의에 의해 오염된 역사적 합법칙성의 교조주의도 은폐해왔습니다. 아래는 이번 <광해군>에 쓴 프롤로그의 일부입니다. 한 번 복습 해볼까요.
"광해군이 부활한 토양은 근대 역사학의 근대주의이다. 사실과 가치, 두 측면에서 근대가 목적론적으로 도달해야 할 시대로 설정되는 것, 그것이 근대주의이다. 사실의 측면이란 어느 사회나 적절한 과정을 거쳐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고, 가치의 측면이란 자유와 평화, 인권의 실현을 위해 근대는 바람직한 시대라는 말이다. (…) 이런 유의 사유 방식, 이를 나는 근대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이전 시대와 위계를 설정하는 진보 관념이 자리를 잡는다. 그 진보 관념은 막강한 과학의 힘과 생산력이 뒷받침한다.
물론 근대주의 역사학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로스토우식 발전사관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 합리화 수준의 전자와는 달리, 역사적 유물론, 사회경제사학의 발달은 역사를 정치사, 그중에서도 뛰어난 개인이나 국왕을 중심으로 서술하던 한계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개인에서 사회 구조나 형태로 눈을 돌림으로써 인간의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는 데 진전을 가져왔다. 경제사나 사회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이 그 예이다. 그러면서 역사 발전의 동력을 주로 영웅이나 초월적 존재 또는 우연에만 맡겨버리던 타성에서 벗어나, 생산하는 사람들, 곧 농민, 민중을 포착하게 되었고, 노동, 여성, 제3세계 등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사 연구에서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회와 경제 구조, 농민의 운동, 변혁에 대한 연구가 늘어난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학 발전의 징표였다. 역사학은 20세기 후반기 민주주의와 시민 의식 성장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역으로 역사학이 그 성장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사 연구는 곧 역사의 이행(移行)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더구나 덤덤한 이행도 아니라 식민지로의 전락이라는 '아픈 이행'을 설명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조선은 식민지로 연결되었고, 그에 따라 '변명'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또는 필연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든지, 식민지가 아니라 자생적인 근대로 갈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식민사관이라면 후자는 민족사관 등 이른바 식민사관을 극복하겠다고 생각한 입장을 대변한다. (…) 식민사관 비판의 프레임이 우리가 배워온 근대, 즉 서유럽의 근대 모델이었다. 진보사관은 본산인 서유럽에서도 막을 내린 지 오래고, 일부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다. 조선 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론의 근거로 제시했던 경영형 부농의 존재 등은 설득력을 잃었다. 성리학에 대한 대립 개념으로 출발한 실학은 아직도 개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사대론을 부정하려고 민족주의론을 들고 나왔지만 사대라는 동아시아 외교 방식은 엄존했기에 부정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 정치계에서 붕당은 부정적 존재였다.
결론적으로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은 미흡했다. 아니, 애초에 저 논리로는 불가능했다. 첫째 이유는 식민사관을 비판했던 논거와 담론이 식민사관의 연장인 서유럽 제국주의 프레임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비판이 되지 않았던 데 있다. 둘째, 식민사관 비판의 실증적 근거나 프레임이 되었던 담론 자체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김경원 옮김, 이산 펴냄)을 읽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학에서 변증법을 떼어내고 '역사적 유물론'으로 보는 것, 그의 관점에 나는 동의합니다. 변증법이 결국 현실을 합리화한다는 그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역사는 변증법이건 뭐건, 논리적 전개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역사는 (법칙이 아닌) 이야기 이상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폴 벤느와 에릭 홉스봄이 다르면서도 같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의 질문은 두 가지이다. 첫째, A 사회와 B 사회는 어떻게, 왜 다른가? 둘째, A 사회는 A' 사회로 갔는데, 왜 B 사회는 A' 사회로 가지 않는가?" (에릭 홉스봄)
다시, 역사 본연의 질문으로
그래서 다시 읽었습니다. 이제는 광해군 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유령을 드러내기 위해 담론이 딛고 있는 실제 역사 현실을 파보았던 셈입니다. 여전히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 생각했던 역사를 설명하는 세 가지가 유효합니다.
"인간은 맨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타고 나면서 주어진 조건이 있다. 벗어나기 어렵다. 왕이라는 것, 학자라는 것, 농민이라는 것……. 때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것, 협잡꾼 집안이라는 것, 이도저도 아닌 집안이라는 것……. 충청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얼굴이 누렇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 무엇보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경제학적 조건 등. 이들은 객관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어진 조건대로 살지 않는다.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때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뭔가 비전을 만들고 추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아파트로 자신을 표상하기도 하고, 헌신으로 자신을 표상하기도 하고, 공부로 자신을 표상하기도 한다. 목적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이다.
객관적 조건은 역사를 해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함에도 환원론(還元論)의 우려가 있다. 경제 결정론, 지리 결정론, 환경 결정론이 그것이다. 객관적 조건만 고려하면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책임을 질 수도 없다.
객관적 조건의 맞은편에 의지를 강조하는 목적론(目的論)이 있다. 그 극단에 신(神)이 있다. 이런 관념론적 목적론은 흥미롭게도 속류 유물론의 목적론과 통한다. 목적의식만 강조하면 도덕적 요청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태를 설명할 때 빈곤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취약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광해군 시대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 또는 욕망 그리고 사건들의 우연성을 살펴보고 싶었다. 시스템의 작동은 문치주의와 재정의 측면에서 경연, 사관, 부세 제도인 대동법을 잡았다. 외교를 살펴본 대목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으나 이번 연구에서 큰 비중은 없다. 사람들의 비전 또는 욕망은 정치 세력의 교체, 수차례의 옥사, 궁궐 공사를 대상으로 했다. 사건의 인과성보다는 우연이 포함된 상관성을 찾아보았다. 그래야 설명도 가능하고 책임도 물을 수 있고 또 무엇보다도 긴장할 수 있고 아쉬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논의가 저의 작은 책 하나로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논의일수록 차분히 가는 편이 좋지요. 고맙게도 <조선의 힘> 이래 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동료 학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차차 어떤 모습으로든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논할 때 함께 논의되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대동법과 동의보감
한동안 TV 역사 프로그램은 물론 연구자들도 광해군의 대동법을 칭찬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까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아무튼 광해군의 전교로 대동법이 시행된 것은 사실 아니냐!"고 항변하는 정도인 듯합니다. 네, 맞습니다. 대동법을 시행할 선혜청을 설치한 일이 광해군의 전교를 통해서인 동시에, 대동법이라는 정책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함은 물론, 기자헌 같은 방납 세력을 옹호하고 이원익, 황신 같은 추진 주체를 조정에서 내쫓은 것도 광해군입니다. 이럴 때 정상적인 역사 연구자라면, 광해군이 대동법을 찬성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요, 반대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요?
{#897696800X#}
▲ <광해군>(한명기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
선조 때부터 진행된 공납제 개혁, 특산물을 내는 세제(稅制) 개혁의 연장이 대동법이었지요. 그 공감대가 있었기에 광해군 원년에 대동법이 공론에 힘입어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혜청이 설치된 뒤 어떻게 대동법이 광해군 이하 조정 관료들에게 홀대를 받고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제 책에서 상론했으니까 그만하겠습니다.
대동법의 폐기는 바로 궁궐 공사와 상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궁궐 공사는 각 지방의 석재, 목재, 철, 기술자를 동원하는 일, 다시 말하면 공납(貢納)의 확대였기 때문입니다. 대동법이 온전히 시행되려면 마치 흙탕물을 가라앉혀 물과 흙을 분리시키고 흙을 덜어내듯 세제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궐 공사로 인해 오히려 재정이 혼란해졌고 이로 인해 대동법의 효용과 의의를 불분명하게 만든 결과가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처음부터 대동법이 뭔지 몰랐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조만간 다른 학자가 광해군 대 대동법에 대해 저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문을 발표할 것이니까, 그것을 기대합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광해군의 업적이라고 하는데, 좋은 일이지요. 전란에 지친 백성을 치유하는 일이 급했으니까요. 그런데 <동의보감>은 선조가 편찬을 명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양살이 하는 와중에도 편찬을 계속하여 광해군 2년에 완성했던 것이지요. 아, 이 말은 바로 광해군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곧, 선조(宣祖))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광해군 일기> 권32 2년 8월 6일, 광해군의 전교)
국방과 외교
지난번 CBS <정관용의 시사 자키>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할 때, 사회자인 정관용 교수께서 저에게 "그래도 광해군이 후금의 정보도 알아보고 나름대로 대비를 했지 않았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답했지요. "임금이 되어서 그 정도도 안 하면 사람입니까?"
제 책에서 광해군의 외교나 국방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 <조선의 힘>에서 광해군의 '외교'에 대해 이미 서술했기 때문입니다. 또 저와 해석은 달리 하지만 한명기 교수의 책도 나와 있었기 때문에 사실 자체를 반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둘째, 광해군의 외교는 내정(內政)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고 판단했으므로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에서는 내치를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그리 호들갑을 떨 사안이 아닙니다. 기미책(羈縻策)은 말 그대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견제하는 선'에서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선이 주변국에 대해 가졌던 태도인데, 인조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도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을 수 있던 것도 이런 논리에서였지요. 이 사안은 제가 1992년에 이미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광해군의 실용주의(기회주의)가 국내 정치의 연장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그는 나라의 존망이 달리고 군사들의 목숨이 달린 심하 전투 전후에도 궁궐 공사만 걱정했습니다. 남한산성, 강화에 쌓아둔 군량미도 궁궐 공사에 투입하지요. 수군(水軍)도 궁궐 공사 자재 나르는 데 동원합니다. 정보 수집이요? 한명기 교수 책에서 하도 강조했기에 저도 유심히 보았지요. 한 교수 책에 출처가 나와 있지 않아 확인을 못하겠지만,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아무렴 비변사가 있는데 그 정도도 안 하겠습니까?
심하 전투 이후에 추가 파병을 거부한 일을 광해군의 외교 능력으로 높이 평가하는데, 파병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군사를 동원할 재원이 있어야지요. 또 인경궁 짓는 데 정신이 팔려서 파병할 생각이 안 한 것이지, 무슨 전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지요.
전에는 놓쳤던 사료였다가, 이번에 강독을 하면서 발견했던 사료가 있지요. 심하 전투에서 패배한 뒤 명나라 황제가 전사자, 부상자 가족에게 주라고 은(銀) 1만 냥을 보냅니다. 위로금이지요. 이 은, 광해군이 착복합니다. 그래서 궁궐 공사에 씁니다. 이쯤 되면 누가 조선의 임금인지 헷갈리지 않나요?
반정과 광해군
흔히 광해군을 내쫓은 반정(反正)의 명분으로 폐모살제(廢母殺弟 :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와 배명(背明 : 명나라를 배신함)을 말하지만, 제가 책에서 반정 이후의 교서(敎書)를 근거로, 내정 파탄이 먼저이고 외교의 혼선은 거의 마지막 이유였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적어도 반정 당시에 '배명'은 지금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 이유였던 셈입니다.
종종 비판적 안목을 가진 분들이 명나라와 미국을 동일시하여 조선의 대명(對明) 의식을 비판하는데, 사실 다르지요. 명나라는 왜적(倭賊)의 침입 때 도와준 나라이고, 미국은 내전(內戰)에 개입한 나라니까요. 차이가 있을 때는 그 차이를 인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아무튼 인조 반정을 '배명'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도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담론이라고나 할까요. 추적 중이니까, 조만간 뭐가 보이겠지요.
아무튼 광해군 대를 옹호하는 분들은 인조 반정 이후 외교나 민생에서 나아진 것이 없다며 반정을 깎아내립니다. 그래서 제가 <조선의 힘>에서 그런 이해를 '물타기'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실까요.
"예나 지금이나 본질을 흐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물타기'라는 수법이다. 광해군 부활의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형인 임해군,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일에 대해서는 '정치의 비극'이라느니, '정치권력의 속성과 허무함'이라며 '정치, 정치권력'의 속성 탓으로 돌린다. 그러니 나머지 죽어나간 사람들은 고려 대상조차도 아니다. 여기 또 다른 물타기의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반정 세력과의 비교를 통한 물타기이다. 즉 반정 이후에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는 논리이다. 말하자면 '그 놈이 그 놈이다', '갈아 봤자 별 수 없다'는 선거 구호의 조선 버전인 셈이다. 실제로 광해군 대 세력가들이나 반정 이후 공신(功臣)들이나 마찬가지라는 사료도 있다. 그러나 공신들의 이러한 특권 세력화가 끊임없이 견제되고, 공론화되었던 것이 인조 대 정치사였다. 즉 곪아서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서 딱지가 앉는 과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물타기 논리는 그 논리 자체로 역시 탈정치화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이 무능했다고 해서, 이승만 독재와 부패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인조 초반의 재정이나 민생 등 경제적 어려움은 광해군의 실정에서 비롯되었다. 타자에 기대어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이르면, 물타기 논리는 비열한 타락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때는 좀 제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습니다. 역사를 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고,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건데, 너무 지나치게 몰아붙이듯 광해군 '옹호론'을 비판했던 거지요. 조금 미안합니다. 그러나 물타기는 물타기입니다.
유효한 질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 이후의 민생이 광해군대보다 나아졌느냐는 질문은 유효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역사는 아무래도 평가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효이고, 다른 하나는, 역설적이지만, 인조 대의 정책을 허심하게 연구하기 위해서 유효합니다. 이 둘은 같이 가겠지요.
인조 초반, 이괄의 난을 비롯한 많은 반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광해군 대 잔여 세력들이 주동이 된 사건들입니다. 이 일은 실록보다 추안(推案)이라는 문서에 실려 있는데, 지금 번역을 마쳤고 내년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거의 매년 반란이 일어났고, 정묘호란 이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실록에도 나오듯이 공신 세력의 발호도 있었지만, 반정 이후 대체로 민생은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인조 원년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대동법 시행을 위한 재성청(裁省廳 : 세금을 줄이는 관청이라는 뜻)을 두고, 궁궐 공사 중지시키고, 12개 도감(都監 : 임시 관청)을 폐지하고, 세금을 탕감합니다. 정묘호란으로 곤경에 처하지만 병자호란 전에 양전(量田)을 통해 임진왜란 이전의 농사를 회복합니다. 이후 효종, 현종을 거치면서 대동법이 확대되고, 이어 양반에게도 호포를 거두는 호포제 논의가 균역법으로 이어지고, 노비를 평민으로 만드는 논의도 영조 때 법제화됩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나아졌습니다. 많은 연구가 있으니 한두 사료만 보고 전체 시대를 재단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 시대 상소를 보면 곧 나라가 망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그게 상소의 전략이지요.)
아마 인조 대에 대한 비판 중 중요한 것은 두 차례의 호란에 대한 대처일 것입니다. <조선의 힘>에서 임진왜란 당시를 서술하며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망가진 일상이 평온을 대신하였다. 불확실한 미래, 무엇보다 당장의 목숨은? 거기에 분노와 좌절, 치욕과 자존, 책임과 회피가 공존하며, 서서히 무려 7년 동안 사람들의 삶을 죄어들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럼에도 그 짓이겨진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수습해나간다. 그래서 나는 전쟁을 겪었던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 공과나 포폄을 일단 뒤로 미룬다. 그리고 공과나 포폄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을 경우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국자는 전쟁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설사 침략을 당한 것이라도, 어쩔 수 없이 당한 것이라도 국정을 맡은 사람들은 무한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인조를 비롯한 당시 관료들에게 비판이 가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 인조의 수모는 '패배와 굴욕'의 상징이었습니다. 인조의 굴욕을 나의 굴욕으로 느낍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전 제 감정일 뿐, 그것이 역사의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질문을 해야 합니다. 멀리, 왜 명나라 태조는 주변 17개국 중에 조선을 첫 번째로 조심할 나라로 꼽았을까, 하는 질문부터, 청나라는 왜 다른 나라도 아닌 조선에게 먼저 황제라고 부르라고 겁박했을까, 왜 청나라는 중원으로 들어간 이후 조선과 '적당한 거리'를 두었는가, 등등.
분명한 것은 조선이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중국을 제외하면 랭킹 1~2위(2위는 베트남)를 다투는 '위협이 될 수 있는 나라'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후금과 잘 지내야했다'는 결과론에서 패배주의의 냄새를 맡습니다. 광해군 15년을 '잃어버린 세월'이라고 말한 것은, 그 15년 정도의 세월 동안 나라가 정상적으로 움직였다면 후금에 대한 대처가 훨씬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