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2월 14일
장덕수 살해범은 범행 후 38시간 만인 12월 4일 오전에 체포되었다. 주범은 종로서 소속 경관 23세 박광옥이었고 공범은 연희대 학생인 20세 배희범이었다. 그들은 체포 직후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5일자) 이들의 배후가 금세 명확하게 거론되기 시작한 사실을 12월 7일자 <경향신문> 사설에서 알아볼 수 있다.
"테러 방지의 과제"
송진우 씨 여운형 씨 암살 동기의 시비는 차치하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장덕수 씨의 암살 동기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한편으로 송진우 씨 여운형 씨 암살의 배후 관계는 아직도 일반에게는 분명하지 못한 채 장차 마땅히 규명되어야 하겠거니와 이번의 장덕수 씨 암살에는 배후의 교사(敎唆) 관계가 확실한 것 같이 보도되는 것만은 오인으로 하여금 주목케 한다. 그러나 그 배후 관계가 명백해지더라도 그 동기는 역시 이해하기 곤란할 것이다.
(…) 장[택상] 총감은 장덕수 씨가 보호경관을 두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었다는 뜻을 발표하였으나 이번의 범인 박광옥은 한민당의 총무 김성수의 소개로 경관이 되었고 장덕수 씨는 동당의 정치부장이요 정계요로이니 신변을 보호하는 데 있어서는 박광옥 경관이 최적임자라고 장덕수 씨 자신이 직접 청원하였더라면 박광옥은 장덕수 씨를 암살하지 않았을 뻔하였을까. 현직 경관이 테러를 감행하는 현황으로서는 억만금이 있다 하더라도 보호경관을 청원할 수 없는 치안의 정도로서는 경찰을 경찰하는 방침이 필요하게쯤 되지 않았을까.
조병옥 경무부장은 12월 10일 장덕수 암살 사건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고 기자 회견을 열었다. 담화문에서 그는 범인 2명과 배후 관계자 5명을 체포했다는 사실과 이 사건 처리를 위한 수사위원회를 구성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장택상 수도청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경무부 수사국장 조병계와 부국장 이만종, 수도청 수사과장 노덕술과 사찰과장 최운하를 위원으로 하는 위원회였다. 이런 위원회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배후를 철저하게 파헤치려는 강력한 의지를 알아볼 수 있고, 친일 경찰의 대표 격인 노덕술과 최운하가 나선 데서 임정 세력이 표적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기자 회견에서는 이런 문답이 오갔다.
(문) 장덕수 살해범에 대한 배후 관계가 발표되지 않는 이유는?
(답) 동씨 살해 계획의 전위 단체 8명중 1명이 미체포이고 배후 관계는 4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계단이 미체포 중에 있으므로 그 전모를 발표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체포는 오직 시간문제이니 궁금하겠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발표하겠다.
(문) 장 씨 살해범 박은 제3관구 경찰청에서 무기 은닉죄로 파면당한 자를 신원 조사도 하지 않고 등용하였다 하며 경찰관 채용에 있어서 왕왕 파면하였던 자를 다시 등용하는 일이 있는데 파면의 의의가 없지 아니한가?
(답) 박의 채용 절차에 불미한 점이 있었다는 점은 미안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면 경찰 재등용에 대한 것은 파면 대장을 정비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겠다.
(문) 암살범에 대한 형벌이 너무나 현사회 조치에 맞지 아니한다고 보는데 부장의 견해는?
(답) 지난 사건에 대한 사법 당국의 처단을 보면 동기론과 증거론에 치중하는 까닭에 현 사회 조리에 맞지 아니한 점이 없지 아니하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특별 재판에나 그렇지 아니하면 군정 재판에 넘길 계획도 가지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1일)
8명 중 체포되지 않고 있다던 마지막 1명 김석황은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1948년 1월 16일에 체포되었다. 김석황(1894~1950년)은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고 상해 임정에 참여했는데 무장 항쟁에 힘을 쏟고 군자금 조달 활동을 많이 벌였다. 1920년 말 일경에 체포되어 10년간 투옥되었다. 해방 후 한독당 중앙위원과 국민의회 동원부장으로 활동했고 1946년 6월 23일의 반탁 시위를 배후 교사한 혐의로 엄항섭과 함께 체포당한 일이 있었다.
경찰이 한독당-국민의회 쪽을 배후로 보고 있던 사실은 12월 12일로 예정되어 있던 국민의회와 민대의 통합 대회 개최가 허가받지 못한 데서도 드러났다. 장택상 수도청장은 기자회견에서 "민대와 국의 합동 대회를 허가치 않는 이유는?" 하는 질문에 "국민의회 간부 중에는 이번 사건 관계자가 섞여 있어서 경찰로서는 시에 대하여 동 대회 집합을 추천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12일)
한독당-국민의회 방면이 배후 수사의 대상이 된 사실은 분명하다. <자료대한민국사>에는 1947년 12월 16일자 <경향신문> 보도라 하여 조소앙과 엄항섭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가 등재되어 있는데 이 기사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20일 조소앙의 정계 은퇴 성명 기사를 보면 그가 조사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12월 23일) 기사는 그가 각정당협의회(정협)의 좌절에 실망한 위에 장덕수 사건으로 조사받으면서 상심한 결과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12월 12일의 국민의회-민대 합동대회 불발이 당국의 불허 때문인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밝혀졌지만, 실제로는 이승만 휘하의 민대 쪽이 은근히 틀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합동 대회가 불발되자 민대 측은 바로 합동 보류를 결정하였고 이튿날 민대 대회를 열기로 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4일) 12월 13일 대회의 결의 사항은 이런 것이었다.
◊ 결의 제1호
1. 본회에 출석한 각대의원은 폐회 후 즉시 총선거대책위원회 정비 운동을 개시하여 소관구역 내 하급위원회 조직을 완료하는 동시에 미조직 인접 부군구(府郡區)에 대하여 조직을 책임적으로 촉진함으로써 금년 내에 남한 각지의 전 조직을 완료할 것.
2. 본회 대의원은 총선거대책위원회 전 조직을 동원하여 각 지방에 단기 4281년 1월 15일까지에 국민 등록에 의거하여 총선 거유권자 명부를 작성할 것.
3. 총선거를 자율적으로 진행하려는 우리의 독립 운동을 완수하기 위하여 민대로서의 선거법을 확정하기로 하고 제정 위원 7명을 선정할 것.
◊ 결의 제2호
본회가 민주 방식에 의하여 선출한 대의원으로써 조직된 본래의 성격에 입각하여 다시 중요 정당 사회단체를 포섭함으로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협력할 민족 대표단을 구성하되 대표단은 전원 50명으로 하고 상임위원회에서 전형할 것. (<동아일보> 1947년 12월 16일)
민대가 독자적으로 활동할 방향을 담은 결의 사항이었다. 국민의회와의 통합 가능성을 배제한 결의 사항이 바로 나온 데서 민대 측의 뜻을 읽을 수 있다. 국민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조소앙의 은퇴 결정에 민대 측의 통합 결정 번복도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의회-민대 통합은 김구의 이승만 노선 지지에 대한 보상이 분명했다. 그런데 김구 측이 장덕수 사건으로 불리한 위치에 몰린 것을 기화로 이승만이 '먹튀' 작전에 나선 것이 아닐지. 12월 9일 한독당의 정협 대표단 3인 제명도 이승만 측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정협에 앞장서던 조소앙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승만 측을 만족시키려는 김구 측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2월 15일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총선거 참가를 결의했다.
국의 민대 합동 문제 재대두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던 한국독립당에서는 15일 상오 10시부터 동당 회의실에서 제6회 제3차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는데 주로 UN위원단 입국 후에 실시될 남북 통일 총선거에 관한 건이 토의되었는바 동 총선거 참가와 그에 대비하여 시국대책위원회를 특설할 것이 가결되었다 한다.
한편 동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고 장덕수 사건에 관련된 한독계 요인 검속 건에 관하여 공식 비공식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며 동 사건에 대하여 신중한 대책을 고구하여 오던 동당에서는 16일 드디어 조각산 강거복 김의한 민걸 기성도 5씨를 하지중장에게 대표로 파견하여 현 사태에 대한 성명을 요청하였다 한다.
그리고 측문한 바에 의하면 지난 14일 김구는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여 장시간에 긍하여 이 문제에 관한 요담이 있었다는 바 수일 내로 김구의 중대 성명이 발표되리라 한다. (<서울신문> 1947년 12월 17일)
한독당에서는 뒤이어 담화문을 발표했다. 궁지에 몰린 모습이 역연하다.
고 장덕수의 살해 사건에 혁명 선배들이 다수 검거되어 있다 하여 그 진상을 타진하고 책임 당국의 답변을 듣고자 지난 15일 개최된 한독당 중앙상위에서 조각산 외 4명을 선출하여 하지 중장과 교섭하기로 되었다 하는데 동당 선전부장은 16일 대략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1. 혁명 대선배를 반동, 파괴, 분열, 모략, 암살범과 관련 있는 듯이 문초 운운은 절대로 관련없는 명백한 사실이 판명될 것이다.
1. 애국 지도자에게 체포령을 발하여 국민의 신뢰를 감하게 하던 당국은 전과를 거듭하지 않기를 바란다.
1. 국민의회가 암살을 결의하지 아니한 이상 국민의회를 중지케 함은 언론 집회 자유란 기본 권리를 약탈한 것이니 민주주의의 모독이다. 책임 당국의 답변을 요구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17일)
같은 날 이승만은 총선거 조기 실시를 재촉하는 담화문을 내놓고 있었다. 그에게는 득의의 상황이었다.
"과거의 약속 불이행으로 유엔 선거도 보장 난(難)-자주 선거 단행이 긴급, 이 박사 담"
본월 8일 하지 중장의 성명을 보면 우리가 한 말은 부분적 언론으로 허언이요 오해이니 자기의 말대로만 신종(信從)하라는 것이다. 의지(意旨)가 반대되는 경우에 처하여 이와 같이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왕에 성명한 글에 두 가지 의문되는 것을 명백히 대답한 것은 없으나 은연중 그 주의(主意)가 어디 있는 것은 우리가 추측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1년 전부터 언약하고 이때까지 준비하여 일변으로는 최촉하며 일변으로는 연타(延惰)하여 오던 총선거를 지금에 와서는 다 폐지라 하며 유엔 처분만 기다리라 하며 또 소위 입의의 보선법이라는 것은 일변으로 독촉하며 일변으로 장애하여 미루어 오다가 마지막 통과가 되매 그제는 공포했다 서명이 되었다 반포된 지 며칠 안으로 실행한다는 등 언론으로 지재지삼 연타하여 오다가 지금은 다 잘못되었다 하기에 이르니 이는 일국 민중을 대우하는 도리도 아니요 자체의 위신을 보호하는 신의도 아닐 뿐더러 총선거로 국회가 성립된다면 통치권을 행할 수 없을 터이므로 백방으로 천연하여 못하게 하는 것이니 유엔 대표단이 도착한 후에 사실을 묻고자 하거나 민의를 알고자 하면 누가 대답하며 설명할 것인가? 그분들이 와서 선거만 감시한다고 하나 사람 하나를 만나지 않고 의논도 없이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하다가 가리라고는 믿을 수 없나니 우리를 도우려 오는 손님들을 우리가 주인으로 접대와 협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므로 하루바삐 총선거를 행하여야 될 것이다.
국회나 정부를 건설 후에라도 사령장관이 거부권을 가진다는 그 문제를 우리는 오랫동안 거론치 않고 국회만 건설하면 이것이 다 자연 해결될 것을 기다려 온 것인데 총선거를 장애하여 이에까지 이른 형편에서 이 문제를 잠복시켜 둘 수 없는 경우이므로 우리가 공개로 선언한 것이요, 이대로 된다면 미국에 신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언명하였으며 따라서 미국 민중이 이것을 찬성치 아니하므로 비밀리에 주선하여 완성된 후에 공포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하지 중장이 이 문제를 사실 아니라고 성명하기를 속으로 바랐었나니 이때에 이런 성명이 있으면 많은 의혹이 타파되기를 위함이었으나, 하지 중장의 성명에 보면 확실한 언명이 없고 오직 유엔의 감시로 총선거를 하여 정부 수립만 하면 점령군이 철퇴될 것이니 무슨 점령군의 간섭이 있겠느냐는 의미로 막고 말았으니 이런 주의가 내막에 잠복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유엔위원단이 오면 태산 같은 장애가 다 빙소설해(氷消雪解)가 될 줄로 믿으나 소련은 벌써 보이콧한다고 성명하였는데 어떻게 한다는 방식은 없고 그저 기다리면 다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유엔위원단이 남북 총선거를 못하게 되면 세월만 허비하고 앉은 중에 우리는 또 아무것도 못하고 사령장관 통치 하에서 죽으나 사나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민족 자결주의라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냐.
우리 사활에 관계한 이런 중대한 문제를 몇몇 당국들만 알고 속에서 작정하여 행한다는 것은 심히 위험하고 또는 민주 정체에 합리가 아니고 공개로 토의하여 다수 민의대로 귀정(歸正)하려는 터이므로 누구에게나 악감과 온의(慍意)를 품을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이에 관계된 민중은 각각 자각으로 자결주의를 표시하여 정당히 해결되기를 역도할 것이요 지금에 등한히 보고 앉았다가 일이 잘못된 뒤에는 숙원숙우(孰怨孰尤)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7일)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