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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생명? '고무 한 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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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과 생명? '고무 한 장' 차이!

[프레시안 books]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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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이나 철학의 입문서를 펼쳐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런 내용의 삼단논법을 구경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1) 사람은 모두 죽는다. (2)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3)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대전제인 (1)과 소전제인 (2)가 참이므로, 결론인 (3)은 필연적으로 옳을 수밖에 없다.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우리는 이 삼단논법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보자. 삼단논법은 대전제가 옳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즉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논리학 교과서에서 예문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시간과 공간과 인종과 문화 등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성립하는 참인 문장이다. 저 명제는 삼단논법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이라고 말한다면 과도한 표현이겠지만, 어쨌건, 철학에서의 확실성에 대한 논증은 그만큼 죽음의 확실성에 기대어 서있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펴냄)는 바로 그 주제, 즉 죽음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책이다. 예일 대학교에서 17년째 "Death"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고 있는 저자는 자신이 속한 미국 철학의 분석적 경향에 따라, '죽음'이라는, 인간이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건 겪을 수밖에 없으며 피할 수도 없는 삶의 한 국면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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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의 엄청난 성공 이후 국내에는 이른바 '하버드 명강의',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비리그 명강의'가 모종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단지 '하버드'나 '아이비리그' 같은 단어 자체에 반감을 느끼거나 표할 이유는 없을 듯하다. 반공(反共)이 우리의 국시가 아닌 것처럼 반미(反美) 또한 어떤 도덕적 당위가 아니다. 미국의 지적 경향을 일부러 거부한다고 해서 한국의 정신적 삶이 저절로 풍족해지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책이나 음악, 영화 등 문화적인 것들은 일종의 붐을 형성해서 국내에 수입되는 경향이 있다. 그 와중에, 그런 열풍이 없었더라면 국내에 소개되기 어려웠거나 소개되었더라도 조용히 잊혀버렸을 것들이 큰 자취를 남기기도 한다. 1990년대의 영화 열풍으로 인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명작 <희생>이 국내에 수입되어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물론 관객의 절반 이상은 영화를 '본' 게 아니라 극장에서 한숨 푹 자고 나왔겠지만, 민둥산보다는 아까시나무라도 우거지는 게 낫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객들의 지평 위에 지금 우리가 아는 '웰메이드 한국 영화'의 감독들이 서있으니 말이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엘도라도 펴냄). ⓒ엘도라도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대단히 진지하고 본격적인 책이다. 물론 책의 표지에는 청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교수가 교단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이야기하는 사진이 담겨있다. 책에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유튜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Open Yale Courses'(☞바로 보기) 동영상을 보면, 케이건은 정말 책상 위에 앉아서 너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은 템포로 마치 소설을 읽어주듯 죽음에 대한 분석 철학적 논의를 진행한다. 그는 말하자면 '캐릭터'가 되는 인물이며, 그래서 17년째 같은 강의를 인기리에 진행하고 있을 터이다. 그 내용은 결코 녹록치 않지만, 어차피 수업 시간에 말로 죽 떠드는 내용이 그대로 책에 담겨있는 만큼, 다소 느린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나가면 이해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요컨대 이 책은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하버드 인문학' 열풍이 없었다면 이 책이 국내에 수입되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논의의 방식이 분석 철학의 그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죽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분명히 미국의 맥락 속에서 죽음에 대한 담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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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삼단논법을 정립한 이후 '언제나 참인 명제'의 대표 격인 자리를 잃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범주가, 특히 20세기에 들어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예전에는 사람의 범주에 속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어떤 존재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아기의 100일을 축하한다. 옛날에는 생후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아기들이 상당히 많아서, 태어나자마자 축하하는 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해 개발된 국가들의 영아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한편, 1960년 이전까지 여성들은 자신의 생리 주기를 조절할 수 없었지만, 최초의 호르몬제 피임약인 에노비드가 개발되면서 본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남성용 피임 도구인 콘돔 및 기타 피임 도구도 널리 쓰인다. 더불어 외과적으로 태아를 모태로부터 제거하는 기술, 즉 낙태 수술의 안전성 역시 급격하게 향상되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건강한 남녀가 지속적으로 성행위를 하면 아기가 생겼다. 그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여성들은 비공식적인 경로로 배우고 시행하는, 온갖 위험한 낙태 시술을 동원해 원치 않는 출산을 막았다.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는 여성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기독교적 윤리 체계 속에서 각각 영혼을 지닌 신의 피조물이었을 테지만, 그만큼 영아 살해와 영아 유기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병에 걸리거나 잘 먹지 못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는 아기들이 부지기수였던 것도 물론이다.

이제 다른 세상이다. 출산의 원인이 되는 섹스와 순전히 쾌락만을 위한 섹스는 '고무 한 장', '알약 하나' 차이일 뿐이다. 설령 임신했다 해도 원치 않으면 병원에서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피임약 복용이나 낙태 수술의 부작용을 논외로 한다면, 적어도 지난 세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산모는 태아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다. 애초에 임신을 할지 말지, 한 걸음 더 나아가 잉태된 아기를 낳을지 말지,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세계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기독교적 가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아기들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적·문화적 이슈에서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은 태아가 잉태되는 순간,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난 수정난이 자궁에 착상되는 순간부터 영혼이 어머니를 통해 들어가며, 따라서 그때부터 태아는 사람이라고 간주한다. 다른 교파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낙태는 살인이다.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수정 후 6주까지의 낙태는 합법적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 유명한 로 앤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은 미국을 반으로 쪼개놓았다. 지금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기세등등한 미국의 중부 및 남부 지방과, 개방적인 가치를 일찍부터 개발하고 수용한 서부와 동부의 해안 지방 사이의 갈등이, 낙태 혹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두고 표면화된 것이다. 지금도 낙태 합법화 혹은 불법화 논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다.

태아는 사람인가?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가 죽는 것이 죽음인가? 전자와 달리 후자는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인 탐구를 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덧붙여 의학 기술 발전과 더불어 평균 수명이 늘어났고, 늙고 병든 상태로 오래 사는 일이 과거에 비해 턱없이 쉬워졌다. 다시 말해, 안락사 혹은 존엄사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 고민해볼 여지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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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가톨릭의 지적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노트르담 대학 신학과가 아니라 동부 리버럴의 산실인 예일 대학교의 철학과에서 진행된 강의를 모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태아의 생명권과 안락사 문제 등에 있어서 어느 편에 설지 예상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저자는 1장에서 8장까지 신중하고도 차분하게 '영혼'이 아니라 '육체'가 인간의 본질이며 모든 것임을, 그럼에도 왜 우리가 기존에 알던 존엄한 인간의 이상을 포기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논증한다. 저자는 애써 기독교라는 단어를 괄호 속에 집어넣지만, 그가 "죽음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이라고 소개하는 것들은 거의 모두 기독교적 가치관 위에 서 있다. 그렇게 논의가 진행되다가 9장 '죽음은 왜 나쁜 것인가'에서 한 논증이 등장한다.

영혼이 지옥에 끌려가지 않는 다음에야, 내가 죽고 나면 그 무엇도 내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속된 표현으로, 죽으면 땡이다. 그렇다면 죽음 그 자체가 죽는 사람에게 나쁠 수는 없다. 죽으면 땡이기 때문이다. 물론 죽는 과정에서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죽음으로써 상실하게 될 수많은 가능성과 쾌락을 생각하며 안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과 고통도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때의 일이고, 죽으면 끝이다. 저자가 인용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논증을 그대로 옮겨보자.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306쪽)

이렇듯 우리가 존재해야 뭔가가 우리에게 좋거나 나쁠 수 있다는 하나의 명제가 성립 가능한데, 저자는 그것을 '존재 요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존재 요건을 근본적으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에피쿠로스처럼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고, 따라서 죽음 자체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 요건을 부인한다면 현재 존재하는 사람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죽음'으로 인해 피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죄책감과 동정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계산에 따르면 그 수는 대략 다음과 같다.

35억 명의 여성 × 30년의 가임 기간 × 1년에 12개의 난자 × 35억 명의 남성 × 50년의 사정 기간 × 1년에 365회 사정 × 하루에 4000만 개의 정자 = 대략 300만 명의 10억에, 10억에, 10억 배(3×1033)(315쪽)

존재 요건과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지는 태아'라는 주제는 수많은 (미국) 철학자들의 논의 대상으로, 여기서 저자는 특별한 답을 주지 않은 채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을 짚어본 것은 숫자가 동원되어 뭔가를 계산하는 듯 보이는, 극히 분석 철학적인 지점에서조차, 그 뒤에는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분석 철학은 분석적이지만, 모든 담론들이 그러하듯이, 스스로의 논의가 서 있는 지점까지 분석해내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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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듯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독보적인 성공과 그로 인한 '하버드 인문학' 혹은 '아이비 인문학'의 유행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진지하게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는 분석 철학 입문서가 오래간만에 소개될 수 있었으니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과연 독자들이 이 책에서 상정하는 '독자'와 스스로의 거리 감각을 얼마나 잘 유지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이 책은 아이비리그, 그 중에서도 예일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록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취업이 어렵다고 하지만, 어쨌건 미국 사회에서 그들은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계급 사다리의 위쪽에 올라있다. 저자는 호들갑스럽게 그 사실을 강조하거나 하지 않는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본인 스스로 그것을 잘 의식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9장에서 죽음이 왜 나쁜지에 대한 결론을 얻은 후, 케이건은 영원한 삶이 왜 축복이 아닌지, 그러므로 왜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분석하며 독자 혹은 청중을 설득해 나간다. 우리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억지로 피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을 향해 일부러 달려가지도 말아야 한다고, 설령 삶이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웅변한다. 가로축에 시간의 진행을 놓고, 세로축에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불행을 놓은 후, 그래프가 어떻게 바뀌건 최대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좋은 선생님이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이 '자살은 죄악이다'로 끝난다면 그것은 저자가 비판하던 기독교 윤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뜨거운 감자인 안락사 논쟁에서 안락사 반대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저자가 몇 가지의 유보 조건을 둔 후 결국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윤리적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은 그래서이다.

어쩌면 그 사람이 심사숙고했고,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으며, 충분한 정보와 조언을 얻었고,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고 우리가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04쪽)

여기서 독자들은 자신이 겪을 수 있는 비참한 상황을 각자 머릿속에 떠올릴 수도 있고, 잭 케보키언의 자살 기계 앞에서 본인이 명료한 의식을 갖고 안락사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녹화하던 환자들의 영상을 곱씹어볼 수도 있다. 나는 그 각각이 어떤 양태로 진행될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국에 번역되어 온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는 한국인 독자인 우리들은, 좀 더 깊은 고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2012년 8월 3일, 이 아무개가 자신이 살던 13층 임대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향년 94세. 사흘 뒤, 유일한 친구이자 말벗을 잃은 차 아무개도 6층 복도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난간에 오르기 위해 유모차를 끌어다 그 위에 섰던 그는, 98년간의 긴 생을 그렇게 마쳤다.

두 할머니는 모두 심사숙고했을 것이고, 단짝 친구를 잃은 차 아무개의 경우 특히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의지처였으니 충분한 정보와 조언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발적이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느 시점부터 '죽을' 수 있는가, 자살은 언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등이 논의되는 책을 보며, 아이비리그의 명성과 분석 철학의 지적 쾌감에 우리가 온전히 몸과 마음을 맡겨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지금 여기의 맥락에서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그러한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는 독자들이 늘어날 때, '하버드 인문학' 열풍은 비로소 한국 사회의 지적 도덕적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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