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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치인 없는 대한민국이 불쌍하다!

[장석준의 '적록 서재'] 막스 갈로의 <장 조레스, 그의 삶>

벨기에 출신의 전설적인 싱어 송라이터 자크 브렐. 한국에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샹송 거장이다. 그의 작품 중에 '장 조레스(Jean Jaures)'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후렴을 반복한다.

멋진 젊음이여, 당신들은 질문하라
어두운 추억의 시절을
한숨 쉰 시절을
그들은 왜 조레스를 죽였는가
그들은 왜 조레스를 죽였는가


벌써 3년이 지난 2009년에 '프랑스의 꽃다지' 격인 밴드 '제브다(Zebda)'는 자크 브렐의 이 곡을 리메이크해 뮤직 비디오로 만들었다(YouTube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비디오의 맨 앞에는 19세기 풍 정장을 차려 입은 긴 수염의 사내가 나와 차분한 음성으로 연설을 한다. 프랑스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이상'이니, '용기'니 하는 단어는 귀에 들어온다.

그러고 나서 광산 노동자들,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참호 속의 병사들이 차례로 등장해 되뇐다. "그들은 왜 조레스를 죽였는가?" 마지막에는 등장인물들이 현대의 노동자들로 바뀌는데, 그 중에는 북아프리카계로 보이는 다수의 이주 노동자들도 포함돼 있다. 이들 역시 합창한다. "그들은 왜 조레스를?"

그들은 왜 조레스를 죽였는가? 아니, 그 전에 조레스는 누구인가? 그는 1859년에 태어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가다. 서양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막아보려다 암살당한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제브다의 뮤직 비디오는 그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세기도 더 전 사람인데, 단지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 대중의 노래와 영상물로 끊임없이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조레스는 프랑스 민중에게 그런 인물이다. 지금도 늘 '인민의 호민관'이라는 별칭을 동반하는 그럼 사람이다.

1981년에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조레스의 무덤이었다. 또한 사회당이 운영하는 재단 이름도 '장 조레스 재단'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 <뤼마니테(인류)>는 1904년에 조레스가 창간한 신문의 제호를 이어받은 것이다. 이렇게 사회당, 공산당 모두 경쟁적으로 추앙하는 인물이 또한 조레스다.

인민의 호민관의 전기

프랑스에서의 명망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조레스'라는 이름이 그렇게 낯익지는 않다. 그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운동권 안에서도 그는 간혹 부정적인 맥락에서나 언급되곤 했다. 독일에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장 조레스가 있었다는 식으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혁명 노선을 수정하고 의회주의를 연 인물쯤으로 이해되었다.

실제 조레스 생전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이 그러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조레스가 동료 사회주의자 알렉상드르 밀랑의 입각(入閣)을 적극 지지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밀랑은 드레퓌스 사건 때문에 프랑스 사회가 수구파와 개혁파로 양분된 것을 이유로, 개혁파 정부가 들어서자 '반수구 개혁'의 기치 아래 장관 자리를 받아들였다. 개혁파라고는 하지만, 다른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자본가 계급 정부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밀랑의 친구 조레스를 "애매한 말의 구사자", "소부르주아 이념가", "부르주아 개혁(개량)주의 이론가"라고 혹평했다, 코민테른 지도자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두 얼굴의 야누스"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물론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라 해도 레온 트로츠키는 "기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혁명가"라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출구 없는 모순 속에 빠졌지만 어정쩡한 타협 정치가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말이다.

이런 와중에도 국내에서 일찍부터 조레스에 주목하고 그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온 이가 있다. 노서경이 그 사람이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프랑스 노동계급을 위한 장 조레스의 사유와 실천 : 1885~1914>이다. 이 논문 자체가 조레스에 대한 깊이 있고 상세한 평전이다. 나는 다른 책이 아니라 이 논문을 통해 조레스라는 사람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쉬운 것은 이 논문이 단행본으로 출판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노서경은 다른 지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조레스를 알리고 그의 삶을 곱씹었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책세상 펴냄, 2001년)에서는 프랑스의 참여 지식인들을 소개하면서 그 중 한 명으로 조레스를 다루었다. 더 나아가, 조레스의 글들을 직접 번역하여 독창적인 윤리적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그의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사회주의와 자유 외>(장 조레스 지음, 노서경 옮김, 책세상 펴냄)).

그러다가 2009년에 드디어 한국에도 조레스의 전기가 출판되었는데, 그 번역자는 역시 노서경이었다. 막스 갈로의 <장 조레스, 그의 삶 :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당대 펴냄)가 바로 그 책이다.

<장 조레스, 그의 삶>을 읽기 전에 내가 접한 조레스 전기는 하비 골드버그(Harvey Goldberg)의 <장 조레스의 생애(The Life of Jean Jaures)>(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펴냄, 2002년)였다. 무려 600여 쪽의 대작이다. 영어로 쓰인 책들 중에서는 아마 더 나은 게 없을 것이다. 언젠가는 이 책도 우리말로 번역되길 바란다.

골드버그의 책이 차분한 어투로 조레스의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면, 갈로의 책은 시적 산문으로 일관한다. 마치 조레스를 동행 취재한 것처럼 현재 시제로 서술하고 있고 이게 처음에는 영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덧 그 박진감에 빠져들게 된다.

이 박진감은 막스 갈로라는 저자의 이력 그리고 <장 조레스, 그의 삶>의 집필 시기와 연관된다. 갈로는 국내에도 나폴레옹,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전기로 꽤 알려진 저작가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프랑스 사회당의 열혈 활동가다. 사회당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장 조레스, 그의 삶>을 보면, 그가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을 다룰 때 사회당 쪽 당파성을 주저 없이 드러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장 조레스, 그의 삶>(막스 갈로 지음, 노서경 옮김, 당대 펴냄). ⓒ당대
그런데 <장 조레스, 그의 삶>은 그런 그가 1984년에 낸 책이다. 1984년이라면, 미테랑의 좌파연합(사회당-공산당) 정부가 외환 위기 때문에 결국 좌파적 정책 기조를 포기한 '1983년의 U턴'으로부터 불과 한 해 뒤다. 프랑스 좌파의 역사적 패배가 진행되고 있을 때 갈로는 프랑스 좌파의 영원한 사표라 할 인물의 전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갈로의 조레스 전기가 한 세기 뒤에 쓰인 기록답지 않게 시종 팽팽한 긴장과 절박감을 유지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 태평한 영웅 신화를 읽는 기분이 아니라 현대의 정치 현실을 두고 마치 조레스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조레스의 예고된 죽음을 앞두고 갈로는 비극적 어조의 과잉을 보인다. 집필 시점의 패배적 정세를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둔 선배 좌파들의 패배에 투영하면서 지나치게 감정이입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갈로의 전기가 나옴으로써 한국의 독자들도 이제 조레스의 생애와 사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로써 조레스가 상징하는 독특한 인간상, 즉 '이념적 정치가'에 대해 성찰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오른쪽으로가 아니라 왼쪽으로 '전향'한 사람

가장 좋은 것은 갈로의 책을 직접 읽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조레스의 생애에서 인상 깊은 몇 단락을 소개하고 싶다. 그 중 첫 번째는 그가 사회주의자가 된 사연이다.

이 이야기를 훑어가다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모습과 극명히 대조되는 인생 역정을 마주하게 된다. 너무 상반돼서 비교 대상이 되는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그들 모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향'한 사람들인 데 반해 젊은 조레스의 전향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것도 재벌과의 대결 때문에.

1885년 총선에서 26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 조레스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공화파의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 당선자였다. 즉 개혁적 부르주아 정치인이었다. 남프랑스의 소부르주아 가문 출생이며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양성 기관인 고등사범학교를 나와 중학교 교사, 대학 철학 강사 등의 경력을 갖고 있던 그는 당시의 기준으로만 보면 노동운동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부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우선 공화파 의원으로 등원하고 나서 그가 겪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계승을 위해 공화파를 선택한 이상주의자 조레스가 목격한 현실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대의보다는 대자본가의 뇌물에 목매단 동료 공화파 정치가들의 추태였다.

게다가 그는 남프랑스의 공화파 내부에서, 금권 정치를 일삼는 재벌 솔라주 가문과 경쟁해야 했다. 정당 명부 비례 대표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뀐 1889년 선거에서 낙선한 뒤, 그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박사 학위 논문을 집필하는 데 몰두했다. 논문의 제목은 <독일 사회주의의 기원>. 이렇게, 한 좌절한 이상주의자는 사회주의의 세계로 접근해갔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조레스의 지역구가 될 남프랑스 카르모의 광산 노동자 투쟁이었다. 카르모의 광부들은 광산 소유주인 솔라주 가문과 싸우면서 굳건한 투쟁의 전통을 다져왔다. 1884년 지방자치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자 이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정치 세력화를 이룰 수 있는 장으로 시장 선거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1892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카르모 광산 노동자 운동의 지도자인 장-바티스트 칼비냐크가 시장 후보로 나섰다. 카르모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투쟁가를 합창하면서 대열을 이뤄 투표소로 향했다. 결과는 칼비냐크의 당선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솔라주 가문은, 더 이상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새 시장 칼비냐크를 광산에서 해고해버렸다. 이는 노동자 참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광부들은 파업으로 이에 대응했다.

1893년 총선은 이 파업 투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황에서 닥쳐왔다. 카르모 광산 노동자들은 칼비냐크 시장을 중심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노동자 후보'를 내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당시 카르모 시는 농민 유권자가 과반수였다. 소선거구제 아래서 승리하자면 농민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을 수 있는 후보가 필요했다.

최근 사회주의자로 전향했지만 사회주의자보다는 공화파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젊은 정치인, 솔라주 가문의 정적(政敵), 전 해의 파업 투쟁에 신문 논설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 선거대책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웅변가, 조레스가 그 적임자였다. 조레스는 카르모 광부들의 '노동자 후보'로 선출됐고, 결국 당선됐다. 이때부터, 조레스의 이름 앞에는 늘 "카르모 광부들의 대표"라는 말이 따라붙게 됐다.

밀랑 논쟁을 넘어 '혁명적 개혁주의' 노선의 구심으로

공화주의에서 출발해 사회주의자가 된 조레스는 몇 년 뒤 드레퓌스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화주의자들과 연대해 드레퓌스 파의 열혈 투사가 된다. 그리고 이게 나중에 드레퓌스 파를 중심으로 새 정부가 들어설 때 동료 사회주의자인 밀랑의 입각을 찬성하는 근거가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나 레닌의 조레스 비판은 바로 이 시기의 그의 노선에 집중된 것이었다.

밀랑의 입각을 놓고 프랑스뿐만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도 격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편에서는 조레스가 밀랑의 입각을 지지하고 나선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마르크스의 사위)가 이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지지자들이 조레스를 암묵적으로 지지한 데 반해 아우구스트 베벨 등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반대 여론을 주도했다. 밀랑 논쟁은 이렇게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 벌어지던 수정주의 논쟁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과연 노동 계급 정치 세력이 부르주아 국가에 참여하는 게 옳은가 하는 것이 인터내셔널 내의 이론적 쟁점이었다. 하지만 사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밀랑이 참여한 내각의 국방장관은 바로 파리 코뮌을 잔인하게 진압한 장본인, 갈리페 후작이었다. 어떠한 논리를 들고 나온다 하더라도, 사회주의자가 갈리페와 마주앉아 국사를 논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튼 밀랑의 입각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두 개의 당으로 분열했다. 1902년 입각 반대파인 게드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사회당(PS de F)'이 출범했고, 조레스 등 나머지 세력은 '프랑스 사회당(PSF)'을 창당했다.

하지만 1903년부터 밀랑이 노골적으로 반사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PSF조차 밀랑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서자, 통합의 가능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두 사회주의 정당의 통합을 강요하는 절박한 요인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생디칼리즘의 득세였다. 1901년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노동자의 단결권이 완전히 인정되자 1902년에 노동조합 전국 조직인 노동총동맹(CGT)이 등장했다. 사회민주당을 적극 지지한 독일 노동조합과는 달리 CGT의 노동조합 운동가들은 두 사회주의 정당 모두를 불신하고 노동조합 스스로 혁명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전까지는 지역의 노동조합 서기가 당조직 서기를 겸임하는 등 당과 노동조합이 일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이제 둘은 서로 경쟁하는 두 기관이 되어버렸다. '혁명적 생디칼리즘'(라틴 유럽 국가에서 노동조합은 '생디카'라고 불렸으며, 따라서 '혁명적 생디칼리즘'이란 '혁명적 노동조합주의'를 뜻한다) 노선이 등장한 것이다. CGT 지도자들은 총파업이 유일한 혁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밖의 어떠한 전술도 거부했다.

이러한 제3의 경쟁자의 부상은 두 사회주의 정당의 시급한 공동 대응을 요구했다. 결국 1905년 4월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라는 아주 이상한 이름을 달고 통합 사회당이 창당됐다. 이 합당 과정에서 조레스는 밀랑 사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지고 무대의 뒤편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하지만 조레스의 드라마는 오히려 이때부터였다. 통합 사회당은 여전히 유기적인 당이라기보다는 정파 연합의 성격이 강했다. 상임집행위원회와 사무총장 외에는 중앙당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당은 없고 광역 지부가 사실상의 기초 단위였으며, 각 광역 지부는 특정 정파가 선점하고 있었다.

SFIO가 비로소 하나의 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1908년의 툴루즈 당 대회를 통해서였다. 이 당 대회에서는 당내 우파의 개혁 노선과 좌파의 혁명 노선이 첨예하게 맞붙었다. 게다가 당 바깥에서는 생디칼리즘의 공세가 한창 달아오르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웅변가 조레스는 이상할 정도로 각각의 주장을 묵묵히 경청만 했다. 그러다가 대회 막바지에 회심의 열변을 토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당이 제대로 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오직 당이 혁명적 성격을 잃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역으로 그는 개혁의 주체가 되는 노동 계급이야말로 비로소 혁명의 주체도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레스는 말했다. 개혁이 누적된다고 해서 혁명이, 즉, 노동자 계급이 생산 수단과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는 "충돌과 위기, 파탄과 도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와 도약"의 시기에 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개혁 투쟁을 통해 단련된 프롤레타리아뿐이다.

제도 정치의 타협에 얽매인 "수동적이고 냉담한 개혁"이 아니라 "투쟁의 정신"과 "이상의 순수성"을 갖춘 "능동적이고 열광적인 개혁"이 비로소 혁명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즉, 혁명이 필요한 때 혁명을 단행할 주역, 혁명적 노동 계급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조레스는 "노동 계급의 주체적 능력의 고양"을 중심축으로 삼아, 개혁과 혁명 사이의 "긴장 속의 연속성"을 찾아내려 했다.

툴루즈 당 대회에서의 조레스의 연설 장면을 갈로는 다음과 같이 스케치한다.

"그가 기다리던 시간이다. 당은 불확실하고 분열되어 있다. 서로 다른 각각의 감수성을 고려하면서 공동의 사상을 중심으로 당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그는 힘차게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중단시키는 이들에게 "나는 지나치지 않고 모욕을 주지 않고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이 자리에는 친구들만 있다고 믿는다"고 응수한다. 그는 자신을 믿는다. 우파든 좌파든 그는 이렇게 답한다. "새 질서가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단번에 치자는 것도, 다수가 치자는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혁명 정신과 개혁적 행동은 대립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당은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실질적인 개혁의 당이다. 모든 개혁이 진보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다." 그는 말했고 그는 대회를 준비했으며 그는 대회를 끌고 가고 통일시켰다.

(…) 회의적인 라파르그에게 "인간은 멍에를 쓰고도 채찍질을 당해도 자기 힘을 의식한다"고 말하는데, "사회주의자로서 나는 노동자의 해방을 인류의 교양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다"고 깊은 목소리로 울부짖는데, 아픈 사회 현실에 대해 말하고 "우리는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이 봉기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통합에 대한 열정, 조레스의 종합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조레스 안에서 모든 경향이 서로 만난다. 그는 퍼즐을 맞추고 있다. 세 가지 관점을 펼쳐 보인다. 하나는 멀리 보고 마침내 사회주의에 도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상황적이다. 총파업과 봉기의 방도를 차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장 급한 것은 의회주의, 시정 활동, 노동조합, 조합 활동, 개혁에 끼어드는 것이다.

조레스의 동의안은 한 표를 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 둥근 천장 아래로 '인터내셔널'이 울려퍼진다. "단합, 당의 통합이 툴루즈 대회에서 막 이루어졌다. 새로운 걸음이고 거인의 걸음이다. 당의 정신적 통일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다"라고 최종 본회의를 주재한 마르셀 상바는 선언한다." (605~606쪽)

툴루즈 당 대회 결의안에 표명된 조레스의 기본 원칙들을 후세 사람들은 '혁명적 개혁주의(revolutionary reformism)'라 칭했다. 그러면서 의회 표결 안에 갇힌 개혁주의에 답답함을 느낄 때마다, 코민테른식 혁명 전략이 서구의 현실 앞에서 한 치 앞도 더 앞으로 못 나갈 때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빛이 새나오는 작은 창문 틈을 찾듯, 조레스의 저 웅변을 떠올리곤 했다.

조레스의 주장은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인가, 아니면 서로 대립하는 프랑스 좌파의 여러 정파들을 다독이고 봉합하기 위한 애매모호한 요설이었을 뿐인가? 아니,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조레스가 당대의 민중에게 설득력을 지닌 '비전'을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기계적 통합이 아니었다. '비전'을 통한 통합이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는 밀랑 스캔들 이후의 슬럼프를 딛고 프랑스 좌파 전체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이념적 정치가'를 찾아

이후 조레스는 자신의 비전을 당시 막 점화하고 있던 전쟁 위험에 맞선 투쟁으로 구체화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조짐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유럽 상공에 먹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레스는 전쟁을 막기 위해 의회에서 싸우고 거리에서 싸웠으며 반전 총파업을 경고했다. 그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반전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이 반전 투쟁의 구심을 쓰러뜨려야 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이미 전쟁을 선포한 1914년 7월 31일 저녁, 조레스는 <뤼마니테>에 반전 논설을 쓰고 노천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한 극우 청년의 총탄에 숨진다.

그리고 사흘 뒤, 그의 장례식 전날 프랑스도 전쟁에 뛰어들었고, 20세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첫 세계 전쟁이 노도와 같이 유럽 대륙을 덮쳤다.

이 글의 주제가 현대사 서술은 아니니, 다시 조레스로 돌아오자. 800쪽이 넘는(그럼에도 마치 잘 쓰인 소설처럼 결코 길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갈로의 책을 덮은 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어떤 독특한 인간형의 잔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좌파'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념가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도 발에 채일 만큼 흔한 상투적 정치인도 아니다. 이념을 공식처럼 여기며 현실을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도 아니고, 젊었을 적 익힌 이념의 수사로 현실의 이해관계들을 치장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대중의 언어로, 하지만 이상주의를 결코 양보하지 않으며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견지하며 관철시키는 정치가다.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제시한 '혁명가-(책임)정치가'의 숨 막히는 이분법을 넘어선 사람이다. 아마도 '이념적 정치가'라고 부를 수 있을 인간형이다.

사실 두 세기 가까이 되는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도 이런 인간형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진귀했다. 혁명 노선 쪽에서는 레닌 외에 뚜렷이 떠오르는 인물이 없고,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조레스를 포함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만들어내기 힘든 지도자상이다. 달리 말하면, 좌파 정치가 각고의 노력으로 반드시 쟁취해야 할 어려운 목표들 중 하나다.

지금 대선이 한창이다. 결과야 알 수 없지만 누가 당선될지에 상관없이 확실한 것 중 하나는 그간 이 나라에서 '진보 정치'라 불려온 제도 정치 내 한 부분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이다. '진보' 정치가의 한 세대가 모두 낙제했다. '진보'를 자처하던 언론과 지식인에 노총까지 총출동한 통합의 도박판은 가장 추한 싸움판으로 끝났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이쪽 동네에서는 뿔뿔이 흩어진 파편들 중 쓸 만한 것들을 추려내 뭔가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조레스와 같은 사람, 이념적 정치가다. 실패를 책임지고 그것을 새로운 비전의 제시로 갚을 줄 아는 사람, 산술적 통합이 아닌 이상과 열정의 공유를 통한 통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조레스, 그의 삶>은 역사 속에서 이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언젠가 가능했던 일이라면 지금이라고 불가능하라는 법은 없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 정치의 겨울에 우리가 벗할만한 더없이 좋은 읽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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