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늑대가 무슨 상관일까 싶기도 하다만, 동물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철학자들이 마이크를 잡는 일은 (적어도 서구 학계에서는)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동물 해방>(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펴냄)으로 유명한 철학자 피터 싱어는 어느 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말하기를, 오늘날의 여러 사회 운동 중에서도 동물 해방 운동은 유독 철학자들의 역할이 큰 운동이라고 한다.
"메이글에 따르면 고대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언급할 가치가 있는 동물 권리 관련 서적은 단지 95권에 불과했다. 그것도 글을 쓴 사람 중 단지 두세 명만이 전문 철학자였다. 하지만 메이글에 따르면 그 이후 18년간 동물의 권리에 관한 240권의 저작이 발간되었고, 그 중 상당수가 대학의 강단 철학자들이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동물 해방>, 406~407쪽)
철학자들이 어쩌다 동물들과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동물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워낙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보니 상식을 가장 잘, 아무렇지도 않게 거스르는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팔을 걷어붙이게 된 걸까? 어찌 됐든 우리의 저자도 동물권에 대한 관심을 종종 드러낸다.
예를 들어 그는 동물 실험의 잔인성을 비판하고, "악은 의외로 평범하다"(136쪽)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여기에 적용한다. 또 존 롤스의 사회계약론을 동물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수정하기도 한다. 롤스는 사회의 바람직한 형태를 구상하려 할 때 자신이 그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를 (성별, 인종, 재산 정도, 지식 수준 등등) 배제한 채 구상을 해야 공정한 사회를 구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롤랜즈는 이 주장이 여전히 인간 중심적이므로 "계약을 진정으로 공정하게 만들고 싶다면 인간이라는 사실과 이성조차도 배제해야 한다"(179쪽)고 덧붙인다.
그러나 '윤리적 관심 대상으로서의 동물'에 관해 논하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아니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침 롤랜즈의 다른 책 <동물의 역습>(윤영삼 옮김, 달팽이 펴냄)이 번역되어 있으니 이 책을 보는 게 낫겠다. <철학자와 늑대>보다 더 다양한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동물원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으며, 폐쇄되어야 마땅하다"(<동물의 역습>, 283쪽)고 주장하는 대목을 관심 있게 읽었다.
<철학자와 늑대>에서 롤랜즈가 실제로 가장 힘을 기울이고 있는 철학적 과제는 늑대와 인간의 삶을 비교하면서 인간의 통상적인 자기이해를 교정하는 것인 듯하다. "인간에 관한 주장들은 모두 인간이 특별하다고 후렴구처럼 반복한다."(14쪽) 헌데 롤랜즈에 따르면 "늑대는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 숨은 이면, 즉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 그 자체를 보여 준다."(16쪽) 그의 과제는 몇 가지 전략을 통해 실행된다.
1) 특정한 능력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드러내기. "아직도 동물에게 생각하고 믿고 추론하고 심지어 느끼는 '정신'이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철학자들이 있다는 모순적인 사실이 나에게는 매우 흥미롭다. 이런 철학자들에게 나는 책은 그만 덮어 놓고 개를 한번 훈련시켜 보라고 권하고 싶다."(54쪽)
2) 인간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진화 과정을 보면) 그것이 사실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다른 사회적 동물에 비해 유난히 발달한 영장류 지능의 특성은 두 가지 필요, 즉 상대보다 더 교묘한 계략을 짜고, 더 철저히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에 따라 발달했다."(104쪽)
3) 늑대가 오히려 인간보다 나은 점도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영장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소유의 정도가 아니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느냐는 것이다."(318쪽)
▲ <철학자와 늑대>(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추수밭 펴냄). ⓒ추수밭 |
아마도 롤랜즈는 칸트의 반발을 인간의 오만함 탓으로 돌릴 것이다. "동물들은 각각 필요한 형태로 진화했고 그 형태마다 더 우월하거나 효용이 큰 기술이 다르다. (…) 그저 인간이 우월한 것, 늑대가 더 우월한 것이 다를 뿐, 우월성의 다양한 정의를 판단할 보편적 기준은 없다."(147~148쪽) '우월한 이성'이라는 기준으로 인간과 늑대를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동물들을 판단할 수 없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을 존경할 수 있다."(148쪽).
인간이 늑대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롤랜즈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이제 우리는 늑대를 존경할 준비가 됐다. 그럼 언제 늑대를 존경하게 되는가? "보통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점을 발견할 때 나타난다."(148쪽) 늑대가 가진 것, 롤랜즈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무엇이었는가? 대표적인 것 하나만 꼽아보자. "바로 내가 최소한 비슷하게나마 흉내 낼 수는 있는 '힘'이었다."(149쪽)
이 '힘'이란 물리적 힘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도덕적 힘에 가까운 것이다. 삶에서 무시무시한 재앙에 부닥쳤을 때, 비굴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 불운을 통과해가는 의연함 같은 것. 동네 불독이 아직 새끼였던 브레닌의 목을 물고 메다꽂았을 때, 브레닌이 비명을 지르지 않고 견디는 것을 보면서 롤랜즈는 그 힘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짚어보자. 단지 내가 가지지 못한 점을 누군가 갖고 있다고 해서 그를 존경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롤랜즈가 브레닌을 차에 태운 채 여객선을 타고 여행 중일 때였다. "브레닌은 차를 종잇장 찢듯 헤집어 놓고 탈출했다."(177쪽) 이런 예측불허의 파괴력은 롤랜즈가 갖지 못한 점이겠지만 그는 이 점으로 인해 브레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당황해서 달려온 직원들에게 "브레닌은 도덕적 수동자(moral patient)이지 도덕적 행위자(moral agent)가 아니"므로 그를 탓할 수 없다고 변명할 뿐이었다.(177쪽)
늑대가 인간이 아닌 늑대임을 확인시켜 주는 특징들에 대해 (그의 거친 놀이법, 사냥 본능, 육식 습성 등등) 인간은 재미있게 여기거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 여길 뿐 존경을 표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자신도 가졌으면 하는 점을 늑대가 갖고 있다고 여길 때, '오직 그 때에만' 인간은 늑대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니 브레닌에 대한 존경심은 사실상 삶에 대한 롤랜즈 자신의 관점과 소망을 드러낸다. "그것은 힘이었다. 바로 내가 항상 원했고 앞으로도 원할 힘이었다."(150쪽) 누군가의 덕을 존경한다는 것은, 내가 그 덕을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실천 이성 비판>에서 행한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정신 분석'에 따르면, 타자에 대한 존경은 사실상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한 존경"(Achtung für seine eigene Person)이다.
칸트에 따르면, 존경심은 "우리의 자기의식 속에서"(in unsere Selbstbewusstsein) 발생한다. 롤랜즈의 존경어린 시선이 브레닌을 향하고 있을 때조차, 그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다. "나는 자기를 땅바닥에 메다꽂은 불독에게 저항하며 낮은 신음 소리를 내는 새끼 늑대에게서 최고의 나를 발견한다."(150쪽)
결국 표면상 늑대가 주인공인 이 책의 주제는 사실상 매우 고전적인 철학의 문제, 즉 '인간의 자기인식'인 셈이다. 이 책이 심오하다고 느낀 독자가 있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늑대를 거울삼아 인간을 들여다보다니! 다른 한편 이 책이 지루하다고 느낀 독자가 있다면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늑대라는 근사한 주인공을 섭외해놓고 기껏 인간 얘기로 분량을 채우다니!
"나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늑대에게 배웠다."(69쪽) 그러니 우리는 '늑대가 무엇인지'는 이 책에서 아주 적게만 배울 수 있다. 사르트르,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한나 아렌트, 하이데거, 플라톤, 홉스, 롤스, 러셀, 프로이트와 융, 비트겐슈타인, 에피쿠로스, 니체, 후설, 카뮈, 데카르트 등이 어떻게 적재적소에 활용되는지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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