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해병대 연병장에서 개미를 만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해병대 연병장에서 개미를 만나다

[꽃산행 꽃글] 개미와 군대

경주에서 일박하고 감포에서 늦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해송이 우거진 한적한 바닷길을 따라 길을 나섰다. 복잡한 시내를 관통하지 않았더니 막힘이 없었다. 어느 모퉁이를 돌자 바로 큰 간판이 눈을 압도했다.

"해병대 미래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빨간 간판에 노란색으로 쓴 글씨였다. 빨간색은 피를 노란색은 땀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이와 아내는 먼저 연병장으로 가고 운동장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댔다.

▲ 해병대교육훈련단 정문. ⓒ이굴기

카메라를 챙겨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보도블럭을 따라 개미 몇 마리가 눈에 띄었다. 쪼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개미를 따라 눈길을 돌리니 작은 가로수가 줄지어 있었다. 그 아래로 단단한 진흙이 보이고 개미가 드나드는 구멍이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개미소굴일 것 같았다.

개미와 나. 아무런 인연이 없다. 굳이 연결 고리를 찾는다면. 그저 작고 검고 그 곤충의 이름을 개미라고 알 뿐. 허리가 지나치게 잘록한 그것을 개미라고 부를 뿐.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나무하러 갔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을 뿐. 뿔뿔뿔 달아나는 개미를 붙들어 장난하고 희롱하였을 뿐. 낡은 아파트에 살 때 좁쌀만한 개미를 쓰레받기에 담아 창밖으로 던졌을 뿐. 그리고 민음사 시절, 최재천 교수님과의 작은 인연으로 <개미 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펴냄)을 출간하는 데 관여한 적이 있을 뿐.

개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곳의 특수성을 고려해서인지 군대개미가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호전적인 개미라고 한다. 책에서 본 군대개미의 큰 턱은 낫을 연상케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수십만 마리가 함께 움직이며, 군대보다 더한 조직력과 분업화된 사회, 끝없는 방랑 생활을 통해 가는 곳마다 초토화시킨다는 군대개미. 어느 다큐에서 본 군대개미는 사자, 치타, 하이에나보다 더 무시무시한 포식자였다. 주로 열대 지역에 산다는데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상륙하지 않을까?

해병대교육훈련단 연병장에는 개미처럼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입대하는 장정과 그에 딸린 환송객들이 상당했다. 아이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와서 겨우 상봉했다. 아이는 불안한 심사를 달래려는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도 자꾸 허전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저 시절을 다 겪은 바가 있었다. 김광석이 '이등병의 편지'에서 절절이 읊은 바대로 했었다. 부모님께 큰절하고 집 떠나고, 경주 고모댁 근처에서 머리 빡빡 깎고, 영천에서 열차타고 논산훈련소로 가고, 무엇인가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고, 친구들한테 편지 부탁하고, 풀 한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로웠고.

그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볼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연병장에 듬직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았다. 가로수도 보았다. 단풍나무, 벚나무, 소나무 등이 여기저기 꽂혀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든 향나무, 회양목도 단정하게 있었다. 시선을 낮추니 풀 한 포기가 있었다. 그것은 생명력이 끈질긴 잡초였다. 그것의 이름은 띠. 우리 시골에서 너무나 자주 본 풀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띠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개미도 만났다.

▲ 해병대 연병장에서 만난 띠와 개미. ⓒ이굴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나더니 장정들이 집합했다. 어느 순간 아이가 사라졌다. 짧게 짤린 뒷통수들 사이에서 도무지 내 아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근처에 오어사(吾魚寺)라는 절이 있다. 원효대사와 혜공선사. 개천의 물고기를 잡아먹고는 다시 살아나게 하는 법력을 겨루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살아나자 서로 '내(吾) 고기(魚)'라고 우겼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절이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물속으로 사라진 그 한 마리 물고기처럼 아이는 대열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기들과 서로 손을 잡고 부대 안으로 훌쩍 떠나버렸다.

마음이 조금은 짠해졌다. 그렇게 아이는 민간인에서 훈병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리고 곧 군인이 될 것이다. 주차장으로 갔더니 차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려고 병목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느긋해지기로 했다. 다시 개미 소굴로 갔다. 아마 이 녀석들도 인간 못지않은 사회조직이 있을 것이다. 농사도 짓는다고 한다. 아마 군대 조직도 있을 것이다. 해병대 같은 특공대도 있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작은 소동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개미들은 순조롭게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의 총 몸무게와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모든 개미의 무게를 합한 것은 거의 맞먹는다고 한다. 오늘 아무 아는 이 없는 해병대에서, 셋이 왔다가 둘만 떠나려는 쓸쓸한 심사에서, 그나마 얼굴을 익힌 개미들. 나 떠난 뒤에도 훈련소의 지하세계를 장악하며 생활할 개미들. 그 부지런한 무리를 보는 데 한 편의 시가 떠올랐다. 나중 훈병한테 편지로 소개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특별한 친근감과 함께 날씬한 개미 허리를 몇 방 더 찍었다.

얼마나 갇혀 쩔쩔맸던 것일까.

첩첩산중 군막사에서 끌고온 예비군복 가방을 열자 까만 얼굴을 내밀고 기어나오며 '여기가 어딘가? 여기는 대체 어딜까?' 개미가 뿔눈을 이리저리 더듬댄다.
길이 끊어져버리는 순간이다. 의무의, 당위의, 습관의, 최면의 길이 끊어지면서, 막막함이 이글거리는 순간이다.
'자넨 이제 왕을 잃었네. 개미君, 자네가 자신의 왕이 되게. 불안한 바람 속을 홀로 가고 홀로 걷는 왕 말이야' 나는 개미에게 속삭이며 가방으로 들어가려는 개미를 방바닥으로 툭 떨어낸다.

개미가 간다, 난처한 까만 낯짝을, 갸우뚱거리면서, 개미가 간다. 제 밥쯤이야 제가 어디서 찾아먹겠지.

(최승호, '개미' 전문)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