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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노동자 아닌데요?" 당신의 착각!

[프레시안 books] 은수미의 <날아라 노동>

그 열정 믿을 만하다.

총선이 끝난 직후 만난 은수미 의원이 노동현안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정치 초년생인데 그 포부 얼마나 믿을 수 있으랴 싶었다. 7월 27일, SJM에서 용역깡패들이 노동자에 대한 폭력을 휘둘렀다(편집자 주- 이 날의 상황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기사 ☞'파업 현장에 용역 난입, 치아·두개골 함몰 등 중상'를 참고하시길). 국회진상조사단과 함께 쏜살같이 달려온 은수미는 국회청문회까지 내달리기 시작했다. 쌍용차와 산업현장 폭력에 대한 청문회과정에서 앙칼지게 뿜어내던 그 열정이 가슴을 울렸다. 그의 열정은 믿을 만한 것이었다.

어느새 그가 <날아라 노동>(은수미 지음, 부키 펴냄)이라는 책을 썼다.

일하는 사람의 71.8퍼센트가 임금근로자, 즉 노동자다. 일하는 사람 10명 중 7명이 노동자이니 대다수가 노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적다. 오히려 "제가 노동자인가요?"라고 되묻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동권의 주인은 노동자인데 주인이 주인임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주인을 잃은 노동권은 밑바닥에 처박혀 있다. 그런데 이토록 노동권의 구원을 위한 열정을 담아낸 책을 냈다. 노동이 날아오르길 바라며 노동현장을 뛰어다니는 내게는 감격스런 선물이다.

아프다. 그의 지적.

노조에게 이기적 집단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은수미는 이따위 모순 가득한 현실을 고발한다.

한국의 노동관계조정법은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가 아닌 조합원만을 대표하게 하여 정규직 이기주의를 강요한다.

법으로 자기 조합원 이익만 대표하라고 하면서 조합원의 이익을 넘어서 파업을 하면 불법이다. 그런데도 이 사회는 노조가 지들 이익만 챙긴다고 비판한다. 명백한 위선이다.


▲ <날아라 노동>(은수미 지음, 부키 펴냄). ⓒ부키
노동권을 생존권으로 바라보면 노동권은 시민으로서 권리가 아니다. 생존권은 기본적 권리이지만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
국가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인간이 자유를 포기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으며, 인간은 억압과 강제에 저항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노동권 역시 그와 같은 권리다. 쇠사슬에 묶여 있어도, 독재든 파쇼든 먹고만 살 수만 있으면 아무 상관없다면 굳이 민주주의 국가여야 할 이유가 없다. (…) 그래서 노동권을 시민권, 즉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간주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노동권은 경제가 좋든 나쁘든, 회사 상태가 좋든 바쁘든 반드시 지켜야 할 권리다. 고임금 노동자가 파업하면 대통령까지 이를 비판한다. 노동권은 저임금 노동자만의 권리가 아님에도 대통령이 엉터리 생각으로 헛소리를 한다.

물론 노동계에도 귀책사유가 없지 않다. 특히 노동문제를 생존권 문제로 좁혀 온 것은 잘못이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노동권을 생존권의 테두리에만 가두는 것은 중대한 오류다. (…) 만약 먹고살기 위한 생존권으로 노동권을 폄하해 버리면 경쟁력이나 효율성 앞에서 노동권은 사라지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마저 흔들린다.

노동권을 생존권으로 생각하는 노동자는 먹고살기 힘들 때 권리를 포기해 버린다. 노동계에 대한 그의 비판이 아프다. 노동권은 생존을 넘어서 사회권이자 자유권이라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이 책의 빛나는 핵심이다.

맞다. 문제는 권리다.

가장 최근의 발명품인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등장하면서 주객이 전도되어 사람과 노동보다는 '경제 먼저'가 되었다. 시나브로 경제가 인간과 노동의 지배자로 바뀌었다. (…) 시민 스스로가 알게 모르게 효율성, 예측 가능성, 계산 가능성, 자동화라는 경제 담론을 삶의 최우선 가치로 간주하고 있다.

'맥도날드화'된 사회 전체의 전도된 사고방식, 시민들에게 스며든 사고의 프레임은 노동'경직성'을 물리치고 '노동유연성'이 판을 치게 했다.

단순 대출을 넘어서서 파생상품으로 뻥튀기를 하는 금융기법을 사람에게도 적용하자면서 '노융산업'이라는 말도 생겼다.

복잡한 금융파생상품처럼 노동을 중개하는 온갖 중간착취가 늘어나면서 수많은 비정규직들은 하청업체의 사용자들에게 고용된다. 진짜 사용자들은 꼭꼭 숨어 버린다. 그가 만난 수많은 비정규직 인터뷰를 통해 참혹하게 무너진 노동권의 상태를 고발한다.

비정규직은 삶의 위기와 함께 존재의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는 그 무엇들이다. 정확한 이름조차 없이 '정규직이 아니다'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이다. (…)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고 비정규직 일자리만 늘어난다면 사회구성원의 상당 부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반 국민이다. 일반국민을 넘볼 수 없다.

나는 이런 식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불편하다. 이 시대의 노동은 모두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대기업 비정규직이 중소기업 정규직보다 임금도 높고 노동조건도 좋은 현실에서 이런 구분은 때로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야말로 이 시대의 일반적 노동형태이지 특수한 노동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는 비정규직을 일반적 노동형태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처참한 비정규직 노동현실을 바꾸려는 열정을 드러낸다. 그의 표현대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반 시민에서 일반시민으로 날아오르기 위한 날개가 필요하다. 그 날개는 바로 노동권이라는 권리다.

되묻는다. 왜 노동과 복지는 따로 놀까?

노동권을 한마디로 하면 뭐냐고 그에게 되묻고 싶다. "노동권은 헌법상의 자유권이고 사회권이라는 점에서 생존권을 넘어선다", "저임금 노동자든 고액연봉자든 기본적으로 노동자라면 노동3권, 근로의 권리,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설명이 있긴 하다. 하지만 '노동권이란 00이다'는 식으로 개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노동권이란 '노동에 관련한 자기결정권'이다. 원할 때 노동하고, 싫으면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회사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노동하는 게 아니라 내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 결과에 대해서도 주면 주는 대로 받는 게 아니라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에도 수준이 있다. 가장 낮은 수준이 바로 생존권으로서 노동권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에서도 노동권이라는 말보다 생존권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생존권으로서 노동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 할 권리다. 노동을 해서 임금을 받지 않으면 살기 힘든 자본주의에서 일 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고 운명이다. 이건 권리에 끼지도 못한다.

두번째 수준이 가장 많이 얘기하는 '노동3권'이다. 회사에 취직하면 노조를 만들고, 회사에게 요구를 해서 교섭을 하고, 교섭이 안되면 파업할 권리다. 생존권으로서의 노동권보다 좀 높은 수준이다. 노동3권은 일단 취업해 있는 노동자만 가질 수 있는 권리다. 그것도 안정적으로 취업해 있어야 한다. 노조를 만들고 파업했다간 해고되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노동3권을 주장하겠는가. 정리해고제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기업권력이 떵떵거리는 세상에서 노동3권은 빚 좋은 개살구다. 그래서 노동권은 다시 생존권 수준으로 추락한다.

세번째 수준은 사회적 장치들에 의해 보장되는 노동권이다. 회사가 주는 임금만 받고 살다가 잘리면 절망한다. 해고되더라도 사회복지(사회임금)을 받아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자유권이자 사회권으로서 노동권을 보장하는 좀 더 높은 수준의 노동권이다. 노동권을 사회권이자 자유권으로 생각하라고 하지만 생각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노동권을 사회권으로 올려놓는 실질적인 조치 중의 하나가 바로 복지제도다.

흔히 복지국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노동문제를 빠뜨리고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노동과 복지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는 프레임 때문이다. 그러니 복지만 얘기하지 말고 노동도 얘기하라고 주장한다.

복지제도는 노동자와 시민 전체의 임금을 인상하기 사회임금인상 투쟁이다. 노동과 복지를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면 사회복지 문제에 노동자와 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다. 은수미도 "노동 없는 복지는 허구다"고 주장한다. 사회안전망 확대를 비롯해 복지국가를 위한 법제도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권의 연장선에서 사회복지가 어떤 의미와 위치에 있는지를 좀 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아쉬움이 든다.

재정위기로 흔들리는 외국사례와 '세금폭탄', '재정건전성'을 들먹이니 한국에서는 복지국가 실현도 불투명하다. 그래서 복지국가를 더 절실하게 바랄 수 있다. 하지만 노동권을 중심으로 보면 복지는 노동권을 보완하는 장치이며 완전한 실현은 아니다. 오히려 복지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복지병을 떠들면서 복지를 해체했고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하면서 또 다시 시장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득세했던 유럽의 사례도 있다.

진짜 문제, "내 몸은 과연 내 것인가"

은수미는 근대에 들어서며 "노동자의 노동능력(노동력)과 그의 인격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고 노동력은 회사에 팔았지만 노동자의 인격을 판 것이 아니니까 그 인격을 보호하는 것이 노동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지적처럼 "인간이 해체 가능한 로봇이 아닌 이상 노동하는 능력과 일하는 사람의 인격을 구분할 수는 없다." 쪼갤 수 없는 노동력과 인격을 쪼개서 노동자를 지킬과 하이드로 만든 게 바로 근대사회다.

노동자의 몸은 노동시간에는 노예의 몸이 되고 자유시간에는 자신의 몸이 된다. 분열된 노동자의 상태 때문에 쇼핑할 때는 왕인 고객이 되고, 일할 때는 왕을 모시는 노예가 된다. 파업하는 노동자와 파업을 불편해하는 시민으로 쪼개진다. 이 쪼갬을 벗어나서 노동자의 노동력과 인격을 하나로 돌려주어야 노동권이 완성된다. 나는 '내 몸에 대한 나의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바로 노동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노동권은 탈근대, 자본주의 안에서의 관리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권리다.

이 책에서 은수미는 "좋은 일자리 확대와 '일자리 최소기준' 확립"을 주장하고 있지만 노동권을 생존권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핵심 원인이 되고 있는 '노동자 내부의 고용경쟁'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으며 노동시간 단축 또한 별로 다루지 않아 아쉽다.

노동권이 생존권 요구수준으로 후퇴하고 노동자 내부에서도 생존경쟁, 일자리 경쟁, 의자놀이로 빠지게 된 것은 바로 일자리 문제다.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시장중심의 성장론적 해법이다. 성장론은 기업이 살아야 고용도 보장된다며, 기업이 어려우면 노동권을 양보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빠진다.

이제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눠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가 노동력과 인격이 분열당한 '분열의 시간'을 줄이고 자기 몸의 주인이 되는 '자유의 시간'을 늘리는 일이다. 노동권을 악화시키는 고용경쟁을 제거하는 것이자 노동권을 실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더 나가면 서평이 아니라 내 주장만 늘어놓는 꼴이 될 테니 여기서 그치자. 다만 글의 곳곳에서 은수미는 탈근대가 무엇인지, 그것을 노동권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 망설이며 맺은 흔적들이 눈에 띈다. 과거에 외치던 '노동해방' '노동계급'은 일부 꼴통들만 외치는 것이고, 요즘에는 촛불시민을 비롯한 '시민'을 열심히 부르고 있다. 즉 노동계급이나 노동해방을 현실에서 발전시켜 되살려 내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은수미도 이것을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책의 끝에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노동권의 확립은 인간의 노동이 노예노동이 아니게 하고 인간의 노동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다. 또한 노동자는 노동권을 통해 말하고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충분조건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지 못한다. 제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삶의 필연성을 넘어 자유의 세계로 건너와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으로 시작하지만 노동을 지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늘 오르지 못하는 계단의 밑에서 허덕이기 때문에 오히려 계단의 더 높은 수준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꿈이 있어야 열정이 있고 열정이 있어야 낮은 계단도 거침없이 뛰어 오를 수 있다. 그래서 근대를 넘어서는 권리로서 노동권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은수미의 출사표이자 노동시민들에 대한 제안

은수미는 투사(鬪士)였다. 한 동안은 연구자였다. 그리고 이젠 국회의원이다. 내가 현장에서 싸운다면 그는 입법기관이 되어 정치를 한다. 하지만 지금 그의 처지가 바로 투사의 길이 아닐까.

"문제는 권리!"다. 권력을 잡으려는 집권(執權)정치는 넘친다. 권리를 시민에게 돌려주는 복권(復權)정치는 부족하다. 은수미의 소속 정당은 집권에는 성공한 세력이었지만 노동권을 돌려주는 복권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여전히 기업권력은 살아서 그가 속한 정당에도 촉수를 미친다. 기업권력에 눌려 있는 노동이 날아오르기를 바라지 않는 숱한 장벽을 만날 것이다. 그도 이를 알기에, <날아라 노동>은 노동권을 위해 싸우겠다는 그의 출사표가 아닐까. 집권정치도 마찬가지이지만 복권정치야말로 몇몇 국회의원이나 정당들의 노력을 넘어서 노동권의 주인이어야 할 노동시민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모든 노동시민들에게 함께 싸우고 함께 날자는 제안서다.

권리가 없어도 생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권리가 없다면 시민으로서 대우 받으며 살 수 없다.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현실을 계속 살 것인가.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날개를 달자. 아직 노동권을 누리지 못하는 90%의 노동자들이 '노동시민'으로 날아오르고자 한다면 꼭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한다. 그의 주문대로 나는 오늘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인사했다.

"안녕, 노동시민, 오늘도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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