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안도현의 시, '무식한 놈'의 전문이다. 이 시의 제목에 자극을 받아 촉발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식물 이름 100개를 중얼거리자는 결심을 했다. 식물들이 들으면 웃으시겠지만 나로서는 대단한 결심이었다. 그래서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30년도 더 지나 식물의 세계로 입장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산으로 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후배가 운영하는 동북아식물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매년 일반인들에게 야생화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는 곳이었다.
지난해부터 시작해서 봄, 가을에는 파라택소노미스트(준분류학자) 강의를 두 번이나 들었다. 덕분에 이제는 그럭저럭 식물의 이름을 108가지 이상은 중얼거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다 108배를 할 때 숫자 대신 야생화의 이름을 부르며 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이름과 그 식물을 정확히 연결하려면 아직도 머뭇거릴 때가 많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이 식물들이 머리에 서식하면서 내 마음의 생태계에도 약간의 변화는 있으리라고 믿는다.
식물, 그거 함부로 짓밟고 꺾고 그냥 외면하기는 쉬웠다. 그러나 이름을 알고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컸다.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식물은 무엇일까. 집에서 키우는 화초 말고 들이나 산으로 나갈 때 가장 흔히 마주치는 꽃은 무엇일까.
식물 공부를 할 때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높은 산이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식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흔한 식물들이 잘 구별이 되지를 않았다. 그것들은 대궁이 허리춤까지 올라오고 여러 갈래로 퍼진다. 대개 흰 꽃이 많고 옅은 보라색 꽃도 있다. 잎은 자세히 관찰하면 다 다를 것이나 내 눈에는 구별이 잘 안 된다.
이들은 모두 비슷해서 굉장히 헷갈린다. 그래서 흔히들 통칭해서 그냥 들국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엄연히 고유한 이름이 다 있다. 쑥부쟁이, 개쑥부쟁이, 미국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 구절초, 망초, 개망초, 개미취, 벌개미취 등이다.
▲ 쑥부쟁이. ⓒ최영민 |
▲ 개쑥부쟁이. ⓒ최영민 |
▲ 미국쑥부쟁이. ⓒ최영민 |
▲ 까실쑥부쟁이. ⓒ최영민 |
가을 들판이나 산으로 들어갈 때 흰 꽃이 무리 지어 하늘거리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친구들과 어쩌다 집 가까이에 있는 구룡산에 갈 때, 초입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략 난감해진다. "저 흔한 흰 꽃의 이름이 뭐야?" 최근의 행적을 자랑하던 나는 그만 쥐구멍이라도 찾든가 잎이 까끌까끌한 며느리밑씻개가 수북한 덤불로 뛰어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제8기 파라택소노미스트 마지막 실습이 유명산에서 있었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꽃들은 이제 더 이상 피지 않고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법이다. 단풍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꽃들의 작전일까. 단풍을 더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려는 배려일까. 꽃들은 외출을 삼가면서 자신의 세계로 침잠하는 듯 했다.
이젠 슬슬 퇴장 준비를 하는 야생화들을 일별하면서 하산하는 길이었다. 산에서 내려올수록 예의 흰 꽃들이 눈에 많이 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까실쑥부쟁이. 쑥부쟁이 중에서도 까칠하고 거친 털이 촘촘히 박힌 식물이었다. 그간 꽃만 보다가 비슷한 종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잎을 비교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면서 또 하나 확실하게 머리에 각인된 게 있으니 그것은 개망초이다. 이 꽃도 가을철이면 정말 흔하게 우리 곁에 핀다. 이 식물을 기억하게 된 것은 그 꽃의 생김새 때문이다. 개망초의 꽃은 꼭 계란을 깨뜨린 것 같다. 풀어진 흰자 중앙에 노른자가 떠 있는 것과 정말 비슷하다. 그래서 계란꽃이라고도 한다.
▲ 구절초. ⓒ최영민 |
▲ 망초. ⓒ최영민 |
▲ 개망초. ⓒ최영민 |
▲ 개미취. ⓒ최영민 |
▲ 벌개미취. ⓒ최영민 |
하루가 하루만에 그 어디로 가는 저물녘. 산에서 터덜터덜 내려와 마을 입구에서 흔들리는 개망초를 보았다. 노란 꽃이 가운데 있고 혀 모양의 깃털이 둘레를 감싸고 있는 게 영락없는 계란이었다. 계란은 난생이다. 그러니 배꼽도 없고 주름도 없다. 그저 매끈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태생이다. 배꼽이 있다. 그 언젠가 태중에서는 입이었던 배꼽. 이젠 그 소임을 다하고 버려진 폐허처럼 배꼽은 쓸쓸하다. 배꼽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어떤 띵띵한 물건을 싼 보자기의 매듭 같기도 하다. 그 보자기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내가 만약 난생이었다면 매끈한 계란처럼 떼굴떼굴 어디로 굴러가기가 쉽고, 그래서 그만큼 이 세상을 훌쩍 뜨기도 쉬운 일이었을까. 만약 매듭 같은 배꼽이 없었다면 계란처럼 쉽게 깨지고 개망초처럼 바람과 흔들흔들 잘 놀 수 있었을까. 끌러도 잘 끌러지지 않는 보자기 속의 몸. 풀어도 잘 풀어지지 않는 그 수수께끼 같은 몸을 생각하면서 유명산 골짜기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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