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이 최대한 서둘러 인민위원회에 업무를 넘겨줌으로써 '점령'의 의미를 최소화한 반면 이남의 미군은 군정부를 점령지역의 유일한 정부로 지키고 있었다. '민족자결'의 원리를 묵살하고 있었던 셈이다.
미군이 권력을 넘겨받을 주체를 찾지 못한 것을 큰 이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북에서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합작해서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친일세력을 억압했다. 반면 미군은 처음부터 좌익의 득세를 꺼렸기 때문에 친일세력을 주축으로 한 친미세력을 키워냈지만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1946년 초여름 제1차 미소공위가 정회된 후에야 우익 중심의 좌우합작을 통해 주도세력 형성을 시도했지만 극우화한 친미세력을 억누르려는 성의는 보이지 않았다.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에 걸쳐 미군은 군정부의 '조선인화(Koreanization)'를 시도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만들고 민정장관을 임명해서 그를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에 남조선과도정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인의 자치를 육성한다는 취지였지만, 허울뿐이었다. 입법의원의 의원 절반은 점령군사령관 임명의 관선의원이었고, 나머지 절반인 민선의원은 극우-친미파가 장악한 엉터리 선거로 선출되었다. 입법의원이 제정한 법률에 대한 거부권을 미군정 제2인자인 군정장관이 쥐고 있었다. 민정장관과 과도정부도 비슷한 식으로 군정장관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입법의원과 과도정부 외에 사법부와 대법원을 조선인이 지휘함으로써 명목상의 '3부'는 갖춰졌다. 그러나 모든 궁극적 실권을 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3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1947년 11월 들어 실상을 드러내는 사건이 속출한다. 11월 25일에 정윤환, 김우열, 김윤근, 3인의 고등심리원 심판관이 고등심리원장과 군정장관 앞으로 사표를 제출했는데, 이유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사법권 운용의 요체는 국가주권보장에서 자주독립성을 확보 발휘함에 있는 것은 현대 법치국가의 국가이념인 줄 믿는다. 그런데 당면한 사태는 사법권운용 기본이념에 상좌(相左)되어 사건처리상 간접 혹은 직접적인 외래세력의 견제로 인하여 사실상 도저히 직장을 수호치 못하게 됨을 자각할 때 국민에 대하여 심대한 죄과를 통탄할 뿐이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27일)
3인의 사표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상황을 밝히기 위해 12월 2일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성명서 내용은 싣지 않았지만 "대한민청 사건을 군정재판에 회부하라고 했다는 것은 너무나 독단적이고 진의와 배치되는 말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김 대법원장이 이 사건의 심리를 절대로 허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1심보다 중하게 할 수 없다고 사법부 미인 고문에게 언명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대한민청 사건에 대한 김용무 대법원장의 압력에 반발해서 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대한민청 사건은 1947년 4월 20일 대한민청원들이 김두한(감찰부장)의 지휘 아래 좌익 행동대원들을 납치해서 참혹하게 폭행해 한 명을 죽이고 두 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김두한의 잔인성이 평판을 얻은 사건의 하나다. 그런데 7월 3일 이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아주 가볍게 내려졌다. 총 지휘자 김두한이 벌금만 내고 나온 것이다.
전 대한민청원 김두한 외 13명에 대한 상해치사죄에 관한 공판은 3일 오전 11시부터 심리원 대법정에서 신언한 검찰관 입회 아래 이필빈 심판관 주심으로 개정되어 각기 다음과 같은 언도가 있었다.
김영태 징역 7년(구형 5년) 신영균 징역 5년(구형 5년) 홍만길 징역 2년(구형 1년)
김두한 김두윤 이연근 문화태 고경주 송기현 벌금 2만원 조희창 무죄 기타 3명 1만5천원 (<조선일보> 1947년 7월 4일)
상고심에서 이 사건을 다루던 심판부의 심판관 3인이 1심보다 중형을 선고하지 말라는 대법원장의 압력에 반발해서 사표를 낸 것이다. 김용무 대법원장이 1946년 봄에 판-검사단의 불신임을 받았다가 러치 군정장관의 재신임으로 유임된 일은 1946년 4월 8일자 일기에 적은 일이 있다.
행정부인 과도정부는 11월 초부터 시국대책요강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시국대책요강은 8월 말 웨드마이어 특사의 방문 때 과도정부의 과제와 입장을 정리해서 정무회의(부처장회의)에서 채택, 제출했던 것이다. 지난 11월 9일 안재홍과의 대담 때 내용을 소개했는데, 성격에 문제가 있는 문서다.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보고하는 위치에서 정무회의는 미군정 휘하의 실무진이었다. 이것은 '과도정부 내각'이란 허울과 맞지 않는 입장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입법의원에서 11월 7일 안재홍 민정장관과 부처장 몇 사람을 불러 과도정부가 민족주체성을 몰각한 문서를 작성했다고 질책했다. 정무위원회에서는 문제가 된 일부 내용을 수정해서 발표했지만, 그 날 입법의원에서는 시국대책요강의 효력을 부정하고 이를 작성한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결했다.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과정(過政) 정무회의의 시국대책요강에 대한 입의(立議)의 태도가 자못 주목되던 바 14일의 제169회 본회의에서 '남조선과도정부 정무위원회'가 작성한 소위 시국대책요강은 그 전체를 부인하고 우리 민족의 동통이 아닌 문서를 작성하여 비밀히 외국에 송치한 책임을 규탄하되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심사한 후 방침을 결정 보고케 할 것이라는 동의와 단지 "위원회만 구성하자"는 개의가 있었으나 결국 재석의원 69명중 38표 대 30표(기권 1)로 동의대로 가결하였다. (<서울신문> 1947년 11월 16일)
5인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는 11월 25일 정무회의에 대한 불신임안 제출을 결정했으나 의장단의 요청에 따라 일단 보류하고 있다는 보도가 11월 28일자 <경향신문>에 나왔다.
입의(立議)는 과도정무회에서 작성한 '시국대책요강'에 대하여 앞서 그 전문을 부인하는 동시에 그 책임을 규탄하기 위하여 오하영 장자일 김약수 이종근 이순탁 5의원으로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동 위원회에서는 이즈음 미주둔군 군정부의 부속기관인 과도정무회의가 참월하게 3,000만을 대표하여 민의에 위반되는 문서를 비밀리에 외국에 전달한 것은 용서할 수 없으며, 남조선 2,000만의 생활을 직접 지배하는 행정부의 정신이 민족자주정신의 입장에서 신임하는 이유를 들어 현 남조선과도정부 정무회의 즉 부처장에 대한 불신임안을 동원에 제출하기로 결의안은 25일 본회의에 보고될 예정이었으나, 문제의 중요성에 비추어 의장 이하 원 간부는 이를 잠시 보류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며, 원 간부 측은 금명간 전기 특별위원과 동 문제에 관한 모종의 협의를 하리라는 바 그 결과에 따라 동 결의안 또는 대치안이 27일 본회의에 제출될 것으로 보이며, 동 문제에 대하여 유화 강경의 반반수로 갈라진 입의가 격심한 논쟁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그 귀추는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
시국대책요강에서 제일 문제된 내용이 38선 이남 조선의 '주권'을 미군이 갖고 있다고 한 대목인데, 실제 주권을 피차 안 가진 의회와 행정부 사이에 참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무튼 이 문제를 놓고는 입법의원 쪽이 주체성을 내세워 과도정부를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입법의원의 체면이 참혹하게 구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4개월 전인 7월 20일에 입의를 통과한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 법률조례' 를 딘 군정장관이 거부한 것이었다. 딘이 입법의원에 보낸 서한 요지는 이렇게 보도되었다.
1. 조선의 민족적 의식에 배치되는 반역적 의도로서 일본정권을 지지한 자나 피치 못한 경우 이외에 협력을 한 자는 처벌하든가 적어도 조선국민으로서의 생활에 참여치 못하도록 제외해야 할 것은 의심할 바 없다.
2. 그러나 반역자 또는 협력자로서 규정 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문제는 상당히 곤란하다.
3.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조선인은 살기 위하여 직접 일본인과 같이 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간접으로 그들에 협력하고 그 학정을 협조하였다. 전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고(無辜)나 후자는 모든 반역자에 부수되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이 두 종류를 명백히 구별해야 한다.
4.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법률은 극히 명백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 다른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개인적 보복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종류의 법률이 필요는 하나 그것은 전 조선민족의 의사가 명백히 될 때 즉 전 의원이 민선으로 된 의원에서 나와야 한다.
6. 또 반역자는 통일된 인민의 요청으로써 처벌되어야 하고 또 그 처벌은 조선 전국을 통하여 같은 표준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7. 부일협력자를 처벌하는 법률은 그 목적에만 국한되어야 하고 간상배의 처단을 위한 규정과 혼합해서는 안 된다.
8. 하여간 상술한 제 점에서 본관은 당분간 현 법안대로는 인준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서울신문> 1947년 11월 28일)
부일협력자 처리를 위한 입법은 1946년 12월 입법의원 개원 직후부터 중간파 관선의원을 중심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한민당, 독촉 등 극우파 민선의원들이 이에 저항했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내용도 많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도중에 러치 군정장관이 선거법 제정을 재촉하면서 다른 법안 심의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더욱 늦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어렵사리 입법의원을 통과하고도 4개월이나 지난 이제 딘 군정장관이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일제 통치를 극복해야 할 민족에게 해방 후 2년 넘게 지난 이 시점까지 일제 협력집단에 대한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참 어이가 없는 일이다. 학력과 재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그 집단이 미군정 체제 안에서 더욱 유리한 위치를 누려 왔는데, 건국 과정에서도 아무런 제재가 없다면 그들이 새로 세워질 국가에서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장악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런데 입법의원에 정작 큰 타격을 준 것은 그런 근본적 문제들보다도 위 제5항이었다. 지금의 입법의원은 완전 민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법안을 제정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입법의원의 구성에는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그 대표성을 스스로 자임하고 미군정도 인정해 주면서 지금까지 잘하든 못하든 일을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완전 민선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표성을 부인하다니! 모처럼 입법의원 전체가 합심해서 항의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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