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시작되자마자 주인공은 자신이 작가임을 밝히고 3320원이라는 통장 잔액부터 '깐'다. 주인공이 엄청나게 불쌍한 무명 작가임을 밝히는 것은 몇 개의 문장과 설정으로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능력자'의 주인공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놀라울 정도의 장광설로 늘어 놓는다. 평범한 문과 출신의 독자라면 이미 고교시절 이후 단 한 번도 발음 해보지 않았음직한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으로부터 '순수문학'이라는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용어들을 넘어 '청순문학'이라는 말장난까지 동원해 가며 주인공 자신이 야설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매우 장황하게 들어놓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문장 구성력을 자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만연체와 간결체를 빠르게 오가는 문장'은 결국 읽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상관없어. 인류 역사상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건 모두 조작이었으니까. 신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의역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셨지" 등의 대사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기술과 타이핑을 하고 있는 작가의 손가락이 눈 앞에 선할 정도로 민첩함이 느껴지는 문장의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기민하고 명달한 문장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전략적으로 짜여진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능력자>(최민석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
'이 소설을 가볍다고 보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는 출판사에서도 했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석 작가는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복서의 심정으로 동시대의 레퍼런스들을 고유명사로 흩뿌린다. '유인촌과 강기갑'이나 '뉴데일리와 오마이뉴스'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순간엔 최민석 작가가 이것을 '시대를 박제하는 사명감' 따위가 아니라 웃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작가의 심정으로 날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몇몇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동시대성을 '문학적 아이디어'의 차원으로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최민석 작가는 웃음의 유발을 위해 '진실 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노홍철이 언급되고 심지어 래퍼 아웃사이더를 동원해가며 디테일한 웃음의 코드를 공명하려 하는데 이것은 '고고한 문학가'로 보이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작가들로부터 결코 발견할 수 없는 통쾌한 부분이다.
그렇게 최민석은 독자들과 복싱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개그 감 가득한 문장의 '풋 워크'로 독자의 주위를 맴돌며 정신을 빼 놓다가 갑자기 카운터 펀치를 던진다. "설마 한평생 바닥에서 버둥댄 녀석이 똑바로 일어서려 할 때, 자기 능력만으로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의미심장하고 묵직한 문장으로 말이다.
최민석의 능력은 또 다른 곳에서 빛난다. 이 소설은 수많은 전기체의 인물 소개로 이뤄져 있다. 각각 인물의 소사를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능력은 '조동관 약전'이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등의 단편에서 성석제가 보여줬던 것 이상이었다. 그런 소사들을 장편 볼륨의 소설에서 활용하는 기량 역시 대단하다.
예기치 못한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에 의한 복통을 감수하고 중반부를 넘어서면 어느새 독자는 분명히 2012년의 대한민국 어느 곳인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이 세계에 적응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이 남루한이라던가, 복서의 이름이 공평수라던가 남색가의 이름 곽약근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이름으로 장난 치는' 설정조차 유치하게 느껴진다기보다는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의 중요한 요소로 느껴지게 된다. 그쯤 되면 후반부의 '진중한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초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한 소재로 품고 있는 이 소설의 제목이 왜 '능력자'여야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때 쯤 독자들은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 소설은 '웃다가 울어 항문부에 발모가 되는' 과정을 수많은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은근 슬쩍 극적 전환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지켜 온 골계를 끝까지 유지하며 달려가던 이야기는 결국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한 마디로 종결된다. 웃기기 위해서라면 정교한 스토리텔링을 활용하던 작가가 마지막 라운드에서 독자들을 울리기 위해 간교하게 짜낸 스토리텔링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더욱 신선하고 존엄하다. 감동이라는 측면에서 최민석은 작전을 세워 차근차근 데미지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우직하게 펀치를 날리는 인파이터처럼 독자들에게 파고든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으니 그것은 '재기전'이라는 후기다. 아무리 관대하게 바라보려 애써도 이 부분은 사족이다. 열어 놓았으면 더 좋았을 부분들을 지나치게 설명적으로 마무리한 느낌이다.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기능은 있었으나 이것을 마지막에 모아 놓은 것은 소설의 완성도에 분명한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그 정도의 결점도 보이지 않았다면 본 리뷰어는 작가의 재능에 대한 지나친 질투로 큰 상처를 입어 보복하는 심정으로 거짓된 혹평을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