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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고 핀 무덤은 기억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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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고 핀 무덤은 기억을 갖고 있다

[꽃산행 꽃글] 무덤 앞의 꽃들, 꽃 밖의 사람들

사슴의 엉덩이처럼 곱게 휘돌아 난 길과 헤어지고 이백오십 걸음을 걸었다. 아연 넓은 공터가 나왔다. 아주 양지 바른 곳이었다.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모종의 광경이 나타났다. 그것은 세 기(基)의 무덤이었다. 생전의 외할머니 즐겨 입으시던 털스웨터의 단추처럼 부풀부풀한 잔디가 나부끼는 무덤이었다.

路傍一孤塚(노방일고총) 길가 외로운 무덤 하나
子孫今何處(자손금하처) 자손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惟有雙石人(유유상석인) 나란히 서 있는 문인석 둘 뿐
長年守不去(장년수부거) 오랜 세월 지키며 떠나지 않네

조선시대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의 시조, '路傍塚'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산천은 의구했다. 여기에도 봄풀이 어김없이 자라나고 있었다.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교목들이 울타리를 쳐주고 있는 가운데 무덤의 주인들은 조용했다. 무덤가에 핀 야생화를 보느라 일군의 살아있는 사람들만 분주했다. 앉고, 서고, 쪼그리고, 엎드리고, 윙크하고, 숨이 넘어갈 듯 숨을 꼴깍 멈추고. 말없던 동네가 갑자기 왁자지껄해졌다.

무덤의 봄풀이 그리 다양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자주 보았던 할미꽃을 무덤 앞에 가면 꼭 찾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제비가 제비집에서 사라지듯 할미꽃도 이제 무덤에서도 보기 힘든 꽃이 되고 말았다. 이 무덤에서도 할미꽃은 없었다.

아직 누런 잔디와 마른 낙엽 사이로 몇 개의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흰색의 남산제비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덤 주위에서는 보기 힘든 구슬붕이가 귀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서 일가친척을 잃어버렸나. 혼자서 외롭게 피어 있었다. 털이 전신에 빽빽한 솜나물도 저를 보아 달라고 얼굴을 들고 있었다.

▲ 구슬붕이. ⓒ이굴기

▲ 솜나물. ⓒ이굴기

어디에 있는 무덤이든 무덤은 항상 양지바른 곳이다. 그간 많은 산을 다니면서 숱한 무덤을 보았는데 노란 꽃이 피지 않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양지꽃이다. 수북한 낙엽 사이로 양지꽃이 노란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도 눈이 부셔 그곳이 마치 지하와 내통한 곳인가 싶을 정도였다. 양지꽃을 찍고 일어서는데 맨 아래쪽 무덤 앞에 일행이 왕창 몰려 있다.

산자고였다. 기품있게 잘 자란 산자고가 여러 송이 피었다. 그 중 잘 생긴 녀석 앞에 여러 사람들이 일제히 엎드린 것이다. 나도 얼른 엎드렸다. 산자고의 꽃안은 오묘한 또 하나의 완벽한 세계이다. 꽃 가운데의 노란 부위는 멀리서도 꿀벌이 잘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장치이다. 꽃잎에 세로로 난 홈은 나비가 꽃 가운데로 잘 들어오도록 유인하는 통로이다. 그리하여 꿀을 주는 대신 꽃가루를 벌과 나비의 몸에 흠뻑 묻히는 것이다. 그리고 1개의 암술과 6개의 수술, 그것들은 머리가 뭉툭하고 다리가 가늘었다. 6장의 꽃잎 조각이 어울려 있다. 그리고 햇빛을 바로 받으니 수술과 암술의 그림자가 꽃잎에 얼비쳤다.

▲ 양지꽃. ⓒ이굴기

▲ 산자고. ⓒ이굴기

땅속으로 가는 길을 열기라도 하겠다는 듯 오체투지한 사람들.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최대한 땅에 밀착했다. 무덤에 그만큼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흙에 가까이 엎드리면 엎드릴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자고의 잎줄기 끝을 가늠하는 한편, 암술 밑 씨방으로 난 구멍을 찾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지금 이 무덤의 주인처럼 언젠가 나도 그 길을 따라 쓸쓸히 가야하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햇살을 등에 업은 채 얼른 사진을 찍고 일어나 맨윗무덤 등성이로 올라갔다. 문득 우리가 어울려 사진을 찍고 있는 이 풍경 또한 하나의 세계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행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꽃잎에 둘러싸인 곳만이 어디 하나의 세계이랴. 봉긋한 무덤이 아늑한 세계라면 그 곁에서 사진 찍기에 몰두하는 사람들. 그들도 각자 완벽한 한 세계의 주인들이다. 백암산 줄기를 훑으며 봄소식을 잔뜩 물고 있는 야생화를 차곡차곡 쓸어담는 카메라도 하나의 정교한 세계.

뿐인가. 혹 심심한 구름이 지나가다 지금 이곳을 가만히 관찰해 본다면!

여기는 그러한 여러 세계가 팽팽히 어울린 곳이 아니겠는가. 무덤 안이 적막하고 정밀한 고독의 세계라면 무덤 바깥은 나비가 날고 사진기가 찰칵거리는 조금은 시끄러운 세계. 죽은 자들이 누워 있는 곳이 지하라면 살아있는 자들이 산자고를 찍으러 엎드린 곳은 지상. 그런 여러 층위의 세계가 대응하고 있지 않은가.

▲ 무덤 앞에 엎드린 꽃산행객들. ⓒ이굴기

우리 일행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이곳은 조용했다. 햇빛만이 쓸쓸하게 놀고 있었다. 고요한 것에 익숙한 이곳의 풍경이 그것을 말해준다. 언제였을까. 한때 건장하고 훤칠했던 이 무덤의 주인에게 죽음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은. 그리고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렸다. "간단한 외과 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었다. 심심한 바람과 함께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갈 뿐.*

가슴에 묻은 검불을 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덤 앞에 제대로 다시 섰다. 한 동안 소란을 피웠으니 그냥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묘전수(墓前樹)는 없었지만 작은 묘비 판이 있었다. 말하자면 무덤의 문패였는데 주인의 본관과 함자, 벼슬을 표시하는 16개의 한자만 있을 뿐. 어디에도 구질구질한 주소 따위는 없었다. "通德郞 行齊 陵參奉 蔚山0公00之墓". 배낭과 카메라를 뉘어놓고 두 번 큰절 한 뒤 무덤을 떠났다. 갈 길이 멀지 않았다.

* 붉은색의 구절은 송찬호의 시,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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