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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사놓고 안 본 책 1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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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인, 사놓고 안 본 책 1위는?

[서가 속 가능성]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우릴 살린다

그 책을 왜 샀나요? 사놓고 내버려 둔 이유는요? '프레시안 books'는 '사놓고 읽지 않은(못한) 책'이란 주제로 열두 명의 필자에게 글을 청했습니다. 책등만 닳도록 봐 온 책에 대한 필자들의 추억과 항변은 각각의 '자서전'이나 '독서론'이 되었습니다. 읽은 책에 대한 서평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법'이 더 흥미로운 까닭입니다.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의 수를 헤아린다면 어떤 책이 1위를 차지할까? 최근 몇 년을 대상으로 한다면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센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단연 1위 아닐까 싶다. 단기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확산되었고 결국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니,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팔린 책이나 독자층이 한정된 고전과는 수효라는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단기간 밀리언셀러가 대체로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자기계발 분야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치철학을 담은 만만치 않은 내용의 완독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고, 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떨어진 이후에 다시금 그 책을 열어볼 확률도 높지 않으니 재시도의 가능성에서도 낮은 점수가 예상된다.

그렇다면 이게 문제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선 출판 시장의 균형이다. 한국에서는 한 해 대략 4만 여 종의 단행본이 나오고 인구나 경제 상황이 상승하는 국면이 아니기에 시장 규모는 몇 년째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몇 년 전 1000억 원 매출의 출판사 하나와 5억 원 매출의 출판사 200개를 두고 출판 생태계의 관점에서 논쟁이 진행된 적이 있는데, 일단 전자는 실패로 끝났고 후자에게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 있다. 책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100만부 1종과 5000부 200종이라면 어느 쪽에서 재미난 이야기들이 더 많이 생겨날까. 그리고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의 수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을까.

▲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센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두 번째 측면은 리딩 상품의 역할과 이에 따른 시장 확산인데, '프레시안 books'와의 인터뷰에서 출판평론가 변정수가 말한 대로 "다른 책을 읽게 해주는 책이 좋은 책이다"라는 맥락에서 생각해볼 문제다. (☞관련 기사 : 책을 혐오하는 대한민국! 희망은 대통령 아니라 편집자!)

한국 시장 규모에서 밀리언셀러가 나오려면 1년에 한두 권의 책을 사보는 사람들이 서점에 들러야 한다. 그런데 리딩 상품이 해당 분야의 다른 책들을 끌어주면서 이런 독자들에게 다른 책과의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리딩 상품은 경쟁 도서들의 출현을 달갑지 않게 여기며(혹은 애써 모른 체하며) 압도적 판매량을 바탕으로 독점을 유지하고 확산하려 한다. 다른 출판사들은 이 시장을 나눠먹기 위해 유사한 책을 급히 만들어낸다. 다른 책이 아닌 우리 책만 권하며, 다른 책이 아닌 그저 그런 책을 만드는 형국이니 앞서 말한 '좋은 책'은 요원한 일이다. 이런 경우,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의 수는 더 늘지 않겠지만, 아예 사지 않거나 사놓고 책꽂이에 꽂아두지도 않을 확률은 높아질 테니, 출판 생태계의 순환 측면에서 보면 순조로운 혈류의 흐름을 막는 혈종이라 하겠다.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을 살리는 방법

앞서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이 출판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소비자 입장에서 문제를 짚어보자. 필자는 온라인 서점에서 일한다. 도서 구매 비율을 보면 온라인 서점이 7~80퍼센트이고 오프라인 서점이 2~30퍼센트 수준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산 책은 거의 택배를 이용해 배송 받는다. 당장 필요한 책은 아니지만 가급적 당일배송을 이용하고(추가 비용 없이 해준다는데 굳이 안 받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추가 적립금 2000원을 받기 위해 1회 주문에 5만원을 채우고 보관함에 담긴 구간도 한 종 찾아 넣는다(구간 1종 포함 5만 원 이상 구매 시 추가 적립금을 받을 수 있다).

자, 이제 결제를 진행한다. 끝이다. 뭐가 끝이냐고? 그걸로 끝이라는 말이다. 이후에는 책이 정말 당일에 배송이 되었는지, 내가 주문한 책이 제대로 도착했는지는 물론이고 가끔은 상자를 열지도 않은 채 쌓아두는 경우도 생긴다. 간단히 말해 책을 고르고 읽고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의 독서가 아니라 여타 상품의 구매와 다를 바 없는 그저 (하나의 기호로서의) 책을 사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물론 앞서 설명한 경우가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동의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책을 꾸준히 많이 사는 분이라면 공감도는 높아질 거다). 굳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매일 온갖 쇼핑몰의 메일을 받아보고 또 열어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이미 현대 사회 소비의 본질을 실감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열리는 전자책 시대는 어떨까. 이런 현상은 더욱 깊어질 게 분명하다.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은 각각의 물성 그리고 이들의 조합이 독서의 감각(때로는 생명 위협의 감각)을 일깨울 가능성을 늘 품고 있지만, 기호와 신호로 존재하는 책의 형식은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지(읽겠지)'라는 생각마저도 깜빡이는 화면 속에 묻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아, 그렇다고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을 늘리라는 말씀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해볼 문제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중고 서점이다. 필자가 일하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은 사이트 안에 '중고샵'이란 몰을 만들어 온라인 중고도서 거래를 처음 시도했고, 지난해에는 종로에 오프라인 중고 서점을 열었다. 장사가 괜찮게 되는지 강남, 신촌, 분당, 대학로에 부산, 광주, 울산, 광주까지 전국 권역에 8개 지점을 차례로 펼쳤다.

이에 대한 반응은 양쪽으로 갈린다. 덤핑 도서 유통 경로로 악용될 가능성과 갓 나온 책의 중고시장 유입으로 인한 신간 매출 감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반면, 하루 수백 명의 사람들이 수천 권의 중고책을 팔기 위해 오프매장을 찾는다. 캐리어에 수십 권의 책을 담아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들에게는 새 생명을 전하고, 그 책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는 새로 찾은 황금 광산 역할을 하는 셈이다.(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판에는 '헌책방'으로 불리는 선구자들이 계시다, 그분들의 업적은 따로 다룰 기회가 있으리라.)

자, 그렇다면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은 무엇인가. 굳이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들(대개는 평생 다시 보지 않을 책들)을 독서의 감각이라는 차원에서 엄청난 공간을 내어주며 보존하고 가꾸어갈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당장 읽지 않을 책들을 중고 서점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새로운 책을 사서 읽을 것인지(꼭 책을 살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쪽이든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들을 열심히 일깨우는 과정에서 소비자와 독자의 구분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터, 소비자 제현의 진지한 고민과 과감한 결단 그리고 거침없는 행동을 기대한다.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의 가치가 발현되는 곳

앞서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 1위가 무엇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는데, 이번에는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일지 생각해보자. 오해를 막기 위해 고백하면, 일단 필자의 집은 아니다. 물론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이 대부분이다.(서가가 두 겹으로 되어 있어 뒤에 놓인 절반은 정말 볼 일이 없다.) 하지만 전체 수효가 만 권 남짓일 테니(세어보진 않았다, 슬프니까) 강호의 실력자들에게는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운 수준이다. 책을 사는 데 한 달에 50만 원 정도를 쓰지만, 이 세계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법칙이 적용되니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고, 결국에는 집이 무너질 지도 모른다.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나도 앞서 말한 여러 상황들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고백을 하기 위함이다, 조용히)

자, 잡설을 마치고 정답을 공개한다.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정답은 도서관이다. 최근 문을 연 서울도서관의 장서가 대략 20만 권이라고 하니 일단 규모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뿐더러, KDC(한국십진분류표) 000이 붙은 총류부터 900이 붙은 역사서까지 여러 분야의 도서를 균형 있게 갖춰야 하니 그야말로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도 적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책들이 짐이 아니라 그야말로 가능성을 품은, 앞서 말한 독서의 감각을 일깨우는 소중한 재료가 된다. 누구나 가슴 속에 도서관에서 만난 우연한 책과의 인연을 두세 개는 갖고 살지 않는가.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 앞서 말했듯 개인에게는 1만 권의 수효도 엄청나지만, 도서관을 자주 찾는 분들께서는 늘 찾는 책이 없거나 모자라다고 말씀하신다. 이곳이야말로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이 거의 무한대로 필요하고, 또 그 가치가 확대 재생산 될 수 있는 '잊힌 책들의 천국'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는, 아니 중세에도 그랬지만 천국에 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하다. 도서관 장서 구입 예산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말은 이제 별 감흥도 없는 수사가 되었다. 올해가 국민 독서의 해라는데 관련 예산이 5억으로, 국민 1인당 10원꼴이라 한다.

시간이 없다. 죽어나가는 책들이 입장료 부족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천을 떠도는 지금, 사놓고 책꽂이에 꽂혀있기만 한 책들 속에서 '저 책을 왜 샀을까', '저 돈을 다른 데 썼더라면' 하는 한탄이 아니라, '그래, 저 책들은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내가 출판계를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가' 정도의 자족, 그리고 아들 얼굴보다 택배 아저씨 얼굴을 자주 마주하시는 어머님께 드리는 위로, 마지막으로 출판 생태계와 출판문화를 위한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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