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가팔랐다. 이 정도의 경사를 잠시 오르는 것도 힘이 드는데 여기에서 사는 식물들은 얼마나 긴장이 될까. 그런 조건이 오래 지속된 탓인지 키 큰 나무들만 드문드문 서 있었다. 그래도 비탈에 사는 나무들은 바라보는 곳이 하나 있다. 그래서 비딱하게 자라는 법은 없다. 모두들 한결같이 한 방향으로 나란히 잘 자란다. 방석 같은 민들레와 엉겅퀴의 어린잎들이 고개를 들고 자라나고 있는 나무 계단을 다 올랐다. 이윽고 평탄한 길이 나타나고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얼레지가 개울가 주위로 군락을 이루었다. 두 장의 잎이 피워 올린 새치름한 꽃. 주름치마를 모두 휙 걷어 올린 듯, 쪽진 머리처럼 머리칼을 뒤통수로 뒤로 갖다 붙인 듯. 화려한 꽃이었다. 자주색 꽃잎에 녹색의 잎으로 이루어진 얼레지 군락.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좀처럼 보기 힘든 흰 얼레지!
▲ 얼레지와 흰 얼레지. ⓒ이굴기 |
아직 이곳은 겨울 기운이 좀 남았는가 보다. 키 큰 나무들의 주변부는 휑했다. 여름이라면 잎사귀가 무성하고 줄기와 가시가 어우러져 웬만한 틈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다. 지금은 낙엽이 수북하고 나무들의 간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이 간격도 그냥 간격이 아닐 것이다. 어느 고요한 호숫가 물 아래에서 부지런히 백조가 발을 놀리듯 지금 지하에서는 뿌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내년 봄, 이 빈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어떤 종들일까.
그래도 아주 심심하지는 않게 꽃들이 나타났다. 잎이 고깔처럼 또르르 말려나오는 고깔제비꽃이 돌 틈에서 나오고 있다. 제비꽃은 그 종류가 많다. 이날 백암산에서 본 제비꽃은 남산제비꽃, 왜제비꽃, 둥근털제비꽃, 단풍잎제비꽃 등이었다.
▲ 고깔제비꽃. ⓒ이굴기 |
▲ 남산제비꽃. ⓒ이굴기 |
▲ 단풍잎제비꽃. ⓒ이굴기 |
숲 해설가로 활동하시면서 나무에 대해 많은 식견을 갖춘 분이 작은 가지를 내밀었다. "이 잎 냄새 좀 맡아 보셔요!" 상산나무라 했다. 운향과의 나무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하지만 저 높은 동네를 차지하고 사는 교목들은 내겐 너무 어렵다. 아무래도 아직은 발밑에 더 집중해야 할 때! 땅 위, 내 발등만한 높이에 뜬 별이 여기저기에서 반짝인다.
맞춤하게 개감수가 보인다. 산 입구에서 보았던 민대극과 아주 비슷하다. 실제로 개감수와 민대극은 같은 대극과에 속한다. 대극과의 식물들은 줄기나 잎을 따면 흰 즙이 나온다. 우유처럼 진득하다. 그동안 즙이 나오는 식물을 몇 개 알았다. 천마산에서 보았던 피나물은 잎을 찢으면 실제 피 같은 붉은 즙이 흥건히 나왔다. 이는 독초이다. 또 흔히 보는 것은 애기똥풀이다. 전국의 마을이나 길가에서 아주 흔히 보는 노란 꽃이다. 이 꽃의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노란 즙이 나온다. 그게 꼭 애기똥 같아서 이름도 애기똥풀이라고 하는 것이다.
개족도리는 바닥 아주 가까이에 붙어 있다. 하트 모양의 잎이 두 장 나오고 그 아래에 꽃이 하나씩 달려 있다. 땅 너무 가까이라 꽃은 흙을 묻히고 있다. 그냥 얼굴이 흙에 묻은 것도 있지만 빗물에 튀긴 흙은 꽃잎의 뒤통수에 들러붙어 딱딱하게 마르고 있기도 하다. 웬만해서는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만한 높이에 이처럼 푹신한 곳에 언제 앉아 보겠느냐는 것이다.
개족도리의 잎은 사람의 손하고 그 겉모양이나 무늬가 비슷하다. 우리의 손등에는 솜털이 빽빽하고 손바닥에는 손금이 뚜렷하다. 그처럼 개족도리의 잎에도 뒷면에는 잔털이 있고 앞면에는 손금 같은 빗금이 죽죽 나 있다. 얼룩덜룩한 무늬도 많이 발달되어 있다. 우리의 운명이 손바닥 안에 감춰져 있듯 개족도리의 그것도 제 잎사귀에 달려 있는 것일까.
▲ 개감수. 우유 같은 흰 즙이 보인다. ⓒ이굴기 |
▲ 개족도리. ⓒ이굴기 |
어느 새 작은 산의 꼭대기에 올랐다. 곧이어 평탄한 능선길이 정상으로 이어지면서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참나무 종류인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도열해 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굴참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뿔이 길게 달린 사슴이 고개를 내밀고 물을 마시는 모습이 그대로 박제된 모습이었다. 이 나무와 사슴의 운명을 엮어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 볼까.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백암산 사자봉으로 서울 사는 한 등산객이 꽃산행을 나섰다가 발 아래 신기한 꽃을 발견하고 엎드려 꽃사진을 찍다가 그만 일행을 놓쳤는데 오리무중의 산중을 헤매다가 마침 목마른 사슴을 만나 물병을 건넸더니……'로 시작되는 전설 하나를 작문해 볼까?
▲ 사슴 모양의 굴참나무. ⓒ이굴기 |
이윽고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은 사자봉 정상으로 가는 길. 오른쪽은 굴거리나무 군락지로 가는 길. 한꺼번에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시차를 두고 양쪽 모두 다 가본 길이다. 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몸은 하나이고 길은 두 갈래. 한쪽은 '가지 못한 길'이 되어야 한다. 땅으로 녹아드는 낙엽이 수북이 쌓이고, 사슴의 엉덩이처럼 곱게 휘돌아 난 길을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오른쪽을 택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몇 걸음 안 가 인간의 운명과 관련된 모종의 광경이 나타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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