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조선위원회 설치안이 가결되었다.
[프러싱 15일발 조선] 국련총회는 14일 조선위원회설치안을 가결한 후 조선점령 미소 양국군을 내년 1월 1일까지 철퇴케 하려는 소련 제안을 부결하였다. 이 총회 행동은 조선에서의 미소 양국 간 교섭의 정체에 염증이 난 미국에 대하여서는 쾌심한 승리인 것이며 총회는 소련의 보이코트 위협에도 불구하고 43대 0으로 이를 가결하였다. 소련불럭은 이 표결에 참가하기를 거절하였다. 총회를 통과한 이 결의안은 내년 3월 31일까지 시행될 조선의 선거를 감독할 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독립정부 수립 및 가능하다면 내년 7월 1일까지 군대를 철퇴시킬 것을 규정하고 있다.
소련은 금반 총회를 통한 장구한 기간의 토의에 있어 제한된 승리를 획득코자 기도하여 종시 천편일률한 반대주장을 행하고 외국군대를 철퇴시키고 조선인을 국련 또는 기타 외국의 간섭 없이 그들의 정치적 운명을 발전시키도록 방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차한 조치는 소수의 강력한 조직 단체가 교사하는 혼돈상태를 재래할 소지를 만드는 것이라 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토의 중 미국대표 오스틴은 소련에 대하여 그들이 외국군대가 있는 동안 자유선거시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소련지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말하였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11월 16일)
이 의결은 9일 전 정치위원회의 결정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레이크썩세스 6일발 UP 조선] UN정치위원회는 내년 3월 31일까지 시행할 총선거 독립조선정부 수립 및 독립 후 90일 이내로 조선으로부터 모든 미소군대를 철퇴시키는 것을 감독시키기 위하여 UN위원회를 조선에 파견하는 결의안을 5일 드디어 가결하였다. 이 표결에서 금년 말까지 미소군대가 조선을 철퇴하고 조선인이 외국 간섭 없이 그들 자신의 정부를 수립하도록 방임할 것을 요구한 소련불록은 참패하였다. 이 결의안은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정치위원회는 이를 46대 0(기권 6)으로 가결하였으며 소련불럭 6개국은 투표에 참석치 않았다. 다음 정치위원회는 조선에 파견할 위원회를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의 9개국으로 구성하자는 미국의 제의를 가결하였다. 그런데 우크라이나는 이 위원회에 참석하기를 거절하였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 7일)
유엔총회에 부속된 수십 개 위원회의 대부분은 일부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분과위원회인데 전 회원국으로 구성되는 전체위원회가 여섯 개 있어서 제1위원회에서 제6위원회까지 숫자로 불린다. 회원국은 총회와 같지만 별도의 의장단을 해마다 뽑는 것이므로 주요 각 분야를 맡는 '분과의장단'을 운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제1위원회가 지금은 군축안보위원회(DISEC)로 불리는데, 1970년대까지는 정치안보위원회(POLISEC)란 이름이었다. 완전히 확인은 못했지만, 1947년에 조선 문제를 다룬 '정치위원회'란 이것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란 말이 들어가는 것으로 제4위원회가 있었지만(Special Political and Decolonization) 그 위원회는 식민지와 신탁통치 문제만을 다룬 것으로 보인다.
정치위원회가 의결한 조선위원회 설치안은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11월 5일 회의에서 몇 개 나라가 제출한 수정안을 포괄한 것이었다.
[레이크썩세스 6일발 AP 합동] (...) 그리고 최후 가결에 있어서 각국이 제출한 수정안에 대한 표결경과는 여좌하다.
필리핀 측 수정안: "조선정부수립기간 및 그 후에 있어서의 UN은 조선내정에 간섭치 않을 것" = 34대 0으로 가결.
인도 측 수정안: "조선의 총선거는 남북 양 지구별로 하지 말고 전 조선에 긍하여 실시할 것" = 역시 34대 0으로 가결.
중국 측 수정안: "중국은 UN감시위원회와 미 소 영 중 4대국과 협의시키려던 전반(前般) 수정안을 철회하고 조선정부가 UN감시위원회와 협의하여 치안군을 설치하고 종래의 모든 군사적 및 반군사적 단체를 해소할 것을 새로 제안" = 32대 0으로 가결.
프랑스 측 수정안: "UN감시위원회는 UN이 부담하고 있는 책임을 완수할 것을 부가" = 44대 0으로 가결.
이리하여 각 수정안이 부가된 UN감시위원회설치안은 최후 표결에서 46대 0으로 가결되었는데 여기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볼리비아 제국은 기권하고 소 측 불럭 국가는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예멘은 결석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 7일)
이런 과정을 거쳐 정치위원회에서 11월 5일 채택하고 총회에 올려 11월 14일 승인받은 '조선위원회 설치안'의 정문(正文)은 이런 내용이었다.
[서문] 총회는 조선민족의 독립에 대한 긴급하고 정당한 요구를 승인하고 조선의 국가독립이 재확립되고 그 후에 모든 점령부대가 가급적으로 실행가능한 조속한 시일에 철퇴하여야 할 것을 인정하고, 또한 조선민족의 자유 독립은 조선민족대표의 참가 없이 정확 또는 공정히 해결할 수 없다는 전일의 결론과 조선인의 선출된 대표에 의한 여차한 참가를 용이케 하고 촉진할 목적으로 조선에 관한 임시국련위원회(차후 위원회로 칭함)를 설치하는 결정을 상기하고 다음과 같이 조치함.
1. [구성] 위원회는 호주 캐나다 중국 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및 우크라이나의 각국 대표로 구성하기로 결정함.
2. [선거] 조선민족의 자유 독립의 신속한 달성에 관하여 위원회가 그들과 협의할 대표자 및 그들의 대표자가 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조선의 국민정부를 수립할 대표자를 선거하기 위하여 1948년 3월 31일 이내로 성인 선거 및 비밀투표 방식에 의하여 선거를 시행하기를 건의함. 각 투표지역 또는 지대에서 선출될 대표자 수는 인구에 비례하고 선거는 위원회 시찰 하에 행할 것.
3. [정부] 선거 후 가급적 조속히 국민의회가 소집되고 위원회와 협의하여 국민정부를 조직할 것을 건의함.
4. [철병] 국민정부 수립 즉시로 정부는 위원회와 협의하여 (가) 그 자체의 국가안전보장부대를 조직코 이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군사적 또는 반군사적 단체를 해산시킬 것, (나) 남북조선의 군사당국 및 민정당국으로부터 정부기능을 접수할 것, (다) 점령국과 더불어 조선으로부터 실행 가능한 한도로 조속히 그리고 가능하다면 90일 이내로 철퇴시키기 위하여 조치할 것을 건의함.
5. [보고] 위원회는 그의 조선에서의 시찰 및 협의를 참작하여서 조선의 국가독립 및 점령군 철퇴를 위한 전기 토의를 용이케 하고 촉진하도록 노력할 것을 결의함. 위원회는 그의 결론을 총회에 보고하고 사태발전에 비추어 이 결의안 적용에 관하여 만약 중간위원회(소총회)가 설치된다면 이와 협의할 것.
6. [원조] 관계회원국에 대하여 위원회의 책임이행에 있어 위원회에 대하여 모든 원조와 편의를 제공하도록 요구함.
7. [간섭] 국련의 전 가입국에 대하여 총회의 결정에 의한 이외는 조선독립에 이르는 과도기에 있어 조선민족의 사항에 간섭치 않을 것 및 그 후로는 조선독립 및 주권에 유해한 여하한 또는 모든 행위를 완전히 사절할 것을 요청함. (<동아일보> 1947년 11월 8일)
11월 11일에는 리 사무총장이 조선위윈회 운영비를 예산위원회에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 12일) 1947년 12월 1일부터 13개월간의 활동을 위해 51만여 달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조선위원회 설치안과 함께 그 해 유엔총회의 가장 큰 과제였던 '소총회' 설치에 따른 예산 요구액은 18만 달러였다고 한다. 당시의 유엔은 무척 가난한 기구였다. 미국이 마셜플랜을 비롯한 해외 원조로 몇 억 달러씩 쓰고 있을 때 유엔의 사업은 불과 몇 십만 달러 규모였다. 물론 그 돈도 거의 다 미국에서 나올 것이었다.
미국 빼고는 온 세계가 가난할 때였다. 유엔위원회가 조선에 왔을 때 낙랑클럽 서비스를 비롯한 향응을 퍼부어 미국이(그리고 조선의 극우세력이) 원하는 방향의 결정을 얻어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럴싸한 말이다. 당시 외교관들에게는 유엔위원회 이름으로 대접받으며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특혜였다. 물질조건이 풍성해진 지금과는 달랐다.
유엔총회의 미-소 대결에서 미국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제안에 찬성한 모든 나라가 미국의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각국 대표들은 자기 나라의 명예를 짊어지고 있었고, 미국의 제안이 불합리한 것이라면 동조하지 않을 동기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필리핀, 인도, 중국, 프랑스 4개국은 부분적 수정안을 내놓았고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볼리비아 4개국은 정치위원회 의결에서 기권했다.
소련이 미국 제안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거나 보다 합리적인 제안을 내놓았다면 결과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설령 미국 제안이 끝내 관철된다 하더라도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고 실제 진행처럼 압도적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소련이 정치위원회에서 조선인의 고통을 줄이는 길을 찾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가? 정치위원회 의결 전날 소련 대표와 미국 대표의 발언을 비교해 보자.
소 대표(그로미코) 연설: "공동위원회가 실패한 원인은 전혀 미국의 과오에 있다. 미군정관리와 국무성은 비난을 소련정부에 전가시키려고 사실을 왜곡하였다. 이는 현 미국외교의 상투수단이다. 북조선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남조선의 사태는 대단히 다르다. 인민의 위원회들에게는 권한이 없으며 민선된 정부기관이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식의 통치자가 유지되고 있다. 소위 과도입법의원의 90명 의원 중 45명은 관선의원이다. 남조선에서는 농지개혁이 실시되지 않았다. 농민의 80%는 그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며 중세(重稅)를 물지 않으면 안 된다. 남조선에서는 노동법이 없다. 8시간노동제는 공문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준수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미군의 묵인 하에 행정계 및 경찰 내에서 세력을 견고히 하고 있다. 미당국은 남조선에 있어 조선인들에게 악정을 강요하고 있으며 미국은 조선 내의 반민주주의세력에게 그들의 정책을 의존시키고 있다.
조선에 국련위원회를 설치하자는 미 제안은 미국 직접 혹은 국련 엄호 하에 타국 내정에 간섭하려는 방일한 희망을 품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독립민주국가의 수립을 진실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소련 제안을 시인할 것이다. 미국의 소련 안 반대는 미국은 조선을 미 확장정책의 대상으로 변형하려 하고 있다고 밖에는 해석할 도리가 없다. 조선인들은 미국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자유와 독립을 원한다. 재조선미군당국은 전에 일본이 소유하였던 모든 부 및 공업을 장악하고 있다. 미국인은 조선에 오랫동안 주류할 의사이다. 미 신문에 의하면 리 박사 같은 반역자는 이미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제안하였다 한다. 미국은 조선의 일부를 서미전쟁 결과 필리핀에 설치한 것과 같은 군사기지로 화하려고 하고 있다. 본위원회는 미국 제안을 거부하고 소련 제안을 수락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미 대표(덜레스) 논박: "이제 각국대표들은 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든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소연방대표들이 행한 연설은 과반 그 공동위원회에서 미국대표들이 연일연월 들어온 끝없는 논의의 견본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앞서 북조선의 소련행정을 비난한 일은 없으며 다만 모스크바협정이 난관에 봉착하였으므로 누구를 책함이 없이 국련이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하여 간섭할 것을 영국이 요청한 사실을 지적하였을 뿐이다. 나는 개회사에서 제시한바 원칙을 고집할 의도이며 지금 소련을 논박할 의사는 없다.
북조선에 건설된 소위 아름다운 민주주의는 기묘하게도 조선인이 잘 아는 제도가 아니고 소련이라는 외국세력의 제도이다. 이전에는 그리 알지 못하였던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소련표본을 정확히 그대로 채용하였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한편 그로미코 씨의 말대로 하면 남조선의 상황은 실로 경악할 일이다. 그는 일제시대보다도 더욱 나쁘다. 조선에 위원회를 파견하자는 제안에 대하여 미국은 이에 동의하나 소련은 이에 반대하고 위원회를 보이코트하려 한다. 현재 그를 원하는 것은 어떤 정부이며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정부인가? 위원회가 갈 수 없는 곳은 아름다운 민주주의가 존재하고 있는 북조선이며 위원회의 시찰이 환영되는 곳은 공포할 상황이 존재하고 있는 남조선이라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금일 이곳에서 제시된 것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간의 허비이다. 조선보안대 설치 이전에 돌연히 조선에서 모든 군대를 철퇴시키는 것은 혼돈과 내란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조선인이 이보담은 나은 운명을 향유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6일)
이북 사정이 여러 모로 이남보다 낫다는 그로미코의 주장 내용에 나는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둘째 문단에 들어와 유엔위원회를 설치하자는 "미 제안은 미국 직접 혹은 국련 엄호 하에 타국내정에 간섭하려는 방일한 희망을 품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하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정말로 미군이 점령군 노릇을 엉망으로 하고 있다면 공동점령국 입장에서 외로이 부르짖기보다 유엔위원회가 들어와 직접 보라고 불러들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유엔위원회 설치가 미국 야욕의 엄호에 목적이 있다는 것은 다수 회원국들을 꼭두각시로 몰아붙이는 하나의 예단이다. 그런 예단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유엔의 권위를 존중하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인가? 얼마 전 그리스 문제를 놓고 미국의 불합리한 주장을 유엔이 뒷받침해 준 데 분노한 탓이라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 그와 별개의 조선 문제를 놓고 유엔의 권위를 부정하는 예단을 앞세우는 것은 조선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보다 자기네 유엔 대책을 더 중시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유엔의 권위를 부정하는 소련의 태도 앞에서 미국은 자기주장을 펴기가 더할 수 없이 편안했다. 이남 사정이 형편없다고 하는 소련 주장을 미국은 가볍게 반박할 수 있었다. "위원회가 가보면 알 수 있잖아요? 쟤들 주장대로 우리가 엉망을 치고 있는지 가보세요." 공정한 제3자 위치에서도 소련 주장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련 주장을 무조건 납득하는 공산국가가 아니라면.
소련의 제안은 철군을 먼저 하고 미국, 소련, 유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조선인들끼리 건국 작업을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외국군 점령 하에서는 공정한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1년 전 인민위원회 선거는 아주 잘된 것이었다고 선전하고 있었으니, "자기네 점령 하에서는 그렇게 잘했다면서 외국군 점령 하에서는 불가능하다니?" 미국 대표는 그 자가당착을 손쉽게 지적할 수 있었다. 소련이 조선위원회 자체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그 위원회가 더 잘 만들어지고 더 잘 운용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면 미국 입장이 그토록 수월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2년의 점령기간 동안 소련이 미국보다 잘한 것이 많고 잘못한 것이 적었다. 그러나 그것이 소련이 더 착한 나라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엔에서의 토론 내용에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의 사정이 미국보다 소련의 진출에 유리했던 것이다.
일체의 외부 간섭 없이 조선인 손에 맡기자는 소련 제안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명쾌하게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그만큼 명쾌하게 속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애초에 외국군이 진주하지 않은 상황에서 간섭하지 말자고 하는 것은 몰라도, 2년 넘게 외국군이 관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 대안 없이 관리자가 사라지자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미국은 이북에 10만 이상의 군대가 조직되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소련의 '음모'를 부각시키고 있었는데, 군대 얘기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이북 사회가 이남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양쪽 점령군이 철수하면 소련을 지지하는 이북 지도부가 이남 극우세력을 압도하리라는 것은 타당한 전망이었다. 소련은 자기네에게 유리한 한 가지 방안에만 집착할 뿐, 중립적 회원국들을 설득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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