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1월 12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기협 : 과도 정부 정무위원회에서 작성한 '시국 대책 요강'으로 요즘 무척 시끄럽습니다. 11월 4일자와 5일자 여러 신문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선민주당, 서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애국부인회, 여자국민당, 대한독립촉성노총연맹, 민족통일총본부, 대동청년단, 대한농민총연맹, 한국민주당, 청년조선총동맹, 전국학생총연맹, 건국독립당, 국민회청년대 등 극우 정당 단체의 공동 성명이 보도되었는데, 그 핵심 내용이 이런 것이었죠.
"지난 9월 25일부로 서명되어 있던 소위 '남조선 현 정세에 대처할 조치 요강'이라는 괴문서를 보건대 남조선 과도 정부 정무위원회에서 일치 가결되고 또 도지사와 부처장의 합동회의에서 이의 없이 통과된 것이라는 첨서(添書)가 있어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목적 하에 차가 작성되었음을 가히 추지할 수 있으며, 기후 상당한 시일일 경과된 금일까지에 공표되지 않았으므로 인하여 항간에 군정 연장 청원설 등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더욱이 그 내용에는 우리 민족의사에 배치되는 몇 가지 조목이 있으니…."
그들은 이 문서 내용이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것이며 군정 연장을 획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의가 일자 공보부에서 그 내용을 발표했죠. 제1장 '서론'과 제2장 '신정책 수립의 기본 이론'만을 옮겨놓습니다.
一. 서론
국제 정세의 부조에 기한 자주 독립의 지연으로 인한 국내 상태는 혼란의 극에 달하여 민중은 정치적 실망과 경제적 핍박에 시달리어 그 귀추를 판단하지 못할 경우에 처하였다.
이때야말로 남조선 위정 당국은 정부의 기본 정책 및 그에 따른 시책을 수립하여 그 통치에 임함으로써 남조선에 부여된 건국 도상의 임무를 완수하여야 한다.
二. 신정책 수립의 기본 이론
1. 남조선의 3대 목표
(1) 민족적 자주 독립의 완성이 지상 명령이다.
공막(空漠)한 국제주의에 반대한다. 민족 국가의 형성 및 민족적 건설을 통하여 세계 평화와 문화의 건설에 기여하여야 한다.
(2)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이 그 둘째 목표다.
소위 진보적 민주주의란 간판적 사기적 민주주의를 배격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개성의 존중 및 의사 표시의 자유 양대 원칙에 입각하고 그 내포로서는 사회의 전체 이익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 사권(私權) 및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면서 인류의 경험과 지식의 시사로써 다수결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량하는 주의이다. 그러므로 사유 재산의 전면적 폐지 및 혁명적 방법은 거부한다. 따라서 봉건적 제도와 독재는 개인 혹은 계급적 종류 여하를 불문하고 이를 배제한다.
(3) 정부는 민생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궁극 경제적 민주주의에 의거하여야 한다. 경제적 자유가 없는 정치적 자유는 공허물이다. 독점적 자본과 대지주 발호를 배제하고 다대수의 민중의 경제상 복리를 증진하는 진보적인 경제적 사회적 입법으로 정비하여야 한다.
2. 남조선 과도 정부의 성격
(1) 공산 계열의 단체들은 미국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로 규정하면서 남조선 과도 정부는 미국의 착취 식민지화 기관이라고 계속적으로 악선전하여 왔다.
(2) 남조선 과도 정부는 조선 건국 과정에 역사적으로 규정된 자유 독립의 준비 완성 수단과 기관이다. 남북 통일은 결국 그 노력과 세력으로 완성될 것이다.
(3) 그러므로 우리 3000만 민중은 남조선 과도 정부를 실질상 우리 정부로 인식하고 그에 충실히 협력하고 애무 육성하여 하루바삐 환골탈태시켜서 명실상부하는 우리 정부로 만들어야 한다.
3. 주권은 조선 민족의 민족적 입장에서 운용하여야 한다.
(1) 미주둔군 사령관은 남조선 통치의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주권 운용은 제3자의 입장에서 할 것이 아니요 민족적 입장에서 그 주권이 운용되기를 기대한다.
(2) 과거 3년간의 정치 운동을 검토하건대 정치 사회 단체는 2대 진영으로 대립되어 있다.
제1부류는 애국적이고 군정과 협력하는 친미적인 건설적 정사(政社)들이다.
제2부류는 반민족적 반군정적 반미적 파괴적 단체들이다.
이 대립의 사실은 경찰 사법 군율 및 군정 재판의 기록이 역연하게 증명하다.
(3) 그러므로 과거 관민 간에 유포된 불편부당 중립중간 좌우 합작의 술어로써 정사에 임한 이론과 태도는 방금 재검토와 재수정을 요한다. 전항의 대립은 불상용(不相容)의 것이므로 정치적 숙청을 통한 정치 운동의 정상 상태로 복귀된 후에야 비로소 자주 독립의 지상 명령 하에 좌우 중간의 노선이 정당하게 구획될 것이다.
4. 남조선 통치의 신국면
(1) 자주 독립 완성의 첩경은 미소 협조에 있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2) 그래서 모스크바 협정의 체결 및 그 실천 기관인 미소공동위원회의 구성을 본 것이다.
(3) 과거 미 국무성 및 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은 전기 첩경론에 의거하여 남조선 통치에 임하였다.
(4) 우리 정무회는 신탁 문제 및 미소공위 협력 여부에 관한 정책에 논증됨과 같이 이 첩경론에 의하여 행정을 부담하여 왔다.
(5) 그러나 작금 양년의 미소공위의 실적을 보건대 소련은 조선을 제2몽고 및 제2폴란드화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
(6) 더구나 북조선에는 소수 독재제의 공산주의 체제의 수립으로 강행하고 무력의 발동으로써 남조선을 그 세력 범위에 예속하려 함이 역시 명백하다.
(7) 그러므로 진정한 통일은 국제적 감시 하에 남북을 통한 공정한 총선거로써야 달성할 것이다.
(8) 따라서 남조선의 국력을 충실히 하여야 한다.
'과도 정부 백서'라 할 만큼 과도 정부의 성격과 과제, 노선을 포괄적으로 밝힌 문서군요. 그런데 이런 방대한 문서가 정무위원회를 통과한 후 한 달이 넘도록 공표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네요. 내용을 보면 남조선 인민에게 정치적 지표를 제시하는 것인데요.
안재홍 : 9월 들어 미소공위의 실패가 분명해지면서 건국 방략이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인민이 시국에 임하는 자세를 새로 가다듬을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시국 대책 요강은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작성된 것인데, 과도 정부는 주둔군의 통제 아래 있으므로 그 승인이 있어야 공표의 효과가 있죠. 정무위원회 통과 후 바로 주둔군 수뇌부에 제출했는데, 여태 승인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기협 : 러치 장관의 죽음 때문에 늦어진 문제도 있었겠군요. 그런데 二-3-(1)(2절 3항 1목)에서 "미주둔군 사령관이 남조선 통치의 주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구절을 놓고 반민족적 태도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애초 문제를 제기했던 극우 세력만이 아니라 중도적 인사들도 여기에 "주권"이란 말을 쓴 데는 불만을 표합니다. 미군정이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주권'까지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안재홍 : '주권'과 '통치권'을 굳이 구별한다면 나도 '통치권'이란 말을 고르겠습니다. 하지만 "통치의 주권"이란 표현은 궁극적 의미의 '주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건 문제의 본질이 아니죠.
중요한 뜻은 미주둔군 사령관이 통치의 주권을 갖고 있더라도 그 운용이 제3자의 기준 아닌 조선 민족의 기준에 따를 것을 "기대"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 사령관이 미 육군 중장으로서 그 지휘 계통에 묶여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조선 민족의 복리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표현해놓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기협 : 시국 대책 요강에 대한 비판이 선생님에 대한 공격으로 귀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의 내용이 평소 선생님의 입장과 맞지 않는 점이 꽤 있는데요. 예컨대 二-3-(2)에서 기존의 양대 진영을 "애국적이고 군정과 협력하는 친미적인 건설적" 부류와 "반민족적 반군정적 반미적 파괴적" 부류로 가른 것은 극우파의 반공주의 그대로입니다. 정무위원회 결정을 선생님 혼자 내리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런 편파적 결정을 내리는 회의를 선생님이 주재하실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안재홍 : 그런 표현이 과도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나오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과도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합니다. 내가 민정장관으로 과도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한 과도 정부가 필요로 하는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지요.
앞서도 말한 것처럼 과도 정부는 미주둔군의 통제 아래 있습니다. 미주둔군이 명확히 표방하는 방침에 어긋나는 방향으로는 과도 정부의 권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개인 안재홍은 애국적이면서 반미적인 입장이 있을 수 있다고 보더라도 민정장관으로서는 그런 입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김기협 : 二-3-(3)에는 "불편부당 중립중간 좌우 합작의 술어로써 정사에 임한 이론과 태도는 방금 재검토와 재수정을 요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성심으로 임해 온 좌우합작위의 입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 아닌가요? 좌우 합작이 더 이상 타당성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안재홍 : 합작의 정신은 어떤 방법으로든 살려나가야겠지만, 지금까지 합작위의 이름으로 추진해 온 사업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좌우 합작으로 시작해 남북 합작을 바라보면서 미소공위의 성공으로부터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합작위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제 미소공위가 문을 닫게 되었으니 합작위의 구체적 목표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 새로운 상황에서는 좌우 합작을 둘러싼 우익 내부의 갈등을 지양하고 우익의 단결을 통해 이남의 현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실현 가능한 목표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합작 노선의 포기를 그렇게까지 명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 바람이지만, 혼란을 줄이고 과도 정부의 역할을 잘 키워나가기 위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김기협 : 二-4 "남조선 통치의 신국면"에서 미소공위 좌초에 따른 상황 변화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련과 이북 지도 집단의 책임을 지적한 것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 과도 정부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태도라고 이해합니다. 결국 (7), (8)목에서 "남북을 통한 공정한 총선거"와 "남조선의 국력을 충실히" 할 필요를 강조하는 데 이 시국 대책 요강의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안재홍 : 2년간 미군정의 남조선 통치에는 잘못된 정책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일부러 조선과 조선인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정을 잘 몰라서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좌익에서는 미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하지만, 세계 정세의 변화 방향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독립이 된 뒤에는 사정을 몰라서 저지르는 잘못은 물론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그때까지도 인민의 고통을 줄이고 국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보다 과도 정부의 할 일입니다. 그 노력이 미흡해서 사회적-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어 있게 된다면 아무리 건국을 잘 하더라도 현실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총선거에 대해서도 분단 건국의 음모를 말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음모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총선거를 반대하는 것이 그 음모를 분쇄하는 효과적인 길일까요? 1년 전 입법의원 선거를 외면한 사람들이 많았죠. 그렇게 해서 입법의원 설치를 막을 수 있었나요? 오히려 좋은 분들이 입법의원에 들어오기가 더 어렵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총선거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시행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건의 불비를 탓하며 외면하기보다 여건이 잘 갖춰지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남북을 통한 선거가 되도록, 그리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되도록 모두 함께 힘써야 합니다.
김기협 : 시국 대책 요강에 선생님 생각도 반영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좌우 합작에 임하던 자세에 비해 오른쪽으로 많이 옮겨오신 겁니다. 친미-반공을 애국적, 건설적이라 내세우며 좌익을 반민족적, 파괴적이라 내친 것은 극우 세력의 주장 그대로 아닙니까? 그런데도 극우 세력이 나서서 시국 대책 요강을 미군정 연장 획책이라고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재홍 : 후세 사람들 눈에는 반탁 운동에 나선 세력이 모두 극우로 보이겠지만 뚜렷이 다른 두 집단이 그 안에 있습니다. 임정-한독당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이 미소공위에 반대하고 좌익에 맞서는 것은 민족주의 입장입니다.
또 하나의 집단은 친일파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단을 모면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좌익을 공격하고 민족 국가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짓을 다 합니다. 그들이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미소공위를 통한 민족 국가 건설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친미를 하는 것도 미국의 잘못된 정책을 유도해서 이용하기 위한 것이지, 진정한 친미가 아닙니다. 이번에 시비를 걸고 나온 10여 개 단체를 보니 대개 친일파 세력에 조종 받는 단체로 보여서 나로서는 그들의 비난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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