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제비꽃이 외롭게 피어 있고 광대나물은 이슬에 촉촉이 젖어 있다. 드넓은 하늘의 파란색을 그대로 번역해 내는 건 큰개불알풀이다. 손톱만한 큰개불알풀의 꽃은 길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안쓰러운 꽃들을 보기만 해도 손이 간지러워진다.
나도물통이를 자세히 관찰해 본다. 나도물통이의 꽃은 빽빽하게 밀생하고 있다. 참깨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꽃동네. 맘씨 좋은 곳이라 그런지 울타리도 없다. 가만 자세를 낮춘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귀여운 긴장감이 든다. 이윽고 그 조용한 동네 귀퉁이에서 한 줄기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귀 기울이면 펑, 펑, 펑 작은 소리도 들린다. 수술이 터지면서 꽃가루가 힘껏 흩어지는 중이다. 그 소리에 놀라 이웃한 수술이 또 퍽, 퍽, 퍽 쓰러진다. 조용하던 나도물통이 동네에 너도나도 바람이 난 것이다.
보리가 자라나는 파릇파릇한 밭. 높이의 두둑을 따라 마삭줄이 엉금엉금 기어가고 어린 큰개불알풀들은 외롭게 서있는 산수유의 발목을 덮어주고 있다. 그 따뜻한 기운을 받았나. 산수유가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 노란 꽃의 수술과 암술은 중심에서 사방으로 확 퍼져나가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로 머위, 자주괴불주머니, 냉이가 줄줄이 피어난다.
▲ 큰개불알풀. ⓒ이굴기 |
▲ 나도물통이. ⓒ이굴기 |
▲ 산수유. ⓒ이굴기 |
가인 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데 덩치가 아주 큰 개비자나무가 서 있다. 나이테를 감춘 나무는 아주 크고 우람하다. 밑둥에는 여기저기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어느 것은 큰 창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리가 없는 그것은 가까이에 있는 민박집의 흔하고 상투적인 사각형의 창문이 아니었다. 혹 나무 안에 호기심 많은 누가 살고 있다면 그 앞을 지나는 한 뚱뚱한 등산객을 지금 내다보고 있으리라.
마을을 벗어나 산의 입구로 들어서자 개구리발톱, 민대극, 백양꽃, 약난초, 개산초, 수리딸기, 복분자딸기 들이 한가롭게 피어났다. 아침상에 반찬으로 올랐던 땅두릅(독활)도 있어 침을 고이게 했다. 기름진 흙에 바글바글 잎사귀의 여린 대궁이 올라오는 것은 윤판나물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건 큰개별꽃!
▲ 개구리발톱. ⓒ이굴기 |
▲ 큰개별꽃. ⓒ이굴기 |
▲ 개비자나무의 줄기 밑둥. ⓒ이굴기 |
작은 다리가 나타났다. 1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은 장소와 결부되었으니 더욱 생생해졌다. 이곳에서 나는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오로지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작년 이곳에 왔을 때 본 그 식물이 올해도 그곳에 있을까. 다년초라 해도 인간의 발걸음이이 수시로 출몰하는 곳에서 자리를 온전히 지키고 있을까. 혹 스스로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넓은잎천남성. 내 머릿속 기억을 들쑤시며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그들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넓은잎천남성은 내 키보다 조금 높은 바위 앞에서 힘껏 자라나고 있었다. 작년의 그 자리 그곳이었다. 지금 보는 넓은잎천남성은 작년에 내가 본 그것은 정확히 아닐 것이다. 키도 다르고 잎이 휘어지는 각도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때 지상으로 외출하였다가 내 눈과 접촉하였던 부분은 나 떠나고도 계속 자라났다. 그리고 여름의 태풍, 가을의 햇빛을 거치면서 지상부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키 큰 나무들이 줄기 안에 나이테를 한 줄 늘리듯 그 뿌리 꼭대기에 한금의 흔적만 남기었다. 그리고 겨울잠을 자듯 웅크려 겨울의 폭설과 한기를 견디다가 이제 이처럼 고운 자태를 드러내는 것일 터!
바라보는 이 누구 없어도 혼자 피고 지는 넓은잎천남성. 그들이 있는 공간은 그야말로 면벽하는 곳이었고 나란히 서 있는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반! 누가 봄이라고 요란한 복장에 고급 카메라 들고 설치고 다니는 것에 눈길 한번 안 준다. 저를 흔드는 것은 오로지 외부의 바람뿐. 그저 이 고느적한 곳에서 고요한 수행에 몰두할 뿐이렸다.
▲ 청류암 가는 길 입구 바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넓은잎천남성. 면벽하고 있는 수행승처럼 보였다. ⓒ이굴기 |
그들이 도달한 아득한 수행의 깊이를 측량할 길 없는 나는 서둘러 사진 몇 방을 찍고 바위를 내려왔다. 다음 차례의 일행이 사진 찍으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골짜기로 몇 걸음을 옮겼다. "백양사 고불총림 청류암". 스님들의 수행 공간인 율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일반인 출입 금지"라는 팻말도 있었다. 나와 같은 잡인들은 발을 들여놓지 말란다. 앞으로는 갈 수 없는 길.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었다. 상당히 가파른 그 길을 더위잡아 올라갔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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