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국제정치의 최고행위로서 국가 간 최고지도자의 회동에 언젠가부터 '정상(頂上)'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정상'은 사전적으로 산의 정상, 즉 산꼭대기를 의미하며, 윈스턴 처칠이 1950년 2월 에든버러 연설에서 언급하면서 최고 지도자들 간의 만남을 '정상회담(a parley at the summit)'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1)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정상이 1953년 5월에서야 비로소 인류에게 그 족적을 허가한 것을 보면, 당시 '정상'의 의미에는 생과 사, 도전과 좌절,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상징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정상회담'은 국익이 충돌하는 최고점(最高點)일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일국의 최고 정치지도자가 수많은 영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대방의 최고봉과 일합을 겨루는 것이기도 하다. 수많은 정상회담이 승자와 패자에게 득의와 굴욕을 안기는 현장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모두가 승자가 되고 인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인류사를 한 단계 발전시켜 왔다는 점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정상회담에는 지난 1972년 거행된 마오쩌둥과 닉슨의 베이징 정상회담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2013년 6월 7일부터 이틀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에서 진행된 미·중 정상회담은 어떠한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인가. 이번 정상회담이 주목받는 것은 향후 10여 년간 중국을 이끌어 나갈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첫 대미회담이라는 상징성이다. 아마도 이 경험은 향후 시진핑 주석의 대미인식과 양국관계를 풀어가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번 회담에서 시진핑은 냉전시대 양대 진영의 한 축을 이루었던 러시아의 상대적 퇴조로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향후 국제정치경제 질서를 재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게다가 미국에도 질서재편이 시작되고 있음을 각인시키고자 했다.
▲ 지난 7일(현지시간) 정상회담을 가진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로이터=뉴시스 |
이렇듯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상공을 넘나들며 세계사적 질서재편에 나서는 동안 우리는 그 충돌의 낙진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한반도는 종종 역사적이자 세계사적 정상회담의 치명적 희생자가 된 바 있다. 일찍이 1945년 2월 얄타에서의 정상회담은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주도하에 전후 한반도에서 미·소·중·영 4개국이 신탁통치안에 합의하면서 한반도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미중정상회담이 우리의 국운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겠다.
2. 중국의 '새로운 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 주창과 미·중 정상회담
근래 중국은 대외전략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국력 부상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중국이 강대국들과 다양한 영역에서 소통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갈등은 완화시키며 신뢰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는 바람과 함께 하고 있다. 특히 중·미관계에서 그 변화가 뚜렷이 감지되고 있다. 2011년 1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방미 기간에 '상호존중, 호혜공영의 협력동반자관계'라는 미·중 관계의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어서 2012년 2월 시진핑 부주석이 방미중에 다시 한 번 언급하고, 5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미·중 경제전략대화에서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가 중국 대외전략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신형대국관계' 부상의 저변에는 중국의 대외전략이 더 이상 피동적이어서는 안 되며, 적극적이고 선제적이어야 한다는 중국 지도부의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기존 G2로 명명되고 그에 걸맞은 역할을 요구받은 중국이 자신들은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라고 손사래 치던 상황과 비교하면, 대외전략으로 '대국'이라는 명칭을 차용한 것은 실로 스스로에게나 국제사회에 다양한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신형대국관계'는 두 가지 핵심적 사안을 담고 있다. 우선 '공존공영'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사적 세력 재편이 강대국 간 물리적 수단이 동원되는 가운데, 전쟁이라는 극단적 대립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강대국관계에서 새로운 방정식을 만들고자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상대국의 '핵심이익'에 대해서는 어떠한 침해와 간섭이 시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신형대국관계'에는 자신감과 회피의 전략이 교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중국은 이제 지난 근대의 치욕을 극복하고 새로운 중국이 도래했다는 자신감을 국제관계 속에서도 투영하고 있다.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 따른 구도변화에 걸맞은 국제관계의 재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신형대국관계'에는 아직 미국에 필적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중국의 속내가 내재되어 있다. 중국의 대국화 여정에서 미국과의 적대적 경쟁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미국과의 갈등을 완화하면서 우선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부터 확보하려는 점진적 세력 확대전략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중단기적으로 역내의 패권을 공고히 하면서 장기적으로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대국으로의 지위를 넘보는 것이다. 이러한 중장기적인 중국의 전략적 지향에 미국의 대응은 수용적 자세를 견지하되 견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 대한 양국의 입장과 성과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 속에도 다양한 이견이 노출되고 있다. 성공적 측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우선 회담의 형식에서 기존의 짧고 형식적인 양국 정상회담의 틀을 뛰어넘어 8시간이나 이어져 양국정상 간 물리적 거리는 물론 심리적 거리도 좁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의 제의로 군사 분야에서의 고위급 협의체 구성에 합의했고, 양국 정상간 '사이버 해킹' 문제를 둘러싼 설전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실무채널 가동에 동의하면서 대결보다는 협력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중국이 전력투구한 '신형대국관계' 대해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의 평화로운 부상은 미국에도 도움이 된다"고 수차례 언급한 것은 중국의 입장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게다가 영토 분쟁에 대해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외교적 채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동중국해에 대한 '행동'을 통해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라고 함으로써 지난 4월 헤이글 미 국방장관이 발언한 "센카쿠 열도는 일본의 시정권 하에 놓여있기 때문에 미·일 안전보장의 적용범위"라고 한 것에 비하면 유연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국 굴기'와 패권 수성을 위한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사이의 긴장은 일찍이 예견되어 왔다. 우선 시진핑 주석이 역점을 기울인 '신형대국관계'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원론적인 동의' 정도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한편 해상 영토 문제는 언제든 휴화산처럼 분출할 수 있는 화약고와 같다. 시진핑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관계 각국은 도발과 문제 야기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해 센카쿠 국유화라는 카드를 꺼낸 일본의 책임론을 강력하게 제기함으로써 영토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일방적 대일 경사(傾斜)를 견제하고 있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파장이다. 특히 동북아 및 한반도 최대 현안인 북핵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3. 미·중 정상회담과 한반도 정세
유감스럽게도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한반도 정세를 호전시키거나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중국이 '신형대국관계'를 통해 국익을 극대화하면서 장기적인 포석을 깔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담보하고 번영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신형대국관계'는 대국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적용된다. 중국은 대(對)한반도 정책에 있어서도 공세적이고 선제적인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이는 중국의 대(對)북한 및 대(對)한국정책도 자국의 국익에 주는 영향을 재평가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 우리는 중·북 관계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말아야겠지만, 기존 한국정부가 걸어온 대외정책의 관성에만 매몰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한편 미·중 관계의 호전은 우리의 운명에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미·중 양국이 협력적 관계일 경우 한국 외교안보전략의 선택지는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대국 간의 협력에는 상대적 약소국의 이권을 놓고 야합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따라서 동북아판을 놓고 벌이는 미·중의 '新거대게임'에 대응하는 우리의 외교안보전략이 올바른 방향설정을 못한다면 단지 그들이 세운 규칙에 휘둘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는 미국 주도하에 게임규칙이 만들어져 온 상황에서 중국이 제시한 '신형대국관계'는 이를 게임의 규칙으로 상호협의 하에 제정하자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적어도 글로벌 이슈는 별개로 하더라도 동북아 및 한반도차원의 이슈에 관해서는 중국이 자신들의 이해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영해 나가려는 국면이 출현할 것으로 예견된다.
현재 한반도 정세는 대화의 흐름은 타고 있으나 시계가 불투명하다. 미·중 정상이 '북한의 핵보유국 불인정 및 핵무기 개발 불용'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진전된 입장에 합의한 바 있고, 게다가 회담기간 중에 북한이 선(先)제의한 남북당국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는가 싶더니 결국은 양측의 격(格)·기(氣)싸움으로 인해 좌초되면서 한반도는 다시 조정국면이다. 결국 한반도의 운명을 남북한이 주도적으로 끌어가지 못하고 미·중 정상회담에 이어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문제 해법의 단초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우리끼리'를 주장하는 북한이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내세우는 한국 모두가 스스로의 한계를 자인하는 것이다. 추후 주변강대국들이 결정적 시기에 한반도 운명에 개입하고, 신(新)신탁통치안을 제시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남북한은 어떠한 명분을 가지고 대응할 것인가.
바야흐로 중국과 미국이라는 대국이 갈등과 협력의 파랑을 일으켜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한국을 향한 우리의 항로에 추진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지혜로운 항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 필자주석
1. 데이비드 레이놀즈 지음. 이종인 옮김, 『정상회담-세계를 바꾼 6번의 만남』(서울: 도서출판 책과함께, 2008), 11쪽.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3년 7·8월호(제24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한반도 정세와 중국의 역할'입니다. * 원제 : 미·중 정상회담과 한반도 정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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