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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만에 그어진 38선, 정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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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만에 그어진 38선, 정말인가?

[해방일기] 1947년 11월 2일 : 38선 이야기 ①

1947년 11월 2일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 대편 1>(인물과사상사 펴냄)에는 '30분 만에 그어진 38선'이란 절이 있다. 일본 항복에 임해 조선 분할 점령 방침이 너무나 급하게, 그리고 너무나 쉽게 결정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38선이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또는 더 앞서 1945년 2월 얄타에서 연합국 사이에 합의되어 있었다는 풍설이 38선 출현 후 나돌았지만 지금까지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풍설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치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의 분단 점령은 일본 제국 뒤처리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다른 부분과 관계없이 별도로 합의되었을 리가 없다. 강준만이 위 책 45~48쪽에서 설명한 대로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알려온 직후 미국 실무자들이 부랴부랴 만들어 미국 고위층의 재가를 얻은 다음 소련의 동의를 받은 것이 사실로 보인다. 1945년 8월 10일자 일기에서 나도 같은 관점을 따랐다.

38선이 부랴부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직선으로 쫙 그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짐작되는 것이다. 경계선에는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이 있다. 자연적 경계선은 강과 바다, 산악 등 교통을 가로막는 지형물로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지형과 관계없이 직선을 쫙 그어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것은 인공적 경계선이다. 인공적 경계선은 인구가 극히 희박한 지역에서, 또는 정복자가 현지 사정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식민지를 만들 때 그어진다.

1945년 7월에 미 육군 작전국에서 조선 분할 점령 계획안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키백과> '한반도 분단') 미국은 경기, 강원, 충북, 경상남북을, 소련은 함경남북을, 영국은 평안남북과 황해를, 중국은 충남과 전라남북을 각각 점령한다는 것이다. 38선에 비하면 이것이 현지 사정을 배려하는 안이다. 자연적 경계선을 존중하는 것이니까.

미-소 두 나라 사이의 분할 점령 방침은 7월 하순에 포츠담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결정이 없었다면 8월 10일 밤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에게 두 나라 사이의 점령 경계선을 그으라는 지시가 떨어질 수 없었을 테니까. 7월 하순에는 일본이 몇 주일 내에 항복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인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을 두 나라가 대등하게 분할해서 점령한다는 기본 방침만 정상 회담에서 세워놓고 구체적 방법은 차츰 실무자 선에서 결정하도록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 외로 일본의 항복이 빨랐다. 미국 쪽에서 38선으로 초안을 만들어 보냈을 때 소련 측은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을까? 상식적 기대치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모두 미군 점령지역으로, 황해도는 모두 소련군 점령 지역으로 하는 것이었으리라. 인구가 남쪽에 많게 되고 서울이 남쪽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면적은 북쪽이 훨씬 더 넓으니까. 그런데 38선으로 경계를 삼으면 그 이남의 황해도보다 그 이북의 경기도와 강원도 면적이 훨씬 더 크다. 소련 측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분할 점령의 공식적 목적은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의 행정 구역에 맞춰 도 단위로 경계선을 그어야 할 것이었다. 점령 지역 경계선을 무식하게 직선으로 쫙~ 그은 사실에서부터 두 나라가(적어도 초안을 만든 미국은) 공식적 목적 외에 영향권을 확보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토록 쉽게 그어진 경계선이 조선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분단 건국에 이르고 전쟁을 몰고 온 문제는 38선 자체의 죄가 아니다. 38선을 만들게 한 국제 관계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근본적 문제 이전에 38선의 존재가 해방 공간에서 조선인의 생활과 활동에 어떤 실제적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세세히 살펴보기는 힘든 일인데, 우선 38선 자체가 어떤 상황들을 겪었는지 1945년 9월 이후 변화의 윤곽을 더듬어보겠다.

미군이 진주 직후 38선을 어떻게 관리할지 지침을 갖지 못하고 있던 상황을 하지 사령관의 1945년 9월 18일 담화문 중 아래 내용에서 알아볼 수 있다.

"북위 38도를 중심하여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군이 각각 진주해 있는데 이 사실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이 문제를 나 자신이 모르는 만큼 이를 대답할 수 없으며 군문에 있는 나보다는 미국 워싱턴 외무성에 직접 관계되고 있으므로 태평양 방면에서 역전을 한 사람은 이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등한히 하는 것은 아니며 조선의 사정을 잘 살피어 매일같이 상부에 보고하고 있으므로 그 대책과 언제 이 현상이 해제되리라는 것은 불원에 알려질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국부적으로 절충해 보려고 금 18일조에도 우리 미군 측에서 장교가 평양에 있는 소련 측 장교를 만나러 떠났다. 문제가 이같이 되었으므로 흔히 질문 받는 조선의 자주독립 시기 같은 것도 확언을 못하는 것이 이 까닭이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18일)

그 무렵 조선인이 38선을 건너다니는 것을 미군정이 금지하지는 않고 있으나 삼가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래 두 기사에서 알아볼 수 있다.

북위 38도 이북으로 여행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정세로 보아 가장 불리한 일인데 이에 대하여 군정청에서는 일반의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즉 일부에서는 38도 이북으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미국 군정청으로부터 패스를 내 준다고 하는 소문이 있으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말이고 이후로 그러한 조직을 할지 모르나 하여간 이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은 절대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22일)

북위 38도를 사이에 두고 그 이남으로부터 그 이북으로 가는 교통 문제는 자못 힘드는 문제로 되어 있으며 마치 외국 가는 것 이상으로 되어 있어 이래서는 절대로 여행을 못가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군정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위 38도 이북으로 가는 데에는 미국 군정청 발행의 패스가 있어야 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은 이러한 것을 발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38도 이북으로 여행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요 다만 우리 미국 군인에게 대해서만 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인 측에서 이리로 여행하는 것은 우리가 금하지는 않으니까 갈 수 있으면 가도 좋을 것이다. 다만 소련 측이 점령하고 있는 38도 이북이므로 현재 철도편이 원상대로 회복되기만 우리는 방금 절충하는 중이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25일)

38선의 존재가 일으키는 실제적 문제는 날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10월 25일 미 국무성의 발표에서는 "연합국 각국 참모총장은 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38도선 분할에 찬성한 것인데 정치적 고려는 일절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소련군은 북조선, 미군은 남조선에 있는 일본군의 무장 해제 임무에 당할 것을 결정했을 뿐" 임을 확인하고 "포츠담회의 3개국 회담에서 정치적 이유에 기하여 결정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기자 질문에 그렇지 않음을 확인했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27일) 뒤이어 미국과 소련 양국이 점령한 조선의 북위 38도 경계선 철폐 문제에 관하여 관계국 간에서 교섭이 진행 중이라고 미 국무성이 발표했다는 소식이 UP통신을 통해 전해졌다. (<매일신보> 1945년 11월 8일)

미·소 간의 교섭 사실은 며칠 후 하지 사령관의 성명으로도 밝혀졌다.

"일전 미국 국무성에서는 조선을 미소 양지대로 분할하게 된 원인을 재차 설명하였다. 즉 일본 항복 당시 일본 군대의 배치로 인하여 연합국은 맥아더 대장을 통하여 북위 38도 이북의 일본군은 소군에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 각각 항복하라고 지령하였다. 조선의 분할은 일시적이요 일본군 항복에 대한 책임을 지우기 위하여 결정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 정부는 일시적인 분할이 조선 통일상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나에게 소련군 사령관과 협의하여 조선이 양국을 관리함으로써 인한 모든 곤란과 불편을 해결할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러한 국부적 협의는 소련군 사령관이 혹은 나와 같은 전권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하한 결과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소련 정부와 모스크바에서 협의를 시작하였다. 협의할 문제는 통신의 개시, 조선 경제 생활의 통일, 양 지대 간의 물자 교환, 자유로운 왕래 등이다. 나는 이러한 협의가 성공하여 조선인이 이 부자연한 분열로 인하여 받고 있는 불편과 곤란이 가급적 속히 제거되기를 바란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7일)

그러나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도 38선에 대한 구체적 조치는 나오지 않고 미소공위에 맡겨졌다. 해를 넘기고 미소공위 개시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38선 장벽의 존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우편물 문제였다.

문제의 38선은 과연 어느 때나 터질까. 사람의 왕래는 물론 편지조차 한 나라 안에서 못 보내는 심사야 어떠하랴. 이제는 외국이 된 일본에도 편지가 왕래되고 있는데 우리 국내에서 편지가 왜 통하지 못할까. 현재 서울중앙우편국에 쌓여 있는 38이북 5도에 보낼 우편물은 실로 산더미 같다. 보통 우편이 80만 통, 서류 우편이 1만5000통, 이 많은 우편물이 지금 창고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렇건만 매일 각 지방국으로부터 모여드는 38이북 행 편지는 매일 2~300통씩 쇄도하고 있어 그 정리만을 하면서 개통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동아일보> 1946년 2월 18일)

미소공위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가 우편물 교환이었다.

지난 1월 16일부터 3월 5일까지 3주간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회담에 3000만 민족이 기대하였던 38도선 장벽 철폐는 결국 헛된 기대였고 다만 한 가지 선물로서 3월 15일 개성에서 우편물의 교환이 실시되었을 뿐이다. 이 날 오전 10시 개성역 구내에서 양쪽 대표가 가지고 온 우편물들은 남조선 측을 대표한 체신국 통신과 보좌관 파이첼 대위와 동 우무계 김선유 외 수인, 북조선 측으로부터 소군 대표 물유규인 중위와 북조선체신국원 이두경 외 철도우편국원 2명으로 된 양측 책임자들의 입회하에 드디어 교환이 시작되었는데 38도 이남에서 이북으로 가는 우편물은 기보한 바와 같이 1, 2종 우편물이 30만 통이고 서류가 1만 통이다. 그리고 이북에서 이남으로 오는 것은 평양우편국 관내의 것만 수집된 것으로 1, 2종 우편물이 겨우 1만 통이고 서류는 250통이다. 또 행낭은 이북에 가는 것이 157개인데 이남으로 오는 것은 단 4개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동 우편물 교환을 하는 데 있어서 양 대표 간에 교환 협정서를 조인하였는데 그 조문 내용은 (<조선일보> 1946년 3월 16일)

남북 간 우편물 교환은 대략 2주에 1회씩 행해졌는데, 1946년 7월 26일 콜레라 유행으로 인해 교환을 중단한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1947년 1월 11일 제 20회 우편물 교환이 행해졌다는 보도로 보아 금세 재개되어 꾸준히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과의 우편물 제20회 교환은 1월 11일 북조선 여현역에서 교환되었는데 앞으로 매달 제2, 제4 토요일에 여현역에서 교환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월 15일)

1946년 5월 초 미소공위가 무기정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38선 봉쇄에 나섰다. 억압적 조치를 취할 때마다 미군정은 소련 측이 만든 문제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조치에 대해서는 아무 변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군정 측의 일방적 조치로 이해된다. 이 조치를 강행하기 위한 경찰망의 확충도 뒤를 이었다.

군정장관의 특별허가 없이 38도선을 통하여 여행할 수 없다고 23일 外務處에서는 이러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하였다. 이 정책에 인하여 조선인은 경계선 통과 허가를 얻으려고 경계선 지방을 여행하여도 무익할 뿐더러 이러한 기도는 그 지방의 조선인과 군정후생기관에 불필요한 번무를 줄일 것이다. 외무처에서는 38도선 통과가 가능하게 되면 일반에게 공포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5월 24일)

38선은 국경 아닌 국경으로 갖은 희비극을 연출하고 또한 갖은 범죄가 발생하므로 이 범죄의 근절과 치안의 확보를 기하고자 군정청, 경무부에서는 38선 연로에 경찰망을 확충하고자 연구 계획 중이다. 이 방침에 따라 경기도경찰부에서는 38도 경계선을 중심으로 경찰망을 강화하여 남조선 내 치안유지에 유감없도록 현재 38선을 담당하고 있는 옹진, 장단, 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각처 요소요소에 지서를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이에 대하여 방금 준비 중이다. (<동아일보> 1946년 6월 7일)

사람의 통행을 막으면서 물자의 통행도 막은 것은 물론이다. 남북의 인구 조밀 지역이 맞닿아 있는 황해도-경기도 앞바다에서는 밀수가 성행하는 한편 꼭 38선을 넘어야 할 사람들은 큰돈을 내고 배를 탔다. 절박한 사람들 중에는 만주 지역으로부터 귀국길에 오른 일본인들도 있었다. 해적 행위도 만연했다. 해적 행위에 관해서는 1946년 9월 2일자 일기에도 적은 일이 있다.

불법 해상 무역은 군정당국으로부터 금지되어 취체하고 있거니와 해안선을 이용하여 38도 이북으로부터 넘어오는 비밀선에 대해서도 역시 취체를 하고 있다.

즉 38선의 육로 교통이 두절된 황해도와 강원도 연안 일대에는 매일 수많은 선박이 감시의 눈을 피하여 가며 선객과 화물을 싣고 들어오고 있으므로 관계 당국인 무역국외무처 해사국 경무부에서는 관계관을 각각 현지에 파견하여 단속을 하고 있는데 이들 위반자의 대부분은 모리를 목적으로 물건을 싣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고 그 외는 전재민과 남조선으로 영주하러 오는 사람들이라 한다.

그리고 당국에서는 모리배들의 선박과 물건은 압수하는데 압수물품 중 통제품은 물자영단을 통하여 배급하며 그 외 물품은 자유 처분한다고 한다. 그리고 모리배 외의 일반 전재민과 남조선으로 영주코자 넘어오는 사람들의 생활밑천으로 가져오는 물건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하리라 한다. (<조선일보> 1946년 8월 9일)

일본이 패전으로 투항하자 만주에 흩어져 있던 일본인들은 신의주 산동현 일대에 집결되어 있다는데 그 수는 약 6만가량이라고 하며, 그들은 패전 국민의 쓰디쓴 고초를 맛보며 어언 1년간이나 지내오더니 최근에는 앞으로 38이북의 엄동이 무서운지 밀항선을 타고 인천항에 들어오는 자들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다. 돈에 어두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고 그들을 수송하는 악질 모리배들의 암약은 저윽이 한심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9월 12일)

생필품에 대한 통제는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통제를 맡고 있던 경찰의 횡포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38 경계선 길목을 통하여 남선에서 북선으로 나가는 물자는 엄금하되 들어오는 물자는 묵인하고 있는 것이 현재 남조선 측 삼팔선경계의 상례이다. 10여일 전부터 경기도 포천 경계선에서는 관할 경찰서인 포천경찰서에서 무슨 연고인지 들어오는 물자를 일체 압수하고 있어 요즈음 경기도민 특히 서울시민의 필수품인 장작 숯 동태 등 한창 풍성하게 들어오는 물자가 일체 들어올 길이 없어져서 직접 간접으로 대중의 살림살이에 적지 않은 지장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이에 관하여 제일경무총감 장택상은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포천경찰서에 조회해 보고 만일 사실이라면 즉시 들어오는 물자는 묵인하도록 선처할 생각이다." (<조선일보> 1946년 12월 18일)

1947년 4월에는 미군정이 월경자를 모두 체포하는 방침을 세웠다. 위에서 본 것처럼 진주 직후 조선인의 왕래를 미군정이 통제하지 않는다던 원칙은 사라져버렸다. 군사적 목적으로 일시적 편의를 위해 만들었던 경계선을 이제 국경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경무부에서는 4월 18일부터 미주둔군사령관 하지중장의 명령에 의하여 38선 이북 지역으로부터 이남 지역으로 넘어오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을 막론하고 즉시 체포하여 다음과 같이 조치하기로 되었다 한다.

1. 국적여하를 막론하고 38선 경계선을 넘어 남조선에 넘어오는 자는 즉시 체포하여 미군으로부터의 신분 조사와 방역 검사를 실시하기 위하여 開城 春川 議政府 江陵 등 지정 수용소에 수용할 것.
2. 경찰은 전기 수용소 설치 지점의 배후 약간 지점에 편리상 필요한 집합소를 설치할 것.
3. 경찰은 전기 집합소에 집합된 인원을 편리상 일정기간별로써 상기 해당 수용소에 인도할 것.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4월 20일)

38선 접경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이북에서 넘어오는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을 물론하고 일단 수용하였다가 방역과 신분 조사가 끝나야만 내놓고 있는데 보건후생부 발표로 4월 24일 현재의 수용 인원을 보면 수용소 10개소 중 동두천 1091명 청단 538명 토성 643명으로 3개소에만 2273명에 달한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7년 4월 30일)

미소공위가 재개되면 38선도 터지고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하여 크게 기대하고 있는데 이와는 별개로 38선의 장벽을 넘어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주민증, 기차무임승차권, 적정배치, 정세조사 등을 하기 위해서 외무처에서는 춘천, 주문진, 의정부, 개성 등 4개소에 외무처 출장소를 설치하고 직원 1인씩을 주재케 하기로 되어 오는 7일경에 부임하리라 한다. (<서울신문> 1947년 5월 6일)

1947년 5월 7일자 <조선일보>에는 월경하는 사람들에 관한 큰 기사가 실렸다. 내용 중에는 정확하지 못한 사실도 들어 있지만, 전체적 상황을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된다.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으로 생겨난 38선은 해방 후 이미 2년을 경과한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우리 동포들의 왕래를 거부하고 있으나 이 선이 생겨난 이래 경계의 눈을 피해가며 비밀 월경을 하는 동포는 연일 끊일 사이가 없으니 어떠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니고 있는 것인가?

지난 겨울에는 월경하는 사람들의 반수 이상이 북쪽으로 가는 사람이던 것이 금년 봄에 들어서는 갑자기 북쪽에서 남쪽에 넘어오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4일 토해선 청단에 있는 경찰지서 통계에 의하면 하루 동안에 북쪽으로 넘어간 사람의 수효는 37명이고 이남으로 넘어온 수효는 547명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경찰을 통과한 것만으로 본 숫자이므로 같은 청단을 통과한 사람 중에 경찰을 거치지 않고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요 38선 600여리나 되는 전선을 타고 이 곳 저 곳이 모두 월경 코스로 되어 있으니 전부를 합한다면 매일 남쪽으로 넘어오는 동포의 수는 실로 수천에 달할 것이다.

전에는 남북 물가의 차이가 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내왕하며 장사를 하는 상인도 많았으나 요즘은 양쪽 물가가 비슷하여 상인은 부쩍 줄었는데 이 장사꾼들을 빼놓고 이북으로 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서울에 집이라도 잡아놓고 가족을 데리러 가는 사람들이니 이북을 찾아 살러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하루 수천 명씩 넘어오는 이북 동포의 대부분은 소시민 학생층이며 혹 농민도 끼어 있으니 이들이 이남으로 오는 이유는 또 어디 있는가? 이북에서 나오는 동포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개 이러하다.

금년 4월에 들어 주로 신의주 철산 선천 용천 정주 일대에 걸쳐서 일어난 관공 직장의 대량 파면 선풍으로 말미암아 실직자가 속출한데다가 쌀값은 소두 한말에 7~800원서부터 1000원까지 하고 배급이란 전혀 없으며 장사 역시 고율의 세금 때문에 경영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며 게다가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징용으로 보낸다는 등의 풍설로 해서 불안에 못 이겨 이남으로 들고 띈다는 것인데 철산군만 하여도 지난 20일간에 천여호가 이동을 하였다 한다.

이렇게 고향에서 살려 해도 살 수 없는 이동 동포들은 북조선내 적당한 장소로 이동 신청을 해 가지고 해주 근방에 와서 머물러 있다가 기회를 엿보아 월경을 감행한다는 것인데 도중에 경비대원이나 보안서원에게 붙들리는 날에는 이것저것 팔아서 뭉친 전 재산을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면서도 이남에만 가면 산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월경의 모험을 한다는 것인데 (…)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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