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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간 적대적 공생 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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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간 적대적 공생 관계의 산물, 조선 분단

[해방일기] 1947년 10월 31일

1947년 10월 31일

조선에 유엔감시위원회를 파견하는 결의안이 10월 30일 유엔 총회 정치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11월 1일 국내 여러 신문에 보도된 기사 내용부터 살펴본다.

[레이크썩세스 31일발 AP 합동] UN 총회 정치위원회에서는 30일 상오 하오를 통하여 소련 블록과 미 측 진영은 서로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면서 1건 1건 표결하여 나갔는데 그 경과는 여좌하다.

1. 먼저 조선 대표를 UN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소 측 제안에 대한 미 측 수정안이 41대 영(13표 기권 그 중 소련 블록 6개국 포함)으로 표결되었다.
2. 이 표결 후에 소련대표 그로미코는 자 측 제안에 대한 표결을 요청하였던 바 (35대 6표)로 부결되었다.
3. 이 소안이 부결되자 소련 대표 그로미코는 다시 이 이상 조선 문제 토의를 중지하도록 새로이 제안하였던 바 이는 36대 6(12표 기권)으로 부결되었다 하며 미 측 수정안을 신별 개안으로서 인정하라는 동의가 제출하였는데 이 안은 40대 6 (4표 기권)으로 부결되었다.
4. 그러나 우크라이나 측은 미 측 제안에 의한 임시 UN위원 파견안은 조선 대표가 참석할 때까지 연기하자고 제안하였던 바 이 안은 40대 6 (5표 기권)으로 역시 부결되었다.

그런데 동 표결 토의 중 미 대표 존 포스터 덜레스는 "조선 사태에 관하여 조선 독립 문제에 관해서 미소 간에 2년간의 정돈 상태가 계속된 것으로 말미암아 조선에는 폭발적 상태가 존재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소련 대표 그로미코는 이를 반박하여 "남조선에서는 친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폭발적 상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남조선에만 관한 사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 측 대표는 우리가 여사한 친일파와 협의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레이크썩세스 31일발 UP 조선] 30일 41대 영표(기권 7표)로 UN 총회 정치위원회를 통과한 미국의 조선에 관한 예비적 제안의 정문(正文)은 다음과 같다.

"UN 총회에 상정된 조선 문제는 기본적으로 조선 민족 자체를 위한 문제이며 그들의 자유와 독립에 관한 것인데 비추어 또한 이 문제는 당사 주민의 대표 참가 없이 정확 또 공정히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제1 위원회는 조선 민족의 선출된 대표를 문제 심의에 참가하도록 초청하기를 건의한다. 또한 위원회는 여차한 참가를 촉진시키고 조선인 대표가 사실에 있어 적당히 선출되도록 하기 위하여 즉시로 여행 시찰 급 전 조선을 통하여 상의할 권리를 가지고 조선에 주재할 조선에 관한 UN임시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결정문에 "당사 주민의 대표 참가 없이 정확 또 공정히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는 말이 들어간 것은 조선인 대표 참석 없이 조선 문제를 토론할 수 없다는 소련 측 주장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측은 조선인 대표 참석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위원회를 먼저 만든 다음 그 위원회가 조선에 가서 조선인과 접촉하면 된다는 수정안을 낸 것이었다.

애초 미국 측 제안의 요지는 빠른 시일 내에 조선에 총선거를 실시하게 하고 유엔이 만든 조선위원회가 선거가 제대로 시행되는지 시찰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이 제안에 대항해 두 가지 주장을 내놓았다. 하나는 두 나라 군대가 즉각 철수하고 조선인이 자율적으로 진로를 결정하게 하자는 것, 즉 유엔이 개입하지 말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조선 문제를 유엔에서 토론하는 자리에 조선인 대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유엔 회원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고는 하지만 그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제안이라 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으면 자국의 명예를 위해서도 맹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미국이 불합리한 제안을 굳이 강행하려면 찬성을 얻기 위해 뭔가 보상을 내놓아야 할 필요도 있었다.

소련의 즉각 철군과 유엔 불개입 주장에는 회원국들의 공감이 적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기 철군의 원칙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냥 빠져나오기만 해서는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 대책 없는 즉각 철군은 혼란과 무질서를 불러올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총선거를 통해 국가를 세워놓은 다음 철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프랑스와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등 미국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나라들도 이 점에서는 미국 주장에 동의했다.

그에 비해 당사자 없는 토론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여러 나라의 공감을 일으켰다. 그래서 미국이 위원회를 만든 뒤에라도 꼭 조선인과 협의 하에 일을 진행해 나가도록 한다는 수정안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총회에서 여러 나라 대표의 발언이 당시 조선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로물로 필리핀 대표의 발언 중에 특히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토의에 있어 우리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하자 소련이 조선을 그에 대한 공격 기지로 사용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소련으로 하여금 그리 말하게 하며 건설적 제의가 조선의 평화적 장래를 보증한 미안(美案)에 대한 수정안을 제출케 하자.

소련이 외국의 경제적 지배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조선으로 하여금 UN 전 가입국이 일제 시 혹은 이조 말기에 있어 조선 인민의 동의 없이 체결된 모든 양보적 조약을 포기하게 할 보증을 제안케 하자.

또 그리고 하국(何國)이든지 그 인국(隣國)이 조선을 그 괴뢰 국가로 만들까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 나라로 하여금 조선을 엄정한 독립을 보증할 제안을 제출케 하자.

나는 전 점령군이 조선으로부터 철병함에 만강의 지지를 표하나 이는 질서 정연히 행하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하기 위하여 나는 조선 인민에게 독립 책무를 담당하기 위한 군대와 세력을 조직할 시간을 주자는 미안을 지지한다. 소련은 이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UN 대표 제위는 이 방법에 찬동하지 않는가? 현재 조선은 UN과 세계 조직이 직접 해결할 책임이 있는 대상이다. UN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전 아세아 대륙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전쟁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화근이 될 것이다." (<서울신문> 1947년 11월 1일)

필리핀은 반세기 동안 미국의 식민지와 보호국을 거쳐 1946년 7월 4일 독립한 나라다. 날짜를 유의해 보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독립을 선포한 나라다. 미국의 입김을 얼마나 받는 나라였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인 출신의 필리핀 외무장관 카를로스 로물로(1899~1985년)의 발언은 그의 솔직한 기질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장에서 소련 대표 비신스키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고 전해진다.

비신스키 : "조그만 나라에서 온 조그만 사람이 무슨 큰소리요!"
로물로 : "못된 골리앗에게 팔매질로 버릇을 가르쳐줄 다윗이 이 세상엔 필요하답니다!"

소련 입장을 염두에 둔 로물로의 주장에는 나도 공감이 간다. 소련이 진정 조선인의 뜻에 따른 조선의 건국을 바란다면, 소련이 바라는 것이 바로 이웃나라에 적대적 세력이 들어서지 않는 것뿐이라면, 1947년 가을 유엔에서 소련이 내놓은 것과 같은 주장밖에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인가?

두 나라 군대의 진주 이래 미군에 비해 소련군이 조선인의 민의를 더 존중하고 덜 폭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비교 우위'가 소련의 대 조선 정책을 몽땅 정당화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련의 정책에도 그 나름의 비판이 필요하다.

미소공위 결렬의 일차적 책임이 미국에게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살펴본 상황으로 보아 분명하다. 그리고 미국이 조선 문제를 유엔에 가져간 것이 많은 회원국에 대한 자국 영향력을 믿고 자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하려는 의도였다는 사실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렇다 해서 무조건 즉각 철병을 주장하는 것이 책임 있는 태도인가?

물론 즉각 철병이라 해서 아무런 후속조치 없이 손을 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철병 계획을 먼저 세워놓고 그 안에 취할 수 있는 후속 조치를 취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취할 수 있는 후속 조치, 또는 꼭 취해야 할 후속 조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은 제3자에게 무책임한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는 태도였다.

조선인 대표를 먼저 유엔 총회에 불러오자는 주장도 그렇다. 미국 측은 충분한 대표권을 가진 대표를 선출해서 불러오려면 몇 달은 걸릴 테니 금년 회기 중에 처리하지 못하게 하려는 소련의 지연 전술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소련 측이 성의가 있었다면 조선인 대표들을 며칠 내에 불러올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양쪽 점령군이 몇 사람씩 추천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표결에서 패할 수밖에 없는 주장만 내놓을 뿐, 유엔 총회의 조선 문제 심의가 충실하게 되도록 노력하지 않았다.

소련은 조선 문제가 안보리 소관일 수는 있지만 총회 소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총회에서 의제로 채택해 버린 것을 어떡하나? 의제로 채택된 이상 심의가 제대로 되도록 노력하고, 결정이 내려지면 그 결정의 실행에서 제 몫을 이행하는 것이 조선인을 위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현실성 없는 주장만 하다가 원치 않는 결의안이 나오자 향후 진행을 보이콧한다고 나자빠져 버렸다.

미국의 제안으로 유엔이 조선 문제를 관리하게 되고 소련이 이를 보이콧함으로써 분단건국의 조건이 완성되었다. 소련이 '모 아니면 도'로 나온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분단 건국을 미국만이 아니라 소련도 바라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이 분단 건국을 바랐다는 사실은 미소공위 결렬 과정을 봐도 분명하다. 조선 민심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군정을 통해 장악해 놓은 남쪽 절반이라도 확보해 놓겠다는 심산이었다.

미국 의도가 너무 두드러져서 소련의 의도가 가려지는 감이 있는데, 공산주의 '우방'에 대한 소련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조선의 분단 건국을 선호할 만한 측면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을 지원하지 않은 것, 그리스공산당을 배신한 것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를 내치는 것을 보면 스탈린은 동지의식보다 통제력을 중시하는 패권주의 성향을 보였다. 조선에 대해서도 미소공위를 통해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일이 풀리면 좋지만, 그러지 못하면 북쪽 절반을 확실히 움켜쥐는 편이 낫다고 스탈린은 판단했을 것 같다.

손 하나로는 손뼉을 칠 수 없다. 조선의 분단 건국 과정에서는 미국만이 아니라 소련의 역할도 분명히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미군에 비해 소련군의 점령 정책이 좋은 성과를 많이 거둔 것은 조선의 상황과 조건이 미국보다 소련 쪽에 유리한 데 기본 원인이 있었다. 소련인이 미국인보다 착해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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