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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해방일기] 1947년 10월 29일

1947년 10월 22일

5개월 전 재개된 미소공위 진행을 위해 서울에 체류하던 소련 대표단이 10월 22일 서울을 떠났다. 1945년 말의 모스크바 삼상 회담 이래 조선 독립 건국의 통로로 여겨지던 미소공위가 문을 닫은 것이다.

5월 21일 서울에서 재개된 미소공위에 소련 측 대표로서 출석차 서울에 도착하여 이래 5개월간 곡절 많은 공위 사업을 운영하던 소련 측 대표 쉬티코프 대장 툰킨 레베데프 발라사노프 등 제 위원들은 본국 정부의 지령에 의하여 미소공위가 또다시 휴회되자 21일 공륙 양로를 취하여 평양으로 향하여 서울을 출발하였다. 즉 소 측 수석위원 쉬티코프 대장 툰킨 레베데프 양 장군은 동일 오후 1시 김포 비행장에서 비행기로 출발하고, 발라사노프 장군과 아브라멩코는 오전 11시 경성역발 제2292호 임시 열차(객차 3량 무개차 3량)로 수원 51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여 떠나갔다. 이날 역두에는 공위 미 측 제1분과위원장 웨커링 대장을 위시하여 미군 장교 다수와 주 경성 소군 연락 장교 등이 미군 군악대 주악리에 전송하였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7년 10월 22일)

미국은 소련과 1대1로 담판하는 미소공위 대신 유엔을 택했다. 유엔 총회에서는 미국이 내놓는 어떤 제안도 통과될 수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인 입장에서 유엔으로 가는 것이 잘된 길이었을까? 조선의 독립이 준비 단계에서부터 많은 나라의 인정을 받으며 진행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는 승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몇 개 나라가 있었고 소련이 그중 하나였다. 유엔에서는 소련의 승인 없이 조선 건국이 형식적으로는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정한 통일 건국이 불가능했고, 분단 건국은 전쟁을 거의 틀림없이 불러오는 길이었다.

소련이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바랐기에 미국과 타협이 되지 않았던 것일까? 한국인은 오랫동안 소련의 '세계 적화' 야욕 얘기를 들으며 살아 왔다. 미국이 아무리 양보를 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야욕이었기 때문에 미소공위는 애초부터 성공이 불가능했고, 미국이 유엔으로 데려가준 덕분에 반쪽이나마 '공산당의 밥' 되는 신세를 면했다는 얘기다.

이런 반공 선전이 내 생각에는 순 거짓말 같은데, 그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가는 당장 잡혀가 목숨이 어찌될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체제를 남한 사회는 수십 년간 겪었다. 워낙 무서운 체제를 오래 겪었기 때문에 그 체제가 풀리기 시작한 지 20여 년이 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나이든 세대만이 반공의식을 지키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의 상황은 그렇게 빚어진 것이다.

실제로 해방 공간에서 소련의 역할을 보면 '야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적어도 미국보다는 야욕이 적었다. 국경을 접한 나라에 자기네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정권이 들어서기만을 바란다는 뜻을 애초부터 분명히 밝혔고, 행동도 그 기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물려받으려 한 미국과 달리 조선인의 자치를 지지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이북에 만들어진 정권이 '친소'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남에 만들어진 정권의 '친미'와는 다른 차원이다. 소련과 중국 사이의 줄타기 등 이북 정권의 외교 정책을 보면 그 '친소'는 의존 정도였다. 종속 내지 예속 차원이었던 이남의 '친미'와는 달랐다. 인민의 지지 여부에 달린 차이였다. 소련은 조선에 인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이 세워져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맺게 되기 바란 반면 미국은 조선의 민의에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미국이 유엔에 제안한 것은 조선의 '총선거'가 아니었는가! 민의에 따라서 정부를 세운다는 제안이었다. 여기에 미국 제안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 명분을 '빛 좋은 개살구'로 여겼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선거가 시행되느냐에 선거의 실제 효과가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21일발 UP 조선] 소련 대표 안드레이 비신스키 외상 대리는 21일 UN 총회 전체회의에서 신 발칸조사위원회 설치 결의안 채택을 방지하려는 투쟁을 전개하고 조선 문제에 언급하여 조선의 국민 정부 수립과 미소 양국군의 조선 철퇴를 UN위원회로 하여금 감독케 하려는 미국 결의안에 최후까지 반대할 의도를 명시하여 미국은 조선에서 그의 군대의 엄호 하에 그리스 식으로 선거를 행하려 한다, 악질 실례는 전염병적인 것이라 하고 말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10월 22일)

그리스 내전의 상황을 1947년 3월 12일자 일기에서 살펴보았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그리스를 떠날 때 그리스인민해방군(ELAS) 병력은 10만을 넘는 반면 우익 독립군 병력은 2만이 안 되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루마니아를 차지하는 대가로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인정해 줬다. 스탈린의 지시 때문에 공산 세력이 적극 행동을 삼가고 있는 동안 영국은 우익 세력을 키워주고 ELAS 해산과 대량 검거 등으로 좌익을 탄압했다. 그리스공산당은 좌익 탄압 속에 진행된 1946년 3월의 총선거를 보이콧했고, 우익연합이 정권을 차지했다.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라는 미국의 제안이 유엔에서 통과된 후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는 앞으로 면밀히 살펴보겠거니와, 그 감시가 충분한 감시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다. 충분한 감시가 당시 유엔의 역량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애초부터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소공위의 조선 독립 과정 토론도 제대로 된 선거를 가능하게 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우선 연합국들이 합의할 만한 형태의 과도 정부를 만든 다음 그 과도 정부가 선거를 준비하게 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조선인으로 구성된 공정한 선거 관리 기구를 만들어야 유엔이든 연합국이든 소수의 감시자들이 들어와서 선거의 정당한 시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국군이 절반씩 점령한 상태에서는 공정한 선거 관리 기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과도 정부가 성립된 뒤에 총선거를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유엔 제안은 외국군 점령 상태에서 바로 총선거를 하자는 것이었다. 인구 비례로 대표를 선출할 때 미군 점령 지역에서 훨씬 더 많은 대표를 뽑을 수 있으니 점령 상태에서 선거를 하는 것이 자기네에게 유리하다는 속셈이었다. 미국은 명목만의 선거를 통해 자기네가 원하는 성격의 정권을 조선에 만들고 싶어 했고, 많은 유엔 회원국들이 눈 감고 이것을 승인해줬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국가로서 정당성을 내가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내 시각을 몇 해 전 이렇게 적은 일이 있다.

내게는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면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면도 있다. 다만 내 나라이기 때문에 아낀다. 자랑스러운 면이 많고 부끄러운 면이 적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는 데 내 힘이 쓰일 기회를 찾는다.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이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18개월 되었을 때 태어나 60년 가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내 나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냐 하는 실제 내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구만 해도 세 배 가까이 늘어났고, 가난하던 나라가 제법 잘 살게 되었고, 폭력이 판치던 나라에 민주 질서가 꽤 자리 잡았다.

정말 큰 변화다. 그 변화 속에서 '내 나라'에 대한 내 생각도 변해 왔다. 4·19가 있던 열 살 때까지는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생각했다. 5·16 후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자라는 동안 부끄러움이 생겨났다. 졸업 후 유신을 겪으면서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서른 살 무렵 사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회에 대한 내 책임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후 10·26, 5·18, 6·10을 차례로 겪었다.

1960년대 이후 내 생각의 전체적 변화는 부끄러움이 자랑으로 바뀐 것이다. 우선 빈곤과 독재를 벗어난 덕분이다. 그러나 더 밑바닥에 깔려 있던 불안감을 걷어내고 내 나라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2000년의 '6·15 공동 선언'이었다. 평생 불안하게 바라봐 온 민족과 국가의 괴리 상태를 극복하려는 '지속적' 노력의 출발점이 바로 6·15였다.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 29~30쪽)

많은 한국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좋은 나라를 만들고 키우기 위해 애써 온 결과를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나는 보고, 그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엉터리 나라로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고, 그로 인해 이 나라에 좋지 않은 문제도 많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어두운 면을 똑바로 바라봐야만 그를 극복함으로써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너무 크게 봐서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자세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정체성 위에 세우는 자세란 말인가? 한편 뉴라이트처럼 그 정당성을 절대화하는 태도에서는 더 큰 문제를 본다.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한 노력을 가로막으려는 야비한 술책이기 때문이다.

건국 과정에서 있었던 문제점들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유엔에 상정된 이제, 미국의 제안 방향이 지금부터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건국 후 한국인이 겪게 될 고통과 비극은 건국 과정의 문제점에서 파생된 것이 많다. 그중에는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들이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물론 분단 상태다. 건국 과정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그 문제들에 대한 어떤 책임이 이승만 세력과 김일성 세력, 미국과 소련에 있었는지 치밀하게 따지는 것이 분단 극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기형아로 태어난 아이에게도 행복한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 단,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기형의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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