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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꽃집' 지은 건축가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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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꽃집' 지은 건축가의 정체는…

[꽃산행 꽃글·30] 지리산에서 만난 벌레 ①

나의 곤충에 대한 지식은, 확인할 수는 없는 바이지만, 곤충이 나에 대해 아는 것과 거의 같은 정도일 것이다.

지리산 꽃산행 세 번째. 음정 마을에서 자고 벽소령으로 가는 작전도로를 따라 오를 때였다. 길가에 흔히 보이는 국수나무가 단단한 축대 옆에서 꽃을 아름드리 피우고 있었다. 작은 가지 안에 수(髓)가 국수같이 꼬불꼬불하게 있다 하여 그 이름을 얻은 나무이다. 멀리서 보아도 흰 꽃이 풍성했다. 국수나무 한 그루로 산모퉁이 하나에 온통 꽃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버릇대로 가지 하나를 한번 쓰다듬고 지나치려는데 좀 이상한 광경이 눈을 붙들었다. 손톱만한 벌 한 마리가 국수나무의 꽃 하나에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 꽃을 찾는 나비나 벌은 이리저리 꽃을 옮겨 다닌다. 너무 많은 꽃들에게 주둥이를 다 갖다 대려니 그만큼 바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그만큼 싱싱한 꿀을 딸 수 있을 것이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말이 다 여기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특정한 꽃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고서야 까닭을 알았다. 벌이 애착하여 탐하고 있는 것은 국수나무의 꽃이 아니었다. "지름 4~5밀리미터인 연한 노란색 꽃이 원뿔 차례를 이루며, 꽃받침 조각은 5개, 끝이 뾰족하여, 5개의 꽃잎은 주걱 모양으로 끝이 둥글고 가장자리에 털이 있는" 국수나무의 꽃. 얼핏 보면 그 꽃 같았으나 자세히 보니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벌의 집이었다.

▲ 국수나무. ⓒ이굴기

▲ 국수나무와 벌집. ⓒ이굴기

보호색이라는 게 있다. 이는 자연계의 동물이 다른 동물로부터 위치나 정체, 동작 따위를 숨기기 위하여 몸의 빛깔을 주위의 빛깔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페인팅이다. 이를 통해 포식자로부터의 위험을 피하게 된다.

국수나무의 깊숙한 가지에 꽃처럼 매달린 벌집을 보니 이 또한 보호색의 일종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색(色)만을 비슷하게 한 것이 아니라 집의 구조 또한 너무나 꽃과 비슷했다. 국수나무의 꽃의 잎자루는 털이 있고 4~8밀리미터이다. 줄기에서 그만큼 떨어져 있는 셈이다. 벌은 벌집도 줄기에서 꼭 그만큼 떨어지게 하였다. 다만 가는 털을 빽빽하게 만들 재주는 없었는지 연결고리를 거뭇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감쪽같았다. 이런 이중의 안전한 도피처를 마련한 벌이 참 기특하게 여겨졌다.

벌은 국수나무의 꽃 가운데에 마련한 집이 몹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내가 숨을 꼴딱이며 가까이 가도, 나의 카메라가 제법 큰 소리로 소란을 피워도 아무 끄떡도 아니 했다. 꽃에서 꿀을 따듯, 그저 꽃처럼 생긴 집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데 열중했다. 대롱대롱 달리기도 하고 지붕으로 올라가 살피기도 했다. 바람이 불었다. 국수나무는 아무런 차별없이 저의 꽃과 벌의 집을 호시도록 흔들어주었다.

▲ 지붕을 살피는 벌. ⓒ이굴기

몇 발짝 옮겼다. 이번에는 큰 잎이 눈에 들어왔다. 마 잎사귀였다. 그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있었다. 그것은 통통한 애벌레였다. 애벌레는 영리하게도 잎사귀와 같은 색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보호색이었다. 피부에 난 약간의 얼룩은 잎사귀의 희끗희끗한 표면과 너무 흡사했다. 한 마디 한 마디 구획되는 몸통의 주름은 잎사귀의 잎몸의 무늬와 너무 닮았다. 흰색이 조금 감도는 애벌레의 옆구리 측선은 잎사귀를 가로지르는 주맥이나 곁맥의 연장선으로 보였다.

나에겐 징그럽기만한 벌레. 하지만 누군가에겐 새우깡처럼 참 맛있는 먹이일 테다. 그러나 아무리 시력 좋고 매서운 새가 공중에서 노린다 해도 이 잎사귀에서 애벌레를 구별해낸다는 것은 참 어려울 것이었다. 애벌레는 잎사귀와 완벽한 일부분이었다. 그만큼 벌레는 잎에 동화되어 있었다.

어라, 이 녀석. 내가 그리 위험한 짐승이 아니란 것을 눈치라도 챈 것일까. 제가 겁 많은 나를 슬쩍 위협하면 손을 오그리고 몸을 찡그리며 놀라 물러설 줄을 아는 것일까. 녀석은 잎이 무슨 공연무대라도 되는 것처럼 마구마구 활개를 쳤다. 일 자(一) 모양으로 한 획을 긋는가 하더니 순간적으로 몸을 뒤틀고 꼬부리고 뒤집었다. 그럴 때마다 한글의 자음이 하나씩 태어났다. 기역, 니은, 디귿. 조금만 훈련시키고 제대로 연습하면 이응도 가능할 것 같았다.

▲ 마 잎사귀와 애벌레. ⓒ이굴기

▲ 마 잎사귀와 애벌레. ⓒ이굴기

▲ 마 잎사귀와 애벌레. ⓒ이굴기

애벌레의 공연을 뒤로 하고 또 몇 발짝 옮겼다. 거미줄이 잔뜩 쳐진 으름덩굴이 나타났다. 나무이기는 하되 덩굴처럼 마구 뒤엉켜 자라는 키 작은 식물이다. 그 줄기를 약간 벗어난 작은 가지와 잎자루, 잎 턱에 몸을 척 걸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역시 통통한 애벌레였다. 신기해라. 이 녀석은 몸에 뾰쪽뾰쪽한 가시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으름덩굴 가지에서 나온 가시처럼 보였다. 그래서 녀석이 안심을 하고 한 바탕 통통한 몸을 구불렁거릴 때마다 새로운 상형문자가 하나씩 태어나고 있었다.

▲ 으름덩굴과 애벌레. ⓒ이굴기

지리산이 자연의 큰 학교라는 것을 알겠다. 저 푸른 초록의 나무들에서 목(木)은 태어났다. 나무가 모인 수풀 임(林)이나 삼림(森)도 마찬가지이다. 화(花)는 고운 꽃잎들이 슬기롭게 모여 꽃을 이루는 모양을 보여준다. 오늘 꽃산행에서는 꽃 말고 배운 게 많았다. 또 몇 발짝 옮겼다. 지리산 학교는 쉬는 시간이 없는 모양이다. 보호색과 함께 생물학 시간에 배웠던 의태(擬態)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한 녀석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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