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일 전 "한국 사회 역사 인식의 문제"를 논하는 글을 쓰면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 박근혜의 발언에 큰 문제가 들어 있음을 지적했다. 반공 독재 아래 강압적으로 주입된 역사 인식이 지난 25년간 극복되어 왔지만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극복의 방법이 강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박근혜처럼 생각하고 있던 25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시대의 흐름이 어느 방향인지는 자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들어 시대의 흐름을 가리려 드는 것은 그야말로 '미래를 바라보는' 정치인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이다.
한 마디 말에서 언급된 사실 자체의 인식을 넘어 말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드러날 때가 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는 말은 머리수로 승부를 가리려는 폭력적 자세를 보여준다. 국민들의 생각에 편차가 클 때, 그 편차를 줄이려는 고민이나 노력 대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결집시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이기고 보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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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일장학회의 양도가 강압에 의한 탈취인가 하는 문제에서 김지태의 인격은 직접 관계가 없는 사안이다. 강도범의 변호사가 피해자의 인격을 문제 삼아 범행을 변호할 수 있는가? 그런데 기자 회견에서 김지태의 인격을 깎아내린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나쁜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박근혜의 마음속에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히틀러 일당은 유태인, 집시 등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재산과 인권, 생명을 유린했다. 그것이 파시즘의 본질이다. '나쁜 사람'의 범위는 갈수록 넓어져 그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유린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문명 사회에서는 '나쁜 사람'들의 권리도 존중받고 보호받는 것이다.
박정희 군사 독재의 치명적인 문제가 인권 유린이다. 자기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모두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인 파시스트 체제였다. 길거리의 장발 단속도 인혁당(인민혁명당) 사법 살인도 모두 파시스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딸이 애비의 강도질을 변명하기 위해 피해자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다니, 그의 사고방식은 유신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하물며 고 김지태 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박근혜는 대통령 후보 이전에 인간적으로 '참 나쁜 사람'이다. 자기 입장을 우기기 위해 타계한 지 20년이 된 인물을 욕보인다는 것, 이건 정말 보통 사람이 못할 못된 짓이다. 과연 김지태가 그런 소리를 박근혜에게 들을 만큼 나쁜 사람이었는지 따져보고 싶다.
유족들이 박근혜의 발언에 발끈해서 사자 명예 훼손으로 고발하려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의 폄훼가 타당한 것이었는지는 법정에서 살펴질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대선 정국을 감안해서 유족이 법적 조치를 보류하고 있으니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지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겠다.
내가 김지태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해방 일기' 작업에 참고하는 책 중 1976년에 나온 그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에 관한 기록 중 재계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것이 극히 적기 때문에 중요한 참고서다. 그 기록의 신뢰도를 가늠하기 위해 김지태의 생애(1908~1982년)를 대충 살펴보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서전 외의 자료를 찾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혜 측이 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근무를 이유로 그를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지태는 상업학교 졸업 후 5년간(1927~1932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근무했는데,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은 <친일 인명 사전>의 수록 기준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경제 분야의 수록 기준 중에 "국책 경제 기관(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과 경제 단체의 간부"가 있다.) 스무 살 안팎의 나이에 서기 노릇 몇 해 한 것은 친일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1934년에 기업 활동을 시작한 김지태가 해방 당시 부산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해 있기까지 과정에서라면 친일이든 뭐든 재주를 피웠을 개연성이 있다. 자서전에는 조선지기(1935년 설립)와 조선주철(1943년 획득)의 경영 외에 부동산 사업에 큰 노력을 들인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일본의 식민 통치나 전쟁 정책에 특별히 밀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 시절에 부동산 사업에 치중했다니 짧은 기간에 자본을 크게 키운 사실도 대충 이해가 간다.
해방 공간에서 김지태의 활동은 '해방 일기' 작업의 필요에서 면밀히 살펴보고 있지만, 그의 사람됨을 더 쉽게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의 1950년대 활동에서다. 1950~1958년간 국회의원으로 공인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 제2대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고 후에 자유당에 입당했다가 1954년 말, 제3대 선거에서 당선된 얼마 후 제명당했다. 5개월 후 복당되었으나 1958년 제4대 선거에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 후 국회를 떠났다.
국회의원으로서 김지태는 자본가의 입장에 너무 투철해서 이따금 언론의 조롱을 받았다.
요즈음 무슨 세 무슨 세 하여 개정 법률안이 본회의에 쇄도하고 있거니와 오늘의 법인세법 중 개정 법률안에도 빠짐없이(?) 김지태 의원이 등단하여 발언을 하니 의석에서는 김 의원을 가리켜 세법의 권위자(?)라고 (…) (<경향신문> 1952년 11월 16일)
"사용자는 1개월에 1일의 유급 휴가와 2일의 유급 병가를 주어야 한다"는 49조 심의에서 김지태 김봉재 양군은 "그렇게 되면 일요일 명절을 합쳐 1년에 102일의 휴가가 있게 되니 이는 기업주의 파탄을 초래하여 기업가와 노동자가 한꺼번에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창하여 병가 2일만은 삭제 통과. 뺑덕어멈 살구 값에 심 봉사 망하듯 해서야 되겠소? (<동아일보> 1953년 4월 12일)
노동기준법의 축조 심의에 있어서 김지태 의원의 활약에 괄목할 바 있다. 즉 동 의원은 노동 시간을 만 13세부터 만 16세까지는 6시간으로, 만 16세 이상 만 18세까지는 7시간으로 하자는 원안을 반대하여 만 13세에서 16세까지는 7시간, 그리고 16세 이상은 성인으로 취급하여 8시간제로 하자고 주장하여 성공하였다. 민주주의의 표결 방식에 따라 요청한 김지태 의원의 수정안에 의하여 나이 어린 소년 소녀도 과중한 노동을 하게 되었는데 수정안을 다른 의원이 제출하였던들 기업가의 근성을 발휘하였다고 하는 오명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견직이란 대기업체를 가지고 있는 김 의원인지라 응당 복안 있을 법도 하지만 법이란 만인을 위해서 제정될 것이라는 원칙은 무시할 수 없으리라. (<경향신문> 1953년 4월 15일)
지금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노동자의 권리에 인색한 보수적 입장으로 보이고, 자본가 집단의 이기주의를 대변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아직 계속되고 있고 복구의 과제가 엄청나던 당시 상황에서 선진국 기준의 노동 조건 도입에 반대한 것을 '애국심'이나 '공공성'의 기준으로는 크게 탓할 일이 아니라고 나는 본다.
국회의원으로서 김지태의 활동을 개관하면 시대의 흐름을 앞서 가는 큰 경륜은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위치에 대해 성실한 자세는 확실히 느껴진다. 특히 그의 애향심을 두드러지게 느낀다. 아래 기사에서는 부산특별시 승격 추진을 부산 출신 국회의원들의 득표 운동으로 해석했지만, 그는 일찍이 1947년부터 부산특별시 승격 기성회 회장을 맡는 등 부산시 승격을 꾸준히 추진해 온 사람이었다.
최근 의원들이 법률안을 제출하는 행위가 가분잭이 눈에 띄는데 동절이 가까우면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의원들의 선거 기일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무언중에 알려주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부산시 특별시 승격안 같은 것인데 본시 부산시 승격 운동은 제헌의회 당시에도 말기에 즉 선거를 앞두고 제출되었다가 잡음만 남기고 실패하였고 그 후 사변 후 정부와 국회가 부산에 피난 중에 또한 제출되었으나 시기 상조라는 이유로 보류당했던 것인데 동 승격안이 정부 환도 후에 또다시 제출되었으니 도대체 승격은 부산 시민들이 그렇게 열렬히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부산의 소위 유력자가 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동 승격 운동 선봉에는 부산 출신 의원들이 맹활약 중이라고. 그런데 선량들이 부산을 떠나기 전 어떤 날 부산시 승격 운동의 1인인 김지태 의원이 궁전 같은 거제리 자택에 의원을 초대하고 산해진미와 견직물 한 필씩을 환도기념품으로 주었다고 하는바 이번 승격을 위하여 손 들어달라고 준 것은 아니겠지요? (<경향신문> 1953년 10월 20일)
당대의 재벌급 자본가가 국회의원이 되어 지역 발전을 위한 의안에 열중하고 기업가에게 유리한 쪽으로 의정 활동을 벌였다면 '정경유착'이란 말이 바로 떠오른다. 그런데 조금 세밀히 들여다보면 정치를 개인적 축재에 이용하는 정경유착의 전형적 모습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기업가의 능동적 역할을 중시하는 사회관을 가진 것이었고, 정치를 통해 재산을 늘리기보다는 잃은 것이 많았다. '조방낙면(朝紡落綿)'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부산 범일동 소재 조선방직은 당시 조선 최대의 제조업체였다. 김지태는 1948년 3월부터 이 회사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1951년 3월의 적산 불하를 받을 '연고자'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하 예정일을 사흘 앞둔 1951년 3월 16일 회사 간부 거의 전원이 김창룡 특무대장이 지휘하던 군검경합동수사본부에 '이적죄'로 체포되었다. 국회가 개회 중이었기 때문에 현역 의원인 김지태는 불구속 입건되었다.
혐의 범죄는 광목을 짜는 데 새 솜만 쓰지 않고 재생 솜(낙면) 5퍼센트를 섞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재판에서는 재생 솜 섞어 쓰는 데 아무 문제없다는 서울공대 교수들과 조선방직의 미국인 고문의 증언을 발판으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혐의에 '이적죄'를 적용시킨 것은 이 광목이 군복에 쓰여 전투력을 저하시켰다는 것인데, 사건을 군사 법정에 묶어놓기 위한 꼼수였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동안 조선방직은 이승만의 양아들로 통하던 강일매에게 불하가 넘어갔다.
김지태는 조방낙면 사건이 다음 대통령으로 장면을 밀고 있던 자신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었다고 자서전에서 주장했다. 자서전에 없는 얘기로, 그가 이승만의 정치 자금 요구를 거절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는 설도 시중에 떠돈다. 나는 이런 얘기들을 100퍼센트 믿지는 않지만 그가 이승만에게 고분고분한 태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쟁 당시 그가 갖고 있던 발판 위에서 이승만과 진짜 '정경유착'을 했다면 그가 한국 최대의 재벌을 탄생시켰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본다. 1970년 8월 2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의 이런 대목에도 정-경 관계에 대한 그의 관점이 나타나 있다.
그 자신 정치인이었으면서도 정상배를 가장 싫어한다는 점이 그 하나다. 정상배의 정의를 그는 최근의 신흥재벌이란 의미와 혼용하고 있다. 이런 그의 사고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정통재벌의 권위의식이 강하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군수 기지 사령관으로 부산에 있던 박정희가 김지태에게 거사 자금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원한으로 그를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도 시중에 파다하다. 나는 그럴싸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1960년 시점에서 부산뿐 아니라 한국 재력가 중에 김지태만큼 반 이승만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던 사람이 따로 없었다. 4·19 이전 시점에서 자유당 정권 타도 거사를 박정희가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져 왔는데, 그런 거사를 위해 손 벌릴 상대로 김지태가 적당한 상대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 이야기가 자서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 나온 책이니까.
김지태의 생애를 살펴보며 기업가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의 식견이 그리 넓지 못하고 그의 인생관이 그리 깊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관점에 따라 세상을 대하고 살아간 그 정직한 자세는 누구라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직한 자세로 남겨준 자서전을 활용하는 고마운 마음 때문에 박근혜의 "부정부패 운운" 하는 파렴치한 모욕을 반박하고 나선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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