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이렇게도 힘든 직업을 택하다니. 매일같이 여행이다. 이 일은 회사에서 하는 실질적인 일보다 훨씬 더 신경을 자극시킨다. 그 밖에 여행하는 고역이 있고, 기차 연결에 대해 늘 걱정해야 하며, 식사는 불규칙적이면서 나쁘고, 대하는 사람들은 항상 바뀌고 따라서 그들과의 인간관계는 절대로 지속적일 수 없으며 또한 진실한 것일 수도 없다. 이 모든 걸 악마가 가져갔으면! (<변신 : 카프카 전집 1>(이주동 옮김, 솔 펴냄), 110쪽)
그에게는 상황을 직시할 기운이 없다. 그렇게 해보았자 바뀔 건 아무것도 없고 자신만 더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은 그를 지치게 하고, 그는 이미 너무 피곤하다. 몸통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고 가느다란 다리들을 휘저으며 잠자는 계속해서 생각한다. 직장인이라면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며 한 번쯤 해보았을 그런 생각을, 차라리 공상을.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군. 사람이란 잘 만큼 자야 해. 다른 외무 사원들은 규방 여인들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주문 받은 것을 기입해두려고 여관에 돌아오면 그때서야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거든. 사장한테 한번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해볼 만도 한데. 그러면 당장에 쫓겨날 거야. 하지만 쫓겨나는 게 나에게 좋을는지 몰라. 부모님 때문에 망설이긴 했지만, 그렇지만 않다면야 벌써 오래 전에 사표를 냈을 거야. 사장 앞에 다가가서 내 의견을 송두리째 털어놓았을 것이고, 그러면 사장은 책상에서 굴러 떨어졌을 거야. 사장이 책상 위에 앉아 내려다보며 직원한테 얘기하는 것은 참 별난 짓이다. 게다가 사장은 귀가 어두워 가까이에 다가서야 하지.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부모의 빚을 그에게 다 갚을 만큼 돈을 모으면 ‐ 그렇게 되려면 아직 오륙 년이 더 걸릴 테지만‐꼭 그렇게 하고 말겠어. 그러면 큰일을 한 게 되지. 그렇지만 지금은 우선 일어나야겠다. 기차가 다섯 시에 떠나니까. (<변신 : 카프카 전집 1>, 111쪽)
하지만 그는 일어날 수 없었고, 다섯 시 기차를 탈 수도 없었다. 아무리 다짐을 하고 스스로를 다독인대도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을 돌이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일과 사장, 빚과 가족이었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 자신이 되겠다는 생각을 할 만큼 순진하지도 못했고, 성실한 직장인이 될 만큼 현실적이지도 못했을 뿐이다. 잠자는 벌레가 되었고, 가족의 수치가 되었다. 자신의 좁은 방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1915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57년 후,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의 첫머리를 스터즈 터클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을 주제로 한 이 책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책이다. 여기에는 신체에 대한 폭력뿐 아니라 영혼에 대한 폭력도 포함된다. 이 책은 상처와 사고, 말다툼과 주먹다짐, 신경쇠약과 화풀이에 대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일상의 모멸감을 다루고 있다. 상처 입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날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다. (<일>(노승영 옮김, 이매진 펴냄), 13쪽)
잠자는 실패했고, 우리는 성공했다. 살아남은 우리는 세상을 떠난 잠자를 마땅히 애도해야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기운이 없다. 그렇게 해보았자 바뀔 건 아무것도 없고 자신만 더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는 이미 너무 피곤하다. 점점 가늘어지는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출근길에 올라 대단한 성공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터클은 이런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소개한다. 그들은 말한다.
용접공이 말한다. "저는 기계입니다." 은행 출납계원이 말한다. "저는 갇혀 있습니다." 호텔 안내원도 같은 말을 한다. 철강 노동자가 말한다. "저는 노새입니다." 접수계원이 말한다. "제가 하는 일은 원숭이도 할 수 있어요." 이주 노동자(농장을 옮겨 다니며 품팔이를 하는 농장 인부)가 말한다. "저는 농기구나 다를 바 없습니다." 패션모델이 말한다. "저는 물건입니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저는 로봇입니다." 젊은 회계사가 절망적으로 내뱉는다.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오래 전 존 헨리(John Henry)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존 헨리는 망치를 손에 쥔 채로 죽음을 맞았으나 증기 굴착기는 펌프질을 멈추지 않았다. (<일>, 14쪽)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공의 전부일까? 설마. 지금은 2012년이다. 잠자의 죽음으로부터 벌써 100여 년이, 터클의 구술사로부터는 4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성공한 조부모와 부모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았고, 우리 또한 성공하고 있으며, 우리 자식들에게 성공을 물려주려 하고 있다. 더 큰 성공을, 더욱 빛나는 성공을. 이제 우리는 대형 TV와 스마트폰과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를 갖게 되었고, 별 쓸모없는 물건을 무척이나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소셜 커머스와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는 저가 항공권을 갖게 되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성공이다.
▲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맥스 애플 외 지음, 강주헌·하윤숙 옮김, 홍시 펴냄). ⓒ홍시 |
안 봐도 빤한 얘기였다. 장담하건대 분명 노조가 해산되거나 매수되었을 것이다. 정리 해고의 위협 앞에 임금과 수당은 계속 줄었을 것이고 그래도 결국 정리 해고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자리가 바다 건너 임금 노예들에게 갔을 테니. 그러는 와중에도 고용주들은 '가족' 기업이라는 허울 좋은 그림을 떠들어댔겠지. 앞으로 나아질 거라면서. 그러다 한 세기동안이나 강물에 폐수를 들이부은 벌금을 낼 처지에 놓이자 이때다 하고 공장을 팔아치웠을 거다. 그리고 새 고용주가 들어왔겠지. MBA 졸업장을 든 하이에나들이 노동자들의 연금 기금을 빼돌리고 파산을 선고했을 것이다. 버크가 속속들이 아는 얘기, 생각할수록 넌더리나는 얘기다. 특히 노동자들을 생각할수록 신물이 났다. 고용주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등골을 빼내도록 내버려두다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라의 기둥이요 이 땅의 소금이라는 둥,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둥 입 발린 소리를 해대며 자신들을 착취하도록 가만히 놔두다니! 젠장! 그런데도 그들은 이제 까맣게 잊어버리고 피해자가 아니라 강도 편에서 투표를 한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도 싸다. ('증언', <직업의 광채> 362쪽)
하지만 하루 여덟 시간 이상을 노동에 바치며 일상을 살아가는 노동자에게도 사정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입장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신물이 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벙어리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쳤을 뿐입니다." 철강 노동자 마이크 르페브르는 이런 은유적인 질문을 던진다. "누구를 한방 먹이시겠습니까? 제너럴모터스를 때려눕힐 수는 없습니다. 체제를 무너뜨릴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동네 술집에서 자기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을 두들겨 팬다. 맞은 이 또한 평범한 노동자다. 한번 둘러보라.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직업에 대한 통념을 무시할 수 없다. (<일>, 30쪽)
▲ <직업의 광채>(토바이어스 울프 외 지음, 이재경·강경이 옮김, 홍시 펴냄). ⓒ홍시 |
어쩌면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문학이 더는 읽히지 않는 거라고. 그렇게 고압적인 자세로 옳은 이야기를 해보았자 귓등으로 들리지도 않는다고(물론 우리는 그것이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독자들이 까막눈이라 그런 게 아니다. 단지 지쳤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어보았자 바뀔 건 아무 것도 없고 우리만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책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술과 담배 역시. 하지만 두 권의 선집,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과 <직업의 광채>가 이런 이야기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소설가이자 이 선집을 기획한 리처드 포드 또한 서문을 통해 그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하지만 이 책이 정시에 출근하고 일을 끝내야 하며 일거리를 집에 가져가고 어떻게든 고용되어야 하며, 때로는 해고되고 승진하거나 좌천당하며, 구조 조정당해서 집에 보내지고, 때로는 넌더리가 나서 보따리를 쌀 준비를 하지만 돈벌이를 해야 하는 복잡하고 곤혹스런 문제들에 대해 문학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 16쪽)
과연 책은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들의 이야기가.
무료한 일상에 지쳐 친구와 얼린 요구르트 사업을 하려는 여자(맥스 애플, '사업 이야기')
게토에서 범죄자를 죽이는 범죄를 하는 사업을 통해 성공한 버스 운전기사(러셀 뱅크스, '걸리')
고객의 편을 들었다가 초등학교 학생으로 보내진 보험사정사(도널드 바셀미, '나와 맨디블 양')
부하 직원을 해고했다가 성희롱 가해자로 몰린 보안관(리처드 바우스, '부당한 일')
관세를 피해 기막힌 방법으로 구두를 수입하는 수입업자(톰 코라게선 보일, '자파토스')
순수한 서정을 노래하다 뒤늦게 정념에 눈을 뜬 계관 시인(존 치버, '사과의 세상')
지체 장애인 아들을 건사하는 타자기 수리공(찰스 담브로시오, '드러먼드와 아들')
이제 막 데뷔한, 세상 모든 것을 이야기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젊은 작가(니컬라스 델반코, '작가들이 하는 일')
값비싼 당구대를 운반하다 보상 받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버린 도미니카 출신의 이민자(주노 디아스, '뉴저지, 에디슨')
부인의 외도를 알아 챈 선원과 그것을 바라보는 어린 형제(안드레 더뷰스, '배달')
시베리아처럼 추운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실존적인 구토를 경험하는 문학청년(스튜어트 다이벡, '사워크라우프트 수프')
회계사와 함께 유령 회사를 만들어 악덕 사장의 돈을 빼돌리는 출판 편집자(제프리 유제니디스, '위대한 실험')
주말에는 관광 가이드로, 평일에는 병원의 통역원으로 일하는 인도의 가장(줌파 라히리, '병을 옮기는 남자')
목장을 전전하는 카우보이(토머스 맥구언, '카우보이')
일본이 좋아 일본에 왔지만 낯선 곳에서 일을 구하지 못해 배를 굶는 젊은이들(ZZ 패커, '거위들')
온갖 직업을 전전하는 가족(애니 프루, '직업 이력')
국가 기밀을 다루는 기관에서 일하며 그 자신이 비밀의 미로에 갇혀버린 남자(짐 셰퍼드, '미노타우로스')
낯선 곳에서 행복의 비밀을 엿본 후 스스로의 삶에 의문을 던지게 된 외판원(유도라 웰티, '외판원의 죽음')
패배를 연기하는 것을 즐기며 직장에서 해고 당하는 순간까지 연기를 멈추지 않는 (전직) 회사원(리처드 예이츠, '패배 중독자')
각자의 노동, 각자의 사정.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사연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물론 일이다. 일이 주는 위안과 피로,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여 있다. 주된 정서는 물론 피로와 씁쓸함이지만 그 이유를 이 자리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고 있고, 또 알고 있는 일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이들 작가들이 적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타이완의 영화감독 차이밍량은 언젠가 정성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면 상업 영화이고, 나의 내일을 걱정하면 예술 영화입니다. 그러므로 상업 영화는 항상 책임질 수 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예술 영화는 자기가 알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그냥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정성일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454쪽)
그리고 그것은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다시 당면 문제로 돌아가자.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라면, 읽어서 아무 것도 바뀔 게 없는 이야기라면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이미 지쳤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도 지치는 마당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의 몫이 아니다. 구태여 이런 책을 엮어낸 편저자 리처드 포드의 몫이다.
일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철학적 관점에서 다룬 논문은 많다("아렌트 부인, 당신이 전면에 나설 때가 됐습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는 얼마 전에 <파리 리뷰>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을 픽션으로 풀어 써야 한다고 말했다. 적절한 지적이다. 일은 어떤 식으로든 항상 존재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삶에 언제나 가까이 있다. 우리는 일과 너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일을 이론화하면 희미하지만 흥미롭고 돌발적인 조각들을 놓쳐버려, 진실로 가는 길의 겨우 일부만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소설에서 언급되는 만큼 이야기에 스며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완전한 진실을 창조해내기 위함이다. (<판타스틱한 세상의 개 같은 나의 일>, 13쪽)
그리고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에서 언급되는 만큼 이야기에 스며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된 진실(나는 여기에 '완전한'이라는 지난 세대의 단어를 붙일 배짱은 없다)의 다른 면을 엿보기 위함이고, 우리가 놓쳤던 진실의 조각들을 다시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보기 위함이다. 결국, 우리가 매일 아침 마주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만일 당신이 그저 어느 순간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거기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문제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다면, 왜 영화를 보는가? 차이밍량은 그러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455쪽)
그리고 그것은, 물론, 소설도 마찬가지다.
일만으로 세상을 살기는 너무 피곤하다. 나머지를 사랑과 우정과 그 밖의 따듯하고 다정한 것들로 채울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스마트폰과 SNS와 소셜 커머스와 저가 항공권이 조금의 위안이 될 수도 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의 일상은 블랙홀처럼, 숫자로 된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종내 숫자가 된 우리를 집어 삼키고 만다. 그러니 그곳에 삼켜진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 우리에게 소설은 발을 디딜 수 있는 작은 디딤대가 될 수도 있다. 펼친 책의 크기만큼이나 아주 작고 위태로운, 그러나 분명히 도움이 되는 그런 디딤대 말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른두 명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흘륭히 해내고 있다. 이런 건 내가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이 책을 그저 한 번 읽는 것으로 충분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글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글도, 두 권 소설의 판매량을 걱정하는 글도 되지 못한다. 이 글이 예술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알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그냥 끝날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런 문장이 될 것이다.
마감을 앞둔 아침 부족한 잠에서 깨 허둥대며 쓰고 있는 이 서평이 책임지지 못할 인용만 가득할 뿐 아무 고갱이도 없이 이토록 볼품없는 이유는 단순히 내가 항상 마감에 늦는 게으른 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서평을 써서 먹고 사는 '생계형 독서가'이기 때문이고, 바로 그 사실이 나의 영혼을 잠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놀라운 속도로 타자를 쳐내려가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얼른 쓰고 다시 잠을 청해 이런 어리석은 글은 잊도록 하자.' 하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벌레가 된 스스로를 발견한다 해도 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나의 입장이고, 나의 사정이다. 리처드 포드가 투덜거린 것처럼 "글을 쓰는 작업이 주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관습적인 딜레마"가 있긴 하지만 이것이 내가 몸을 담구고 있는 노동의 조건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이 그렇듯 얼마간의 체념과 타협, 슬픔과 분노, 그럼에도 접을 수 없는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리처드 포드가 선집에 싣고 싶었지만 각자의 사정 탓으로 끝내 실을 수 없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인물이 그런 것처럼, 살아있는 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의 글을 훔쳐 글을 마무리하는 이런 뻔뻔함을 이해하시길.
그때, 차가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차창에 부딪히는 바람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조지는 가속 페달이 바닥에 닿고 나서도 계속 그냥 밟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할부금도 다 갚지 못한 조지의 커다란 자동차에 탄 채, 그렇게 도로를 질주했다. ('코끼리',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안종설 옮김, 집사재 펴냄),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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