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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자살 vs. 빨치산 학살, 죽음 앞에 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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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자살 vs. 빨치산 학살, 죽음 앞에 선 우리!

[프레시안 books]임철규의 <죽음>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운명이다. 그리스인들이 신과 인간을 가르는 결정적 기준이라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죽음, 즉 신은 불멸(immortality)의 존재이고 인간은 필멸(mortality)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따라 인간의 품위가 달라진다면, 어떻게 죽음을 대하는가는 그가 어떤 인간인가를 말해주는 징표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인간은 "죽음 앞에서 부단한 도피"를 시도하거나 "죽음에 대해 부단한 안도감"에 빠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공포에서 비롯된 도피든 일시적 모면에서 얻는 안도감이든, 그 어느 쪽도 죽음을 진정으로 대면하는 길은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하는 존재이고,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각자 고유한 본래성을 되찾는다. 죽음은 허무한 종말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 가능성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봄과 여름 동안 찬란한 꽃과 잎사귀를 피웠던 존재들이 마침내 쇠락과 소멸의 길로 접어드는 이 가을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물음이다.

원로 영문학자 임철규가 최근 펴낸 <죽음>(한길사 펴냄)은 죽음에 대한 풍요로운 인문적 성찰을 담고 있는 역작이다. 저자는 요즈음 우리 사회의 화두인 "잘 죽는 법," 이른바 "웰 다잉"(well-dying)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다. 저자는 문학, 역사, 신화, 철학, 정신분석학, 종교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다각적으로 죽음을 고찰한다.

자살에 대한 찬반론에서부터 신념과 죽음, 전투와 전쟁, 아우슈비츠의 기억, 예술가의 죽음, 죽음 본능, 사후 세계(천국과 지옥) 등 죽음을 둘러싼 여러 주제와 현상들이 그의 사유를 통해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음은 분명 어둡고 무거운 주제임이지만 이 책을 읽는 일은 그다지 어둡지 않다. 독자들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문체에 의해 죽음에 관한 주제들이 골고루 잘 차려진 화려한 지적 밥상을 받는 풍요로운 독서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특정 시각을 강요하기보다는 여러 입장들을 균형 있게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한다.

죽음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을 다채롭고 균형 있게 제시하고자 하는 전반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감정과 애착이 짙게 묻어나는 죽음이 있다. 책머리에서 저자는 자신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두 죽음에 대해 토로한다.

죽음이라는 주제로 책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는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자살이었다. 나는 5월 말 추모 기간 중 그의 고향 마을 봉하에 찾아가 그의 영전에서 그를 위해 한 편의 글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7쪽)

한국 전쟁이 끝난 바로 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목격했던 한 광경은 엄청난 트라우마로서 내 삶의 거의 전부를 휘감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수십 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 고향 경남 창녕 옥천리에는 당시에 빨치산이 있었다. (…) 나는 그때, 목이 잘린 채 얼굴은 피로 물들고, 머리카락은 눈썹 아래로 흩어져 내리고, 혀는 입술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그 빨치산의 모습, 그리고 잘린 목을 창끝에 꽂은 채 흔들어 대며 트럭 위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며 지나가던 토벌대의 모습을 무서움에 떨며 지켜보았다. 초등학교 때의 그 경험으로 인해 인간과 삶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날 이후 철저하게 비관주의로 물들게 되었다. (8쪽)

▲ <죽음>(임철규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과 한국 전쟁 직후 어느 빨치산의 학살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원초적 체험을 구성한다.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른바 '자연사'의 호강을 누리지 못한 이 두 돌발 죽음, '자살'과 '학살'이라는 처참한 행위를 동반했던 이 두 죽음은 저자로 하여금 학문의 마지막 단계에서 마치 운명처럼 죽음에 대한 책을 쓰게 만든다. 한국 현대사는 제대로 죽지 못한 수많은 죽음들을 낳은 불행한 역사였고, 나 역시 이 불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이 두 죽음을 목격한 뒤 그가 경험한 "본능적 떨림"은 정의에 대한 윤리적 감각에 다름 아니다.

저자가 자살에 대한 찬반의 역사를 1장에서 정리하고, 2장에서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 카토의 자살과 노무현의 자살을 비교한 뒤 이를 숭고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아름다운 죽음'으로 해석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이 분노와 죄책감을 동반한 "본능적 떨림"이었다. 카토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노무현은 진보의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카토의 자살이 수많은 예술을 통해 불멸의 명성을 얻었듯, 노무현의 자살 역시 수많은 추모의 시와 노래를 통해 불멸성을 획득했다. 시인 안도현이 서울광장의 노제에서 읽은 추모의 시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는 노무현의 자살이 "주류에 의한 비주류의 타살"이지만, 동시에 '그의 승리'라고 선언한다. 시인은 말한다. 마지막 승자는 그를 자살로 몰고 간 "저 무자비한 권좌의 폭력의 주먹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고.

하지만 '아름다운 죽음'에 이르지 못한 죽음도 있다. 저자의 평생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어린 시절의 빨치산 학살 장면은 역사엔 '개죽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프게 증언한다. 책의 4장('기억, 망각, 그리고 역사 : 아우슈비츠, 그리고')은 결코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 없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인종 학살의 문제로, 그리고 학살에서 살아남았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삶으로 돌아간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아우슈비츠는 아름다운 죽음의 금지다"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에선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그 어떤 조건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멸 수용소는 죽음 자체를 익명으로 만들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라 본 죽음마저 그곳에선 없었다. 그곳엔 실존적 체험으로서 죽음을 거부당한 시체들이 컨베이어벨트를 도는 물건들처럼 대량으로 양산될 뿐이었다.

절멸 수용소의 수인들 중에서도 밑바닥을 차지했던 사람들, 레비가 '익사한 사람들(the drowned)'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죽음을 더 이상 인간적 경험으로 체험하지 못한다.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홍수에서 구조되었지만 1987년 4월 우울증으로 자살한다. 그의 자살은 어떤 인간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아름다운 죽음이라기보다는 "인간 운명에 대한 철저한 비관주의의 결과"이다.

저자에겐 어린 시절 경험한 빨치산 학살이 이런 비관주의를 낳았던 것이 아닐까? 그가 역사의 망각을 권유하는 니체에 이끌리면서도 기억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것도, 또 이 장의 마지막을 "역사의 카타르시스는 없다"(153쪽)는 진술로 마감하는 것도 결국 이런 비관주의를 떨치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산 자는 죽음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은 산자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비밀이자 신비다. 저자가 죽음에 관한 이 묵직한 저서의 맨 마지막을 "신비는 신비로 남겨두고" "우리의 직접적 대상인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더 '현명한 것'인지 모른다"(349쪽)는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삶을 더 잘 알고 더 잘 살기 위해선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비단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죽음이 인간 주체의 고유한 본래성을 되찾게 해주는 가능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가 직접 체험했듯이 한국 현대사는 특히 기막히고 억울한 죽음들로 점철되어 있다. 토벌대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빨치산들, 군사 독재 시절 고문으로 죽어간 피해자들, 성을 유린당하고 먼 타국에서 쓸쓸이 죽어간 위안부 여성들.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역사적 타자들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삶보다 죽음을 더 치열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미래의 타자들은 죽은 자의 얼굴로 우리에게 올 수 있다. 그들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고, 죽어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그들의 고유한 삶의 이야기를 더 치열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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