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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좌경 저널리스트'가 본 분단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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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국 '좌경 저널리스트'가 본 분단 건국

[해방일기] 1947년 10월 19일

1947년 10월 19일

AP 특파원 램버트의 기사 하나가 나왔다. 그 동안 나온 램버트의 기사를 보면 우편향이 확실한 기자다. (<경향신문> 1949년 9월 18일 "소 공위재개 제안은 UN 상정 방지책으로?", <동아일보> 1947년 9월 28일 "적색정권 기도 준비? '슈' 씨 제안에 재경 미 고관 담", <동아일보> 1947년 10월 2일 "AP 특파원 램버트 씨 견해-미의 경제 원조 여하로 조선 적화는 방지")

[동경 20일발 AP 합동] 최근 서울을 방문하였던 AP 특파원 램버트는 조선 상황에 관하여 여좌히 보도하였다.

"최근 조선 피난민 구제 사업에 종사하는 남조선 미군 정보국 및 남조선인으로부터 입수된 사실로 보면 조선의 피난민 이주 상황은 과반 북조선을 시찰한 안나 루이제 스트롱 여사의 보도와는 전연 대조적인 것이며 즉 북조선에 이주하는 조선인은 전시 남방에 강제 징용 갔던 북조선인이 아니면 북조선 공산당원인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남하한 조선인 총수는 150만에 달하고 있으나 북조선으로 이동한 조선인은 그 1%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남하 조선인 수는 극히 감소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38선에 있는 소련 경비대의 취체가 심해진 까닭이라 한다. 나는 스트롱 여사가 남조선을 시찰하지도 않고 남조선에서 투옥된 민주주의 지도자에는 지난 8월 중순 음모 사건 연루자가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북조선이 남조선보다도 큰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으며 북조선 인민의 총의로서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스탈린 원수 및 김일성을 숭배하는 데 일치하고 있다는 보도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1947년 10월 21일)

최근 이북 지역을 방문한 안나 루이스 스트롱(1885~1970년)의 취재 내용을 반박한 기사다. 스트롱은 미국 저널리스트로는 이례적으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 큰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그는 1947년 8월부터 이북의 소련군 점령 지역을 답사했고, 1949년 그 결과를 정리해서 <In North Korea>로 출간했다. 그 내용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5>(한길사 펴냄) 498~538쪽에 수록되었다(이종석 옮김).

스트롱의 기록에는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생한 현장감이 있어서 활용 가치가 크다. 나도 1946년 11월 14일자와 1947년 3월 2일자 일기에서 이북의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참고 자료로 활용한 일이 있다. 그런데 램버트가 적극 반박하고 나서는 것을 보며 스트롱 기록의 신빙성을 다시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스트롱의 기록을 처음 활용할 때(1946년 11월 14일) 이런 의견을 붙여 놓았었다.

스트롱의 글은 그의 '반미 좌경' 성향을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감안할 것을 감안하더라도 분명한 사실들을 명확하게 정리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북 당국의 선전에 넘어간 냄새가 좀 나기는 한다. 하지만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남에게 믿으라고 하는 우격다짐 선전이 아니라 스스로 믿는 것을 외부인에게 권하는 고급 선전이다. 스트롱 본인은 그 선전자들을 "현실에 대해 좀 배워야 할 것이 있는" 순진한 사람들로 보며 냉철한 시각을 지키고 있다.

언론의 중립성에 관해 나는 '기계적 중립성'에 반대한다. 언론 활동의 어느 영역, 예컨대 사실을 알리는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는 중립성을 지켜야 하겠지만 해설이나 논설에서는 필자 입장을 명확히 밝히는 편이 좋을 때가 많다. 무리하게 중립성에 집착하면 의미 있는 해설이나 논설을 펼치기 힘들고, 꾸며낸 중립성으로 독자를 속이는 일도 많다.

물론 사실 보도에도 은연중 기자 해석이 가미될 수 있어서 경계선이 애매한 문제가 있다. 이 문제의 극복은 저널리스트의 역량에 달린 일이다. 스트롱의 글 전체를 보고 나는 그가 매우 뛰어난 역량의 저널리스트라는 의견을 갖게 되었다. 취재 내용 중 사실과 어긋난 것도 없지 않지만, 취재 방법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성의 한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램버트의 기사에서 남으로부터 북으로의 인구 이동이 적지 않다고 한 스트롱의 주장을 반박한 대목은 램버트 쪽이 옳다. 스트롱의 글에는 이 대목이 이렇게 나와 있다.

미국인들이 식량이 북으로 가는 것을 막으니 사람들이 식량을 찾아 남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방문하던 1947년에는 상황이 변해 있었다. 북한의 농지가 늘어났고 농사가 풍작이어서 50만 명이 북으로 이동했다. 1일 1500명 이상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북으로 오는 사람은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들이거나 농토를 구하러 오는 농부들이었다. 공장과 농장에서 나는 그들과 만나 보았다.

북한 측은 이런 인구 이동에서 득을 보는 편이었다. 북한에서 잃는 인구는 전직 경찰, 관리, 소작료나 이자 수입으로 살던 도시민이었고, 얻는 인구는 건설과 개발에 열성적인 노동자들과 농민이었다. 나는 이런 노동자들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았다. "왜 북으로 오셨죠?" ('북한, 1947년 여름',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537쪽)

이북의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주민들도 토지 개혁 등 제반 '민주 개혁'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개혁을 주체적으로 해냈다는 데 대해 만족해서 혼란에 빠져 있는 이남 주민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사정이 좋아진 북쪽을 남쪽의 일꾼들이 대거 찾아오고 있다는 선전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스트롱의 취재 내용이 설령 사실을 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북 주민들의 믿음을 담았다는 데 가치가 있다.

스트롱의 취재 활동에는 여건의 제약이 있었던 것이고, 그의 월북자 수 과대 평가를 램버트가 지적한 것은 잘한 일이다. 스트롱보다 우월한 취재 여건을 누린 결과다. 그런데 뒤이어 "남조선에서 투옥된 민주주의 지도자에는 지난 8월 중순 음모 사건 연루자가 포함"되었다고 주장한 대목에서 램버트가 저급한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램버트는 스트롱이 이남 지역을 시찰하지 않은 것을 취재의 결함으로 지적했는데, 그 자신은 서울에서 취재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그는 "8월 중순 음모 사건"에 대한 장택상의 10월 13일 발표를 받아 적을 뿐, 그 발표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아무 생각이 없다. 미소공위의 소련 대표가 이남의 좌익 탄압을 사례까지 지적하며 항의하고 있는 판에 통신사 특파원이라는 자가 몇 주일씩 서울에 머물면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지 확인할 생각을 하지 않고 경찰 발표를 백퍼센트 받아들인다면 이건 언론인 자격이 없는 놈이다.

램버트의 기사 때문에 스트롱의 글에 다시 눈이 갔는데, <해방 전후사의 인식 5>에 실린 이 글은 1947년 8~10월의 취재를 발판으로 2년 후 정리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취재 이후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을 계속 관찰하며 그에 대한 자기 관점을 정리해서 글 앞쪽에 실어 놓았다. 조선 문제의 유엔 상정 이후 진행에 대한 설명을 옮겨놓는다. 물론 그의 '반미좌경' 성향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겠지만, 감안하고 읽기만 하면 반공 교육에 얽매인 우리의 시각을 열어줄 수 있는 글이다. ('북한, 1947년 여름',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499~501쪽)

마침내 한국에서 있었던 마셜 국무장관과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 사이의 대화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소련은 소련군과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여 한국인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은 북한의 이념과 방법들이 득세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했다. 미국은 국제연합에서의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한국에서의 선거를 감시할 국제위원단을 결성하도록 하였다. 소련은 이 위원단을 거부하였고 선거는 미군 점령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유엔위원단은 이 선거를 치르는 데 대해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위원들은 현재의 분단 상황을 강화하고 영구화시킬 것을 염려하여 남한에서의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위원단은 공명한 선거가 이루어지기 전에 우선 남한에서의 근본적인 개혁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위원회는 남한 지역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의 많은 증거를 제시하였다. 보고서는 소위원회로 넘겨졌는데, 그 위원회의 법적인 지위는 불분명하였고 이 문제에 대해 조치할 권한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그러나 그 위원회는 미국의 주장에 따라 움직였고 미군 점령 지역에서 단독 선거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미국인들은 통일과 독립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과소평가했다. 미국인들에게는 아주 놀랍게도 그들이 남한을 통치하기 위해 선택하였던 걸출한 세 명의 보수 지도자들 가운데 두 명이 선거가 나라를 분할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난하였다. 미국인들이 선임한 직책인 남한 과도입법의원의 의장인 김규식은 항의의 표시로 사임하였고 소련 점령 지역 한국인들의 회담 초청을 수락하였다. 우익 테러리스트 지도자인 김구 또한 선거를 거부하고 북으로 회담하러 갔다. 남한의 57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도 회담을 위해 북으로 갔다.

선거는 경찰의 테러와 살인 그리고 좌익의 항의와 봉기의 와중에서 1948년 5월 남한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우익 테러리스트들은 신문사를 파괴하였고 심지어 YMCA까지 공격하였다. 미군 책임자들은 무법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청년단'을 진압하는 대신에 끝에 납이 달린 곤봉으로 무장한 2만5000명의 청년단원들을 선거 관리에 이용하였다.

한편 민족통일회의는 1948년 4월 22일에 열렸다. 회의에는 북한 대표단뿐 아니라 남한의 57개 단체의 대표 240명도 참가하였다. 이 회의는 남한에서 추진되고 있는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에 분명히 반대하였다. 회의에서 양쪽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기초 위에서 한국은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통일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1. 양 점령군의 철수.
2. 민족정치회의에 의한 임시 정부 조직.
3. 헌법의 채택과 전국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던 두 우익 지도자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 정부에서 사유 자본의 허용을 보장받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들은 '사적 독점'에는 반대하지만 사유 재산권은 인정한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그들은 또한 어떠한 독재도 허용하지 않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토대 위에서 '최고인민회의'가 1948년 8월 25일 구성되어 북쪽에서 기능하기 시작하였고, 그 동안 이승만은 미군 점령 지역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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