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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식 '거지 단속'과 '폭동 음모 분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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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식 '거지 단속'과 '폭동 음모 분쇄'

[해방일기] 1947년 10월 15일

1947년 10월 15일

오랜만에 오기영의 수필 하나를 소개한다.

"거지 추방"

서울 장안에서 거지가 일소된다. 적어도 서울을 중심으로 삼백 리 내에서는 거지가 일소된다. 참으로 반갑고 명랑한 시책이다. 현명한 시당국의 이러한 현명한 시책에 서울 시민은 누구나 당연히 찬의를 표하였다. 사실 일국의 수도는 수도다워야 할 것이다.

외국 사람의 내왕이 많은 이 서울은 조선의 얼굴이다. 이 얼굴에 깨끗하고 명랑한 표정이 있고 없는 것이 이 나라가 명랑하고 깨끗하냐 못하냐를 외국인의 인상에 영향시키는 것인 만큼 조선은 가난하고 게으르고 피폐하다는 것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하겠다.

그뿐 아니라 이 나라의 사회 정책이 어떻게 되었기에 이렇게 거지가 많으냐는 경멸을 받지 않아야 할 것이요, 이 나라의 경제 정책, 산업 정책이 어떻게 되었기에 이렇게 건장한 거지가 가로에 범람하느냐 하는 의심도 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지라 일국의 수도 서울에서 거지를 일소하는 것은 지극히 현명한 시책이다. 여기 시민들이 찬의를 표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서울시로서는 세금 한 푼 안 내는 이들 귀찮고 지저분한 손님을 그냥 지경(地境) 밖으로 추방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시책을 강구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들을 트럭에 실어서 지정된 구역, 삼백 리 밖에 내려놓으면 그뿐이었다. 그걸로 책임 완수요 시민의 찬성을 받을 만하였다.

그러나 앉아서 떡을 받는다는 말은 있지마는 앉아서 거지 떼를 받는다는-이 전고에 들어본 일도 없는 돌연한 사태에 지방 관민의 경악과 낭패는 과연 언어에 절(絶)한 바라 할 것이다.

거지의 본업이 구걸인 바에 배고프면 아무 집에서나 한 때 얻어먹고 볼 일이다. 게다가 삼백 리 길을 트럭에 실려 갔으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플 것이다. 우선 내려놓아 준 그 지방 그 동리에서부터 다시 구걸을 개시하는 것도 그들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 동이라야 몇 십 호, 한 읍이라야 몇 백 호에서 천 호 내외일 것인데 여기다가 세 대, 네 대 트럭에 실려 온 수백 명 거지 떼가 호별 방문을 일제히 개시하였을 때 그 광경과 그 지방 가가호호의 경악과 낭패를 상상해 보라. 웃지 말고 엄숙히 상상해 보란 말이다.

자~ 이 노릇을 어찌하잔 말인가. 갑자기 거지 합숙소를 준비할 수도 없고 그들을 위하여 집집이 밥을 더 짓는달 수도 없고….

그러니 이 동리에서도 유일의 현명한 방책은 역시 이 거지 떼를 지경 밖으로 추방하는 수밖에 없다. 우거, 마차, 모두 있는 대로 징발하여 거지들을 또 실어라, 우리도 우리 지경 밖으로 몰아내자.

그럴 것 없이 거지들도 도로 서울로 가면 그만이었다. 올 때처럼 트럭은 못 타더라도 걸어서라도 도로 가자. 서울시 어느 곳에도 '걸인 물입(勿入)'이라는 간판은 없더라.

그보다도 또 조금 꾀 있는 지방에서는 이 거지 떼를 일당(一堂)에 모아 놓고 정말 거지냐 아니냐를 감정하였다. 그 결과가, 거지 아닌 사람이 얼마든지 나섰다. 비록 겉은 거지 같으나 주머니에서 십만 원 돈뭉치가 나오는, 비록 행상이로되 훌륭한 상업가도 있었다. 물론 정말 거지라도 거지 아니라고 나서는 패가 많다. 그러나 그건 또 그 지방에서 그다지 깊이 캐볼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다. 오백 명 중에서 거지 아니라는 사람 사백 명을 골라서 기차를 태워 서울로 돌려보내면 그뿐이었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거지를 일소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생업을 주고 임금을 살포할 것이요 그래서도 안 되는 성격 파산자는 어떤 일정한 장소에 강제 수용하고 강제 노역이라도 시켜서 제 밥을 제가 벌어먹는 인간을 만들어야만 할 것이었다.

예로부터 궁민 구제 공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도로 개수, 미간지 개간 같은 사업에 의하여 임금을 살포하는 것이다.

기왕 거지를 추방하려거든 어떤 미간지 개간이라도 시켰더라면 그들도 먹고살고 식량 증산도 되는 일석이조일 것을. 이건 또 거창한 사업이라면 서울 시내의 청소 작업과 오물 처치 인부로라도 썼더라면 수도 서울은 거지가 없어져, 오물이 없어져, 전염병이 없어져, 일석에 이조, 삼조, 사조, 오조의 효과가 있었을 것을. 아까워라. (<신천지>, 제2권 제9호(1947년 10월), <진짜 무궁화>(성균관대학교출판부 펴냄), 44~47쪽)


사회 상황을 밝히는 데 더 애써 주기를 바라는 독자들이 많았고, 나 자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사태의 흐름을 쫓기에 바빠 사회 현실을 많이 다루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해학적인 수필 하나가 눈에 띄므로 이를 통해 당시의 거지 문제를 소개한다.

서울의 거지를 없애기 위해 삼백 리 밖으로 실어낸다. 참 기막힌 조치다. 이런 조치를 실제로 수도경찰청이 1947년 8월 말부터 시행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의 걸인을 시골로 이송한다."

수도청에서는 서울 거리에서 걸인이 헤매는 일이 없도록 이들을 트럭에 실어 수백 리 밖 시골로 이송하여 22일부터 25일까지 약 1200명을 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거지들은 보내면 또다시 그리운(?) 서울 거리로 기어들어오고 있다고 하며 그들 통용어로 트럭에 실리면 "오늘 시골 출장 간다"고 말하는 매우 유쾌한 강자(强者)도 있다고. 수도청의 대책을 물으니 "다시 들어오면 또 보내고 또 보내고 해서 장기전으로 나간다"고 말한다. 이번 거지 일소책은 얼마나 성과가 있을 것인지 일반 시민의 주목을 끌고 있다. (<경향신문> 1947년 8월 26일)


<경향신문>에는 그 이튿날(8월 27일) '여적(餘滴)'에도 거지 이야기가 나왔다.

수도청에서는 서울 가두에 범람하는 걸인군을 지방으로 이송하였다고 하거니와 생활이 이 모양이고, 전재민들이 많으니까 용혹무괴이지만 사실로 서울에는 거지가 너무 많다. 음식점에 앉아 있으면 양담배 장사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함께 거지들의 공격도 상당한데 개중에는 동냥을 안 준다고 손에게 대성질호(大聲叱呼)로 호령호령하는 호걸 걸객도 있다.

거지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런던에도 거지가 어느 나라에 지지 않게 많은데 우리들 보기에는 거지지만 자기들은 거지가 아니라 훌륭한 직업인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들은 백화점 앞에서 자동차가 정차하면 얼른 문을 열어주고 그 행하(行下)로 돈을 받는 것이며 포도 위에 만화를 그리고 그 구경 값으로 돈을 받는 것이지 결코 그냥 무조건하고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딴은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는 거지도 이렇게 당당하단 말!


1946년 6월 21일 일기에서 유민(流民) 문제를 설명했다. 1946년 말 군정청과 전재동포원호회는 '전재민'의 수를 280만 명으로 집계했다. 이들의 대다수가 룸펜 계층을 이뤘고 '거지'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그중 작은 일부였다. 극우 단체의 동원력은 이 룸펜 계층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아무 대책도 없이 걸인들을 모아 수백 리 밖에 실어다 놓는 조치. 도로 기어들어오면 또 실어내고 또 실어내고 해서 '장기전'으로 가겠다는 발상. 문제의 진정한 해결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관할 구역만 자기 힘으로 지키겠다는 배짱이 장택상답다. 그런 장택상의 수도경찰청이 10월 13일에는 좌익의 '폭동 음모 사건' 진상을 발표했다.

"전율! 국제적 대폭동 계획"
"8·15를 계기로 남로당의 대음모-싸부신 전 주경 소 영사도 가담"

지난 8월 15일을 기하여 남조선 각지에 폭동을 계획 준비하였던 남조선노동당과 민전의 일대 음모 사건과 그 배후에서 조종 지령한 북조선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와의 관계에 대한 전모를 13일 수도경찰청 장택상 총감은 다음과 같이 특별 발표를 하였다.

"수도청 특별 발표" (10월 13일)

남로당의 기본 노선은 "조선 문제를 자주적으로 민족적 입장에서 운운" 하는 것이 아니라 반민족적 매국적 지령에 의하여 모 1국의 주구가 되어 남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목적하고 의식적으로 야기시킴으로써 국제적으로 미국의 입장을 불리케 하여 모 1국에 편향하여 남북 통일 계급 전제 정권을 기도함에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남로당의 기본 노선은 공의가 재개되고 또 협의 대상으로 인하여 난관에 봉착함에 이르러 필연적으로 그 특징을 노골화하였다.

(…) 8월 15일 당일에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행정 명령 제5호가 발령되어 비로소 남조선노동당 계열은 합법적 면을 단념 포기하고 그의 기본 노선 관철을 위하여 비합법적이라도 인민 대회 이상의 군중을 동원시켜 경찰관의 간섭과 우익 세력을 압도시키고 8·15 당일은 좌익의 영도 아래 일대 폭동 시위를 전개하여 공위와 국제적 관계에 있어 미국 측을 굴복시키고 소련 측의 우위를 기도하고 소기의 정권욕을 충만시키려던 것이다.

(…) 비합법적 폭동 음모를 은폐하고 군중에게 합법적 대회를 가장하여 기만 동원을 용이케 할 목적으로 합법 면에 민전을 중심으로 8·15 기념 행사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당국과 표면 교섭 형식을 취하고 이면에는 남로당 조직 체계에 비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폭동을 준비하고 8월 15일 상오 2시를 기하여 일제 봉기할 계획을 수립 집행하려던 것이다.

폭동 계획 최초 책임자는 평양에 있는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싸부신)이 주재로 해주에 도착하여 있는 남로당중앙정치위원회 대표 박헌영 대리 이주하 허헌 이기석 김삼룡 이승엽 김용암 구재수 7인으로 구성된 이상 3자이다. 이 3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와 남로당 정치위원회와 밀접한 연락이 되어 있고 남로당의 모든 노선 지령은 상호 협의 결정하게 되었다.

그 증거로서는 해방 직후 1946년 4월 초순 서울 소련영사 싸부신과 조선공산당 간부와 밀회한 사실 남조선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와 이영을 중심으로 한 장안파가 대립되었을 때 북조선공산당이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의하여 박헌영으로 하여금 재건파를 지지케 한 사실 1946년 10월 3당 통합 당시 박헌영의 합당 노선을 반대한 강진 이정윤 백남운을 평양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에 불러 싸부신이 자기비판을 강요한 사실 1946년 12월 남로당 중앙위원회에서 추천한 30여 명을 소련군사령부 정치부를 통하여 파견한 사실 1947년 6월 공위에 제출한 남로당 답신서를 중앙위원 조두윤이 기초하여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의 결재를 받은 사실 1946년 12월 남로당 중앙청년부장 고찬보가 북조선에 갔을 때 싸부신이 초청하여 10월폭동 사건은 영웅적 투쟁으로 찬양하고 계속적으로 투쟁하라고 지시하였던 사실 해주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권오직 박치우 정재달 이원조 이태준 등이 <인민의 벗> <민주조선> <인민조선>을 비밀 출판하여 계속적으로 남조선에 이송 당원에게 배부한 사실(실물을 다수 압수) 1947년 5월에 전 전농 부위원장 이구훈이 출감하지 그의 인사 문제 결정에 있어 남로당 중앙에서는 이구훈을 남노동 경남 위원장으로 임명하는가 또는 전농 부위원장으로 하는가 양론이 있어 결정되지 못하여 동인을 북조선에 보내어 박헌영과 싸부신을 만나 결정 임명케 하였다는 사실.

해주에 있는 박헌영은 1946년 10월에 남조선에서 도피하여 남로당 중앙정치위원회의 대표로서 소련군사령부 정치부와 연락하여 남로당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중앙정치위원회는 남로당의 최고결정기관이고 모든 지령 지시는 이 기관에서 발령되고 이번 폭동 지령도 이 기관에서 되었다.

지난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남로당 중앙정치위원회 중앙상무위원회 해주 박헌영 평양 정치부에서 폭동계획 수립 7월 31일 중앙민전 8-15기념행사 준비위원회 결성 8월 1일부터 5일까지 남로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서울시 각도에 폭동준비 지령 8항목의 발령과 각도 비밀투쟁위원회 조직.

1. 미소공동위원회 성공을 위하여 하급 군중에게 일층 강력적으로 투쟁을 전개할 것.
2.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인구의 2할 이상을 돌파할 것.
3. 여하한 탄압이 있더라도 능히 투쟁할 수 있도록 하부조직과의 연락망을 둘 것.
4. 보선법이 실시될지 모르니 선거대책을 구체적으로 투쟁할 것.
5. 우익단체와 관공서에 당원을 적극 주입시킬 것.
6. 8·15 행사를 사력을 다하여 추진시킬 것.
7. 자위대를 확립하여 면 단위로 백 명 이상의 자위대원을 확보하여 면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위원장이 사령부를 지도할 것.
8. 합법 면에 민전을 내세우고 집회허가 투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비합법 면은 극비밀리에 도-군-면 세포에 이르기까지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중앙지령이 있을 때 어느 때든지 투쟁할 수 있는 태세를 취할 것.

8월 4일에는 경기도 민전 8·15 기념 행사 준비위원회 결성 8월 5일 남로당 경기도 비밀투쟁위원회 결성 8월 5일부터 10일까지 각 시·군에 폭동 준비 지령 도달과 폭동 준비. 8월 15일 폭동 지령 발동. (<동아일보> 1947년 10월 14일)


문장에 더러 앞뒤가 맞지 않는 곳이 있는데, 기자가 짜증이 나서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어차피 '말 되는 소리' 만들 길이 없으니까. 밑줄 친 부분, '증거' 사실 나열만은 독자들이 유심히 읽어보기 바란다. 그 사실들이 정말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게 무엇의 증거가 된단 얘기인가? '대폭동'이나 '대음모'의 증거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난 8월 6일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 '좌익 사냥' 얘기를 했다. 1947년 여름의 남조선은 극한적 정치 탄압 아래 놓여 있었다. 탄압 대상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모든 비극우(非極右)가 탄압 대상이었다. 미소공위에서 소련 대표가 이 문제를 지적하자 미국 대표는 치안을 위한 조치가 군정사령관의 고유 권한이며 미소공위에서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잡아뗐다. 경찰은 대량 검거가 폭동 음모 분쇄를 위한 것이라고 우겼다.

두 달이 지난 뒤 그 '폭동 음모'에 관한 발표가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 내용을 놓고 시비를 따지기도 부질없다. 특별히 궁금한 것은 왜 이 발표가 경무부장 조병옥 아닌 수도청장 장택상 이름으로 나왔나 하는 것이다. 조병옥은 그래도 부끄러움을 좀 아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장택상이 이것을 제 공로라고 제 손으로 고집해서 발표한 것일까?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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