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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 미쳐서 가난해? 가난하니 신에 미치지!

[프레시안 books]가이 해리슨의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가이 해리슨 지음, 윤미성 옮김, 다산북스 펴냄)를 읽고서 신선하다고 느꼈던 것은 세계의 수많은 도시에서 만난 대중에게 신을 왜 믿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어느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들은 너무 뻔했고, 굳이 이런 대답을 들으려고 세계의 수많은 도시를 돌아다녀야 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내가 기대했던 건 각 사회 종교심들 간의 다양한 결에 관한 정보와 해석이었다. 지식인들은 종종 보편적 종교심 같은 것을 해석하고 싶어 한다. 또 보편적 종교심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에 끼어들어 논쟁하고 싶어한다. 해서, 내가 보기엔, 지식인들의 말은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의 생생함을 담아내는 생각을 좀처럼 펼치지 못한다. 그리고 너무 많은 수사와 지식들로 포장된 나머지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 자체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런 비판적 관점들은 나 자신에 대한 불신에서 유래한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만약 이 책이 세계 여러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신(들)을 믿는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읽으려는 시도를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 가이 해리슨은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에게 물었다. 옳거니, 그 속에는 사람들의 거칠지만 생생한 말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해석이야 동의할 만하든 아니든 상관없다. 동의가 안 되도 나는 저자를 치하할 생각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려 갔다. 실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불과 8쪽밖에 안 되는 첫 장을 읽었을 때 이 책은 나의 기대를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조금 남는 미련으로 끝까지 읽었지만, 나머지는 혹시나 하는 실오라기 같은 기대감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관적 생각이 반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 서두에서 "당신은 왜 신 혹은 신들을 믿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 중 '일반적인' 답변 50가지를 모았다고 말했으니, 나의 실망은 그의 글을 꼼꼼히 읽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각 도시마다 신(들)을 믿는 다양한 생각들을 말하는 것이 그의 관심이 아니라 세계 모든 도시 사람들을 아우르는 일반적인 대답들이 그의 관심인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뻔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 세계를 두루 다니며 물었다는 건 훌륭한 글쓰기 자세일 수 있다. 끝까지 확인하려는 자세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자로서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혹 부록에라도 '일반적이지 않은' 답변들, 해서 저자가 다루지 않은 것들에 관한 소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가이 해리슨 지음, 윤미성 옮김, 다산북스 펴냄). ⓒ다산북스

아무튼 그것은 나의 관심일 뿐…. 저자는 가장 일반적인 대답들 50가지 하나하나에 대한 자신의 코멘트로 500쪽이 훨씬 넘는 책을 저술했다. 제목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 가지 이유(50 Reasons People give for believing in a God)"이지만, 실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들의 '부당함에 대하여'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요컨대 저자는 대중들의 신(들)에 관한 믿음들이 몰이해, 편견, 아집들에 지나지 않음을 훈계하는 책을 쓴 것이다. 이때 그의 인식의 포지션은 다양한 종교들을 존중하되, 합리적 무신론자의 시선에서 균형 잡힌 태도로 종교들의 편협함을 지적하는 데 있다.

예컨대, '신이 나를 행복하기 만들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는 대답에 대해 저자는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들이 더 종교적이고 반대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이 더 비종교적이라고 말한다. 또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으니 신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답변에 저자는 엄청난 사람들의 죽음과 재앙을 말하면서 자기의 구원을 열망하는 신앙은 무책임하고 사악하다고 말한다.

이 훈계의 말들은 읽는 재미가 있다. 쉰 개의 장들이 하나 같이 간명하고 명쾌하다. 또 재기 넘치는 논객답게 사람들의 신에 관한 신념들을 반대하기 위해 그 신념들의 논리가 내파되는 허점을 잘도 꼬집는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고, 또 많은 종교인들에게 부끄러움과 성찰의 마음을 자극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대감이 무너진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나는 이 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에서 좀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이 책이 리처드 도킨스를 포함한 이른바 최근 무신론자들의 생각의 방식과 무척 닮아있다는 점이 걸렸다. 실제로 저자도 무신론자의 시각에서 이 책을 쓰고 있음을 밝혔고, 자신의 생각에 중요한 전범의 하나로 리처드 도킨스 같은 최근의 이른바 과학적 무신론자들을 들고 있다.

도킨스는 개신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적 창조론과 대결하기 위해 특급 과학자로서 자신의 최고의 지식을 동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적 종교인들의 창조론을 여지없이 짓밟고 나서, 꽤 무모한 비약을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전체는 무의미하며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헌데 근본주의자들의 창조론은,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설득력이 없는 도그마로서 낙인찍힌 것이다. 요컨대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무수한 신학적 견해들의 축에 도무지 낄 수도 없는 속설에 불과하다. 그런 도그마들을 공박하기 위해서 도킨스 식의 고급의 과학 지식이 동원될 필요가 있을까. 마치 활과 창을 쓰는 원시 부족을 공격하기 위해 미사일을 쏘는 것 같은 격이 아닌가?

게다가 더 문제는 이런 비판으로 종교 자체는 존재할 가치도 의미도 잃어버렸다고 단언한다는 점이다. 말했듯이 근본주의적 도그마가 이슬람교나 기독교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비록 근본주의가 겉으론 도드라지는 듯이 보이지만, 기독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 사회들의 저변을 흐르는, 조용하지만 깊고 성찰적인 종교의 흔적들은 여전히 유의미하게 존속하고 있다. 그 중 많은 것들은 물론 종교적 담론과 제도의 형식으로도 실재하고 있다. 또 세계의 많은 사회들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 종교인과 종교 제도들이 무수히 실재하고 있고, 고통 받는 이들을 착취하는 권력과 체제들에 대항하는 종교인과 종교 제도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근본주의적 도그마를 논박하는 것으로 종교의 종말을 선언해도 되는 것인가?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좀 더 근원적으로 도킨스 같은 이들의 종교 비판의 문제점을 그들의 인식론적 태도와 결부시킨다. 그녀는 도킨스 같은 이들을 '과학 근본주의자'라고 보면서 과학 근본주의와 종교 근본주의는 근대주의가 낳은 문제적 쌍생아라고 비판한다. 요컨대 근대주의의 병폐인 이성 중심주의가 전근대를 처벌하는 언어의 극단에 서 있는 과학 근본주의는 모든 것은 이성의 잣대로 해석하며 이성적인 언어로 재현되지 않는 것은 모조리 제거해 버려 마땅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교 근본주의는 그 반대로 이성을 제거함으로써 종교를 실현하려 한다. 하여 근대는 이 두 근본주의 간에 끊임없는 무모한 갈등으로 점철되면서 성찰적 종교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문제제기한다.

이것은 종교적 반이성주의자를 앞에 두고 자신의 현란한 과학적 지식을 자랑하는 데 급급했던 도킨스류의 토론 방식에 대한 탁월한 논평이다. 그런데 해리슨은 도킨스의 논지에 공감하면서도 상대를 공박하는 방식에선 도킨스와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는 도킨스 식의 공세적 어법 대신에 설득의 어법을 선호한다. 종교인들이 신을 믿는 이유들을 존중하면서도 그 말들이 자신들의 생각의 밖을 간과하고 있다는 한계점을 도발적이지만 공격적이지는 않은 어투로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근본주의자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인다.

또 그가 과학자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자연과학적 언술만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사회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지식들을 두루 사용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외견상 과학보다는 덜 명료한 담론 형식을 취하니, 더더욱 근본주의자 특유의 진실게임의 어투와는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리슨이 카렌 암스트롱의 비평의 사정권을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의 대부분의 논지에서 그도 도킨스처럼 종교를 근본주의적 믿음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고, 그것을 비이성적이라는 틀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서 이성의 바깥을 존중할 생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성의 바깥은 맹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폭력적이라는 것이겠다. 반면 이성은 자기 성찰 능력이 있으므로 자기중심적이며 폭력적인 이성의 남발이 있더라도 스스로 지양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여 오늘의 세계에서 더 핵심적 문제는 '이성 대 이성'의 대립이 아니라 '이성 대 비이성'의 대립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신을 믿는 이유들에 대한 그 뻔한 대답들을 수집하게 하고 그것들에 대해 방대한 분량의 그 믿음들의 부당성을 논한 책을 저술하게 한 것이겠다.

그로 하여금 그렇게 보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경 '부시 이후의 종교적 세계'에 대한 혐오감이 주된 동기가 되었을 것 같다. 종교들이 무차별 테러와 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종교들의 문제점인 근본주의적 믿음들을 공박함으로써 세계의 위기를 야기하는 요인을 제거하려는 것이라는 얘기다.

해리슨이 이 책에서 자주 생각을 빌려오는 미국의 종교학자 필 주커먼의 관점이 그렇다. 더 종교적인 나라들이 더 불평등하고 더 갈등적인 반면, 덜 종교적인 나라들은 더 평등하고 대화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회 현상의 원인이 종교일 수 있다는 저자의 가정에 있다. 즉 그는 그 반대의 경우를 간과하고 있다.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의 가설은 주목하지 않는다.

실제로 종말론적 신앙이 활성화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많은 연구들은 주커먼과는 반대의 스토리라인을 선호한다. 즉, 스스로는 그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사회를 바꿀 수도 없고 그것이 바뀔 수 있다는 계산 가능한 기대가 붕괴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하여 종말론을 그 담론의 내용으로 묻기보다는 그 담론의 사회적 현상과 형성에 대해 묻는 논의들은 종말 현상과 '무력한 대중의 절망 상황'을 연결시키곤 한다.

근본주의적 신앙에 동조하는 많은 신자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그들은 대개 학력이 낮고 사회적 권력에서 소외된 대중이다. 비록 근본주의적 신앙의 지도자들은 막강한 세계적 권력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지만 대중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는 대개 소외된 계층과 친화적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실재하는 사회를 형성하는 주역이 아니라 그 사회의 현상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사람들이다.

해리슨이 수집한 사람들의 신(들)에 대한 믿음은 다분히 근본주의적 신앙의 도그마들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그 대답들은 어느 사회든 차별 없이 뻔하다. 그러나 그런 신앙들이 더 넘치는 사회가 더 불평등하고 더 폭력적이라면, 그것은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만든 주역이기 때문은 아닐 수 있다. 왜냐면 그들은 대개 무력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사회의 불평등성을 주도한 이들은 자본가들이고 정치인들이며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저인 세계의 기회구조를 활용할 줄 아는 이들이며, 자신의 책임을 위장하는 탁월한 기술을 담지하고 있는 이들이다.

대중은 이런 사회에서 종종 근본주의적 종교성에 동화된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정서를 결집시키고 분노로 표출시키는 매개자들이 있다. 그들은 영락없이 담론을 대중화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고 합리성의 능수능란한 조정자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킨스나 해리슨의 종교 근본주의 비판은 과녁을 잘못 잡았다. 오히려 그들은 대중의 종교성 속에 내포된 아픔을 읽어내기 위해 자신의 과학적 능력, 그리고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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