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상의 식당에서 근사하게 점심을 먹고 단종비각을 지나 반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왼편 사면이 온통 보랏빛 천지였다. 그 순간 내 머리를 온통 점령하는 꽃이 있었다. 백암산에 갔을 때도 많이 본 꽃이었다. 그것은 얼레지였다. 보통 꽃들이 많아도 한 무더기씩 피어있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얼레지 군락은 산의 한 골짜기를 온통 저의 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 얼레지 군락. ⓒ이굴기 |
얼레지 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얼레지의 키에 눈을 맞추려니 오체투지하듯 나를 땅바닥에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법 개나리만한 키에 웬만한 서어나무 가지 굵기만한 허벅지의 나를 얼레지는 순식간에 자빠뜨린 것이었다. 나는 눈 높이를 발등쯤에다 맞춘 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엎드려 보는 낮은 세상. 말없는 대지의 적막이 일순 귀를 가득 채우는가 하더니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뒤척임이 또한 귀로 왕창 쳐들어왔다. 고작 173센티미터 근방의 높이에서는 도무지 느낄 수 없었던 세상의 깊이가 바로 코앞에서 전개되었다. 얼레지의 내부가 환히 보였다. 고요한 보랏빛, W자의 무늬, 6개의 수술과 꽃잎보다 더 짙은 보라색의 꽃밥. 그것만으로 또한 완벽한 하나의 세계가 그곳에 납작하게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내 피부마저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 얼레지. ⓒ이굴기 |
얼레지의 매력은 꽃의 색깔만이 아니다. 꽃잎을 주목해 본다.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꽃잎은 저마다의 독특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쪽진 머리 모양으로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 곳에 있는 얼레지들. 나는 딴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는. 얼레지, 얼레지, 얼레지, 얼레지.
▲ 얼레지. ⓒ이굴기 |
▲ 얼레지. ⓒ이굴기 |
▲ 얼레지. ⓒ이굴기 |
몸을 일으켜 조심히 얼레지 밭을 나오려고 할 때였다. 좀 기묘한 얼레지가 눈에 들어왔다. 몸이 좀 약했는지 마른 줄기를 지팡이처럼 붙들고 있는 얼레지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낙엽을 반지처럼 끼고 있는 얼레지였다. 가만 살펴보니 무슨 사연인지 짐작이 갔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 무더기에서 자라나던 얼레지가 머리에 닿은 그 잎사귀 하나를 그대로 들이박고 뚫은 것이었다. 바짝 마른 낙엽이 허약했던 것일까. 고운 얼레지의 잎과 꽃에도 그런 매서움이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낙엽은 물기를 잃어가며 얼레지에게 작은 공간을 내주려 안간힘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질긴 섬유질이 있어 부스러지지도 못하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얼레지의 잎과 꽃을 잘록하게 묶은 결과가 되고 말았나 보다. 이 기이하고 불편한 동거를 어찌해야 하나.
죽은 낙엽과 산 얼레지. 이 작은 골짜기에서 각자의 소임은 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 앞의 나는 현재 산 사람. 그러니 살아있는 얼레지 편을 들기로 했다. 어차피 얼레지도 올 여름이 저물 무렵이면 낙엽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의 여름이 더 지나면 나의 그것 또한 둘의 뒤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순서가 있다. 곱게 떼내려 손을 갖다대자 껍질이 먼저 알고 부스스 떨어졌다. 저도 이 결과를 미리 헤아렸던 것인가.
▲ 낙엽과 얼레지. ⓒ이굴기 |
▲ 어리둥절한 얼레지. ⓒ이굴기 |
▲ 정신을 차리는 얼레지. ⓒ이굴기 |
반지 같은, 혹은 상처 같은, 혹은 어린 송아지에 흉터처럼 달린 코뚜레 같은, 혹은 혹 같은 낙엽을 제거하자 얼레지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꽃과 잎이 그대로 어색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잘록했던 곳으로 피가 공급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생명이란 싱싱하고 제대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내려오다 말고 혹 그 사이 무슨 움직임이 있나 싶어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벌써 꽃잎은 확실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잎도 가운데가 조금 잘록하기는 했지만 흔적을 많이 회복하고 있었다. 오호라! 얼레지의 혈관을 돌고도는 혈액의 싱싱함. 그 순간을 못 참고 또 누군가를 향한 얼레지의 유혹.
두보는 <곡강>에서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꽃잎 하나 떨어져도 봄빛이 줄어드네, 라고 노래했다. 봄의 총량에서 꽃잎 한 장 떨어지는 것을 포착하고 절정의 시 한 편을 토해낸 것이다. 여기는 태백산 어느 작은 골짜기. 오래 멱살 잡혀 있었던 탓에 창백한 얼굴이었다가 비로소 화색이 도는 얼레지가 하나 있다. 비록 늦었지만 늦은 만큼 올해 부여받은 제 몫의 보랏빛을 더욱 환히 내뿜는 얼레지. 내가 이 산을 벗어날 무렵이면 제자리를 완연히 찾은 얼레지 보랏빛이 하나 더해질 것이니 봄빛은 그만큼 더 밝아지리라.
▲ 다시 활짝 기지개를 켜는 얼레지. ⓒ이굴기 |
전체댓글 0